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주차. 성령이 오시다
본문: 행 2:1-13
1. 오순절의 유래와 의미
드디어 오늘 성령님이 오시는 날입니다. 주님께서 공생에 기간과 승천하시기 직전까지 계속 약속하고 예고했던 그 성령님이 다락방에서 기도하며 기다리던 120문도들에게 오신 것입니다. 이것으로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오신 이 날은 그야말로 가장 극적이고 기념비적인 역사적 순간입니다.
이 날은 또 오순절입니다. 오순절을 헬라어로 ‘Pentecoste’라 합니다. 이 말은 ‘50번째’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오순절이라 한 것은 순은 10을 말하므로 열이 다섯 개라는 것입니다. 열이 다섯 개면 오순이고 일곱 개면 칠순입니다. 칠순잔치는 70년 생일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렇다면 오순절은 어떤 절기입니까? 알다시피 유대인들에게는 중요한 3대 절기가 있습니다. 시간 순서적으로 먼저 4월초에 무교절과 함께 드리는 유월절과 오순절, 초막절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오순절은 유월절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유월절은 애굽의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해방시킨 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우리나라의 광복절이라고 할까요? 굉장히 기쁜 날입니다. 과거에 얽매였던 사슬을 끊어버리는 날이기에 모든 유대인들은 이날 단 하루지만 유월절에 맛있는 고기를 요리해 먹습니다. 물론 다음 날부터 7일간 이어지는 무교절에는 누룩 없는 빵을 먹습니다만 유월절에는 잔치를 벌입니다. 그리고 유월절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이 다가옵니다. 일곱 날씩 일곱 번을 지나갑니다. 그래서 칠칠절이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50일째 되는 날을 큰 안식일로 지킵니다. 이것이 바로 오순절입니다. 한편, 농사로 따지자면 유월절이 끝나자마자 유대인들은 보리 첫 이삭을 베기 시작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맥추절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런데 첫 이삭을 베는 것은 첫 열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종에서 해방되고 예수님의 죽음을 의미하는 유월절과 부활을 통과한 이후에 오순절이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순절하고 성령이 강림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지 알아보아야 합니다. 알다시피 창세기 2장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자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했잖아요. 다시 말해 생령이라는 것은 죽어 있던 육신에 하나님의 영을 집어넣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하나님의 영으로 지음 받은 영적인 존재인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사람이 다른 동물들, 다른 피조물과 확연히 다른 독특한 존재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다른 피조물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은 아담을 잠들게 하신 다음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여자를 만듭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뱀의 꾐에 빠져 죄를 범하고 맙니다. 이렇게 죄가 인간에게 들어오자 인간은 타락했고, 늘 악한 것만 생각하고 악한 행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사람 지음을 한탄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창 6:3)
사람이 육체가 되었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인 영적인 존재가 타락하여 육적인 존재로 비하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다음 계속해서 관계를 맺고 사귀기 위해 인간에게 영을 주셨는데, 그 영적인 기능이 삭제되자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자 인간에게 찾아온 반갑지 않은 손님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사망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살아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죽은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인간이 육체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적인 생명을 잃어버렸다는 뜻이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는 것이고, 관계가 단절되었다는 것은 사망의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육체라는 말은 하나님과 반대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반대하고 대적하는 일에 대해 심판하시고 진노하셨습니다. 그만큼 육체의 일을 하나님은 싫어하십니다. 사도 바울도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갈 5:16)
그런데 하나님의 본성은 자비하시고 긍휼이 넘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들이 도탄에 빠져 멸망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도탄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시고 여러 언약으로 그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모든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리고 결정적일 때마다 배신의 길을 걸었습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고 다른 신들과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새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렘 31장 31-33절 말씀입니다.“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리고 요엘선지자를 통해 이 언약을 다시 상기시키시고 더욱 세밀하게 계시하셨습니다. 2:28-29절입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하고 회복의 약속을 하십니다. 이 회복의 약속이 성령의 강림이고 이 강림이 오순절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2. 성령을 받는 충분 조건
