6주차. 그리스도의 직분자
본문: 행1:15~26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시109:8)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16)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21-22)
1. 가룟 유다의 빈 자리
오늘 본문의 줄거리는 예수님의 열두 사도 중 가룟 유다의 죽음으로 생긴 빈 자리를 맛디아가 대신 채운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가룟 유다에 대해 알아보아야 합니다. ‘가룟’ 혹은 ‘가리옷‘이라는 이름은 일반적으로 출신지인 그리욧을 지칭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람어로 ’거짓말쟁이‘를 뜻합니다. 혹은 ’단검을 지니고 다니는 사람‘이라는 뜻도 됩니다. 이름이 말하는 의미도 무시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예수를 팔아넘긴 유다는 처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그가 예수를 판 댓가로 얻은 은 삼십 냥은 역사상 가장 싼 거래에 해당합니다. 결국 그 돈은 아겔다마 즉, 피밭을 구입하는데 쓰였고 이 저주스러운 이름 때문에 이 밭은 영원히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되었습니다. 알다시피 유다는 예수님의 최측근으로서 참 명석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회계를 담당했습니다. 요12:5-6, 13:29에서 ’돈궤를 맡은 자‘로 등장하는데 유대인들은 탐욕이 가득한 자를 이렇게 표현하곤 했습니다. 베드로 같이 머리 나쁜 사람은 회계 같은 복잡한 것을 담당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유다는 제자들 중 유일하게 갈릴리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좀 소외감을 느꼈을까요? 사복음서에는 유다가 다른 제자들과 잘 어울리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에 항상 반대되는 생각과 발언을 합니다. 마리아가 향유를 예수님의 의 머리에 부을 때에도 그는 비싼 것을 낭비한다고 불평합니다. 이런 점으로 보아 유다는 상당히 인본주의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유다를 불행하게 한 것은 예수님이 그가 기대했던 지도자가 아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이 그가 가진 초능력을 언젠가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사용하실 것으로 기대하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예수님 스스로 십자가 죽음을 택하겠다는 선언에 의해 산산히 무너졌습니다. 결국 유다는 스승을 배신하기로 선택했습니다. 유다의 자유의지는 배신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양심은 유다를 살려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결국 목메어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사실 유다만 주님을 배신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모든 제자들이 실상 주님을 다 배신한 인물들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잡히던 현장에서 모두 줄행랑을 쳤던 사람들입니다. 그중 단연코 제일 배신자는 베드로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가장 어려운 궁지에 몰렸을 때 예수님에게서 등을 돌렸던 사람입니다. 그는 가야바의 뜰 안에 피어오르는 숯불이 어른거리는 가운데 그 깊은 차가운 이른 새벽에 어린 여자아이 앞에서 스승을 부인했습니다. 심지어 계속되는 여자 아이의 추궁에 그는 예수님을 저주까지 하면서 ‘나는 그 사람 모릅니다’고 딱 잡아 땠습니다. 결국 닭이 울자 예수님의 예고가 생각났고 그는 억장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처절한 심정으로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심정이 이보다 더 처절했겠습니까? 거기서 그는 다시 그물을 잡고 바다와 싸웁니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는 주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는 다시 고기를 낚는 어부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게 웬일입니까? 밤새도록 고기를 작기 위해 애를 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이 순간에 하늘의 일과 땅의 일 모두 실패한 것입니다. 그때 주님이 베드로를 찾아 오신 것입니다. 주님은 해변가에서 미리 숯불을 지피고 생선을 구우신 다음 베드로를 그 연회의 자리로 초대했습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요21:12)하고 주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과연 이 순간에 어떤 사람이 고개를 들고 그 식사를 맛나게 먹을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에게 그 조반은 일생에서 가장 길고 무거운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얼마나 부끄럽고 자신이 한심해 보였을까요? 식사 후에 주님은 베드로를 앞에 세우시고 그 유명한 세 번의 질문을 하십니다. 핵심은 ‘아가파스메, 아가파스메’ 즉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입니다. 이보다 베드로의 뼛속을 쑤시는 질문은 없었을 것입니다. 얼마나 베드로를 사랑하셨으면, 얼마나 베드로의 사랑을 받으시고 싶어 했으면 이렇게 같은 질문을 세 번씩이나 반복하고 확인했겠습니까? 드디어 베드로는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듯이 주님 앞에 자신의 사랑을 고백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시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주님이 잘 아십니다“(요21:15-17). 이에 주님은 실추된 베드로의 사도직을 바닷가에서 회복시키십니다. ”가서 내 양을 먹이라, 가서 내 양을 치라“ 세 번 스승을 부인한 제자에게 주님은 세 번의 고백을 받음으로서 베드로는 다시 살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제아무리 죄가 크고 깊다 해도 죄를 고백하고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의 죄를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십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시고 그를 다시 회복시키셨습니다. 이것이 교회 공동체가 세상 공동체와 다른 가장 중요한 가치입니다. 