그렇다면 이제 성령이 바로 와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이 바로 오지 않으시고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성령님보다 먼저 오신 것입니까? 그것은 성령이 오시기 전에 반드시 선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땅 위에 집을 지으려면, 먼저 그 땅을 구입하기 위해 값을 지불해야 하고, 집을 지을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다 해야 합니다. 만약에 땅이 저당잡혀있거나 법적으로 문제가 있으면 당장 집을 지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먼저 이 땅에 오셔서 성도의 구원을 위해 먼저 죄 값을 치루어야 했습니다. 구원을 얻도록 대속의 길을 행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으로 이 대속의 값을 치루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왜 오순절이 유월절 이후에 따라 나오는 것인지 유추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구약식으로 하면 유월절의 희생양이 된 것을 말합니다. 유월절의 희생양을 치루니까 애굽으로부터 해방을 맞았듯이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이 있으니까 사망으로부터 부활이라는 영원한 해방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성령님이 오시기 위한 모든 충분필요조건을 다 충족시키셨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모든 어둠의 권세를 꺽으시고 생명으로 부활하신 주님은 아직도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모든 위로를 더해 주셨습니다. 요 20:21-22입니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마음의 법인 하나님의 영을 우리 속에 담아 두시기 위해 여러 선행조치들을 실행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죄의 삯을 지불하셨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고, 부활과 함께 사망이라는 권세를 이기셨고, 영생의 길을 여셨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우리에게 평안을 선사하셨습니다. 자, 이정도면 이제 성령이 강림하셔도 무방한 것 같습니다. 모든 조건이 다 충족된 것 같습니다. 드디어 주님이 선언하십니다. 깊은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
정리하면 우리는 성령을 받기 위해 다음의 두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하나는 먼저 죄 사람을 받아야 합니다.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은 더러운 것들을 깨끗하여 지고 거룩해진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더러운 곳에 역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죄 사함을 위해 회개해야 합니다. 입술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고백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마음속의 불안이아 두려움을 없애야 합니다. 성령이 오시는 것은 나를 살리시려고 오시는 것이지 죽이려는 것이 아닙니다. 병원에 가면 주사를 맞지요. 주사는 우리를 살리려고 주는 것이지 죽이려고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주사 맞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님을 모시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평안케 하시기 위해 내 안에 오시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성령님이 오시는 것은 다음의 비유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임했다는 것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무슨 소리냐구요? 쉽게 말하자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을 믿고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과 연애생활을 시작하는 것과 같습니다. 남녀도 한번, 두 번 계속 만나다보면 정이 쌓이고 그러다가 뭔가 필이 꽂힙니다. 그때가 되면 하루가 멀다 하고 서로 얼굴을 보고 싶게 되고 헤어지기가 싫어 집에다 바래다 줍니다. 어떨 때엔 집에 갔다가 다시 상대방 집에 데려다 준답시고 발길을 돌리고 하며 길바닥에 돈을 갑니다. 하여간 연애할 때엔 길바닥에 돈을 깔고 다니지요. 그러다 서로 사랑을 확인하고 사랑을 고백하고 나면 이 사람이 내 운명이구나 하고 결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신다는 것은 예수님과의 연애생활을 접고 이제 정식으로 결혼을 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 결혼은 실상 누가 봐도 어울리지 않는 결혼입니다. 신랑은 완벽한데 신부는 가장 볼품없고 못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런 신부를 향해 못났다 하지 않고 “이는 내 사랑하는 신부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선언하십니다. 이보다 더 극적이고 감격적인 결혼이 어디에 있습니까?
3. 성령이 오시는 모습(2:2-3)
자 그렇다면 성령이 오시는 장면을 구경합니다. 2절에서는 바람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러나 이것을 바람이 아니라 바람 같은 소리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이 아니라 청각적인 차원의 일입니다. 다음으로 3절에 보니 불이 나옵니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현현하실 때에 는 공통적인 현상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바람과 불입니다. 하나님은 사방 바람을 불게 하시어 홍해를 가르시고 만나를 내리시고 메뚜기 떼를 보내시며 힘을 자랑하던 엘람을 바람으로 흩어지게 하셨습니다(렘 49:36). 그리고 모세를 부르실 때 가시떨기 나무에 불꽃으로 현현하셨고, 호렙산에서 율법을 수여하실 때엔 온 산을 구름으로 빽빽하게 하신 다음 불 가운데 좌정하셨습니다. 오늘도 성령이 임하는 광경을 누가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4. 성령강림으로 어떤 역사가 나타났습니까?(4-11절)
바람 같은 소리와 불의 혀 같은 것이 각 사람의 머리 위에 내려앉자 이상한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바로 방언입니다. 성경에는 두 가지 방언이 있습니다. 하나는 고전 14:2에 나오는 신령한 차원에서의 방언입니다. 이 방언의 은사는 하나님과 자기와의 깊은 기도를 위한 특별한 은혜입니다. 방언 은사를 받고 기도하시면 기도가 더욱 뜨거워지고 깊어지고 오랜 시간동안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통역이 있어야 해석이 가능한 언어입니다. 그러므로 이 은사는 아무 곳 에서나 남발하면 안 됩니다. 특히 사도 바울의 경고처럼 이런 방언을 함부로 교회 내에서 공개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매우 경계해야하는 일입니다. 다음으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방언이 있습니다. 6-8절을 보십시오. 제자들 대부분은 갈릴리 사람들입니다. 제자들은 지금 다 갈릴리 언어로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있었던 여러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 신기하게도 모두 자신의 출신지역의 언어로 말을 하고 알아듣는 것입니다. 8절입니다.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됨이냐?”