이것이 복음이 지닌 위대함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하나님은 지난날의 모든 허물과 죄악들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십니다. 마치 탕자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듯이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리로 돌아오면 영혼이 새로워지고 병든 마음이 고쳐지고 회복이 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여기서 잠깐 베드로의 두 가지 고백을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마16:16에 나오는 신앙고백이요, 다른 하나는 지금 말한 사랑고백입니다. 이 두 가지 고백이야말로 베드로의 일생 뿐 아니라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고백이자 신앙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두 가지 고백을 두고 전자는 교리적 고백으로 보고 후자는 실천적 고백으로 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고백은 교회의 반석이요, 핵심적 교리입니다. 예수만이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원자 그리스도이십니다. 이것이 교회의 심장입니다. 반면에 사랑고백은 성도의 의무입니다. 성도가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실천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사랑입니다. 사랑없이 복음없고 사랑없이 진리 없으며 사랑없는 생명은 무용지물입니다. 주님이 사랑이시듯 그리스도인은 더욱 사랑함으로 주님을 증거해야 합니다. 정말 사랑이 아니면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저승사자에 이끌려 지옥을 가는 긴 행렬이 있었습니다. 천국에 가던 사람이 궁금해서 그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모두 하나씩 봇짐을 지고 있더랍니다. 도대체 뭐가 들었는지 저승사자에게 물어보니 보따리 이름들을 보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자세히 보니 어떤 사람의 보따리는 ‘미움’이 적혀 있고, 뒷사람은 ‘증오’ 그 다음 사람은 ‘저주’요 계속해서 보니 ‘시기’ 질투‘ ’원한‘ 불평’ ‘모함’ ‘악평’ ‘험담‘ ’다툼‘ 등등이 적혀 있었답니다. 그러다 제일 뒤에 잇는 사람은 큰 깃발을 들었는데 그 깃발에는 이들 무리의 모든 죄악을 한 문장으로 표기해 두었는데 그것이 바로 ’Love is nothing'이라는 것이었습니다.
2. 본문해설
1) 새로운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 베드로(15-20)
- 주님에 의해 사도직을 회복한 베드로를 비롯한 120명의 제자들이 지금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교회가 태동하기 직전의 가장 긴박한 순간의 하나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주님이 기다리면 하늘로부터 뭔가가 주어진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릅니다. 아마 “그게 뭐지?”하고 온갖 상상을 다 했을 것입니다. 어떤 이는 두렵기도 했을 것입니다. “혹시 우리 모두 하늘로 데려가시는 것은 아니겠지?”하고 뜬금없는 추리도 했을 것입니다.
- 그러한 때 베드로가 일어났습니다. 죽었던 베드로가 여기서 일어난 것입니다. 물론 이것으로 인해 분위기 반전이 이루어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베드로는 성령에 이끌린 것입니다. 성령에 의해 그는 갑자기 구약 성경의 말씀이 생각 난 것입니다. 즉 시편 69:25와 109:8의 말씀입니다. 성령은 이렇게 말씀과 함께 역사하십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팔아넘긴 유다의 일이 이미 성경에 예언된 일이었음을 알았습니다. 그 순간 속에서부터 참을 수 없는 뜨거움이 올라오더니 그의 무릎을 벌떡 하고 일으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순간을 우리는 베드로가 자의적으로 일어났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주저없이 이 사실을 선언합니다. 16절입니다.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해 예수 잡는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마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 성경은 약속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말할지 염려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필요한 순간에 성령님은 우리의 말까지 주관하십니다. 이렇게 말씀은 우리를 위해 역사하십니다. 왜 우리가 오직 말씀을 주장해야 하냐면 바로 이런 순간을 위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 안에 거하고 말씀을 지속적으로, 정기적으로 먹고 살아야 합니다. 되도록 말씀을 많이 암송하고 많이 알고 깨닫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능력의 일꾼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그 안에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정확히 해석하는 사람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말씀이 곧 능력입니다. 우려스러운 현상은 말씀의 능력을 가지기엔 너무 힘들고 긴 시간이 소요된다 해서 쉬운 길을 택하는 경우입니다. 하늘에서 벼락이라도 맞아야 능력이 생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누누이 말하지만 벼락치기 공부로는 절대로 시험에 합격하지 못합니다. 공부도 능력도 오랜 시간 동안 공을 들이고 꾸준히 노력해야 얻어지는 것입니다.
2) 맛디아를 뽑는 과정(21~26)
-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은 베드로의 제안을 듣고 아무도 반박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베드로의 제안이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모든 주장과 행위의 절대적 지침이자 판단의 근거입니다. 시 109:8에 보니 유다의 직분을 다른 사람이 취한다고 했으므로 유다 대신에 다른 사도를 선출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 한편으로 기도만 하던 다락방에서 새로운 일이 생긴 것은 색다른 재미였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기다리는 사람들이 지루해 할 까봐 가끔 별미를 허락하십니다. 이제 새로운 제자를 어떻게 선출하는 지 그 과정을 알아봅니다.