그런데 12절입니다.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사람들은 이 기이한 일을 목격하고 나서 다 놀라워하고 당황해 합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주님은 부활하신 뒤에 자신의 부활을 눈으로 목격하고 있는 제자들이 많이 놀라워하고 당황해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먼저 안심시키십니다. 그것은 놀랄 일이 아니라 기뻐해야 할 일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강조하고 반복하여 가르쳐도 그 순간에 닥치면 제자들은 주님의 교훈과 배움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믿음을 잃어버립니다. 놀라고 당황하고 우왕좌왕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제 모습입니다.
그뿐입니까? 13절을 보세요. 어떤 이는 사람들이 새 술에 취했다며 조롱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지난 주에 말씀드렸듯이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이 바울의 기록에 의하면 약 500명이었습니다. 그중 120명이 다락방에 모여 성령을 기다리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분명하게 말하자면 이들은 모두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주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들 중 일부는 성령이 오시는 역사를 의심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조롱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섬뜩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추리고 추린 120명 들 중에도 이런 사람이 끼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그들은 그렇게 조롱하고 비아냥거리면서 다락방에 남아 기도를 하고 새 사도를 선출하는 등 주의 일을 함께 한 것입니까? 그냥 우리는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런 부류들은 대개 가라지라는 것입니다.
5. 결론
자 드디어 성령님이 오셨습니다. 우리와 결혼을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우리와 영원히 함께 살기 위해 오셨습니다. 내 안에 거주하시면서 나를 도와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더욱 가까이 지낼 수 있도록 방언이라는 선물까지 주시면서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이 부분을 묵상하시면서 이 한 가지 질문은 스스로 던져야 할 것입니다. 이제 성령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행 1:8에서 명령한 말씀처럼 우리가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이 땅에 세워진 교회에 세워진 교회에 본질이요 사명인 것입니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많고 많지만 이 일을 놓치고 나면 교회로서의 의미가 없습니다. 교회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반드시 또 하나의 전제 조건을 알아야 합니다. 증인은 성령만 받으면 가 되는 것인가 하는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증인은 그냥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철저한 훈련과 교육을 받은 사람이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엡 2:20을 보십시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사실, 전능하신 성령님이 모든 것을 한 방에 끝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혼자 하시지 않으시고 우리더러 교육과 훈련을 받아 가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가령, 선생이 제자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것은 시럼을 잘 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왜냐면 시험을 선생이 치지 않고 제자가 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선생이 대신 나가서 시험을 치면 더 좋은 성적을 올리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직접 땅 끝까지 가셔서 복음을 정하면 한 방에 끝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더러 증인 되라 마라 할 계기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방법을 택하지 않으시고 우리더러 하라 하신 것은 우리가 천국가야 하고 우리가 상급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받고 천국에 가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시험을 치실 필요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증인된 우리를 통해 불신자들을 구원하시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불신자들이 증인의 모습을 보고 회심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증인은 주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사람입니다(벧전 2:9-10). 증인은 증인으로서 부끄럼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증인은 성령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으로서 이제 사람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을 인식하고 살아야 합니다. 집안에 어른이 있으면 조심하듯이 성령님이 내 안에 거하시므로 우리는 매사 경건한 언행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불신자들이 우리의 거룩하고 경건한 것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좋아하고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이번 주에도 성령님의 충만한 역사와 도우심으로 거룩한 삶이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출처] 7주차. 성령이 오시다 (아리엘 개혁교회) |작성자 아리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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