- 먼저 사람들은 후보자 두 사람을 천거합니다(23). 하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입니다. 그런데 요셉에 대해선 두 개의 이름을 더 소개합니다. 바사바와 유스도입니다. 바사바는 ‘안식의 아들’이라는 뜻이고 유스도는 영어로 ’justus'인데 그냥 남자 이름이면서 ‘보통 사람’을 뜻합니다. 추론입니다만은 저는 이 이름에서 벌써 요셉은 사도가 될 사람이 아니라고 봅니다. 안식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좋은 말로 편안한 사람, 법 없이 살 사람이고 보통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목숨을 걸고 치열하고 특별하게 살아야 할 사도의 직분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맛디아는 ‘여호와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사도직은 사람이 취하는 직분이 아닙니다. 오늘날 목사직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소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목사가 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직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문제입니다. 목사직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 있음을 성경은 말합니다. 그럼에도 그가 목사가 된다면 그는 하나님의 뜻과 관계가 없는 가짜일 것입니다.
- 두 사람이 후보로 천거되자 제자들은 기도합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손으로 사도를 선출하지 말게 하옵시고 오직 주님께서 제자들의 손을 빌려 새로운 사도를 선출하도록 기원하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중요한 일 앞에 늘 기도해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우리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듯과 은혜에 의해서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속담에 ‘사람은 다 제 잘 난 맛에 산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직 그리스도인은 제 잘 난 맛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하나님에게 붙들려 사는 사람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이제 후보자 두 사람 앞에 제비통이 놓였습니다. 그것이 숟가락이든 통이든, 나무젓가락이 든 통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드디어 두 사람이 제비를 손에 쥐었습니다. 그 결과는 맛디아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24절에 보니 제자들이 이렇게 기도한 것입니다.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과연 제자들은 속으로 맛디아를 원한 것이었습니까? 그런 제자들의 마음을 주님이 아시고 역사하신 것입니까? 그럴 것입니다. 주님은 한 사람의 마음의 소원까지도 들어 응답하시는 분이신데 무 사람의 연합된 소원을 어지 거절하시겠습니까?
- 한편 여기서 ‘제비뽑다’라는 단어에 유의해야 합니다. 원어로 epesen ho krelos인데 영어로는 fell the lot으로 이는 ‘제비뽑기에 당첨되다’ 혹은 그 직분의 운명에 떨어지다‘입니다. 17절에 보면, ’이 사람이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로 했습니다. 그러므로 제비에 뽑힌 것은 직분을 맡은 것입니다. 또 하나 살필 것은 ’우리 수‘ 라는 표현입니다. 이 수는 열 두 사도를 가리킵니다.
- 열둘이라는 말은 히브리인들에게 충족수입니다. 다시 말해 열 두 사도를 세운 것은 열 두 사도를 기초로 신약의 새로운 교회 공동체를 이끌어 가시겠다는 주님의 뜻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맛디아를 성령이 오시기 전에 급히 뽑은 것은 단순히 결원된 수를 보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여기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즉, 증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나라의 일꾼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간다는 뜻입니다. 맛디아를 이렇게 뽑은 것은 단순히 한 사람을 추가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증인을 세운 것입니다. 증인은 오직 듣고 보고 아는 것을 증언하는 자입니다. 재판정에서도 증인이 잘못 증언하면 위증의 벌을 받습니다. 우리는 맛디아처럼 주님의 증인이 되는 특혜를 받았습니다. 나의 노력과 공롤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주권에 의해, 외직 주님의 은헤에 의해 우리가 선택된 것입니다.
3. 결론
이제 오늘의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님은 직접 열 두 사도를 뽑으셨습니다. 그런데 유다의 빈 자리를 채우는 일은 제자들에게 맡기십니다. 주님께서 충분히 직접 뽑으실 수 있음에도 이 일은 새로 태어날 교회 공동체에게 위임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 시대에는 예수님 홀로 역사하셨지만 이제 성령의 시대가 되면 제자들이 성령님과 함께 사역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 일정 부분을 위임하신 것입니다. 지난주에 청지기정신을 설명하면서 저는 여러분에게 청지기가 가져야 할 중요한 가치 중 하나로 위임의 정신을 설명한 바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사역을 위임받았습니다. 주님은 맛디아 선출을 제자들에게 위임하심으로 교회공동체가 담당해야 할 역할을 제시했습니다. 주님이 그러하셨듯이 앞으로 교회 또한 홀로 마음대로 일하지 말고 반드시 성령님과 함께 일하라는 당부가 있는 것입니다. 더불어 기도하듯이 더불어 일하라는 메시지가 담긴 것입니다.
주 안에서 같은 주를 모시고 같은 성령으로 다 함께 하나가 되어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는 하나님의 일꾼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 6주차. 그리스도의 직분자 (아리엘 개혁교회) |작성자 아리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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