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떠도는 방랑객들
최더함(아리엘개혁교회 담임목사)
한국사회는 이른바 인터넷공화국이다. 한국만큼 인터넷이 발달한 나라는 없다. 모든 길은 인터넷으로 통한다.인터넷은 정보의 바다이다. 한국인들은 이를 통해 수많은 정보들을 손쉽게 접할 수 있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인터넷은 상호간의 정보의 교류와 더불어 새로운 지식을 쌓는 좋은 수단이 된다. 나아가 개인적으로 좋은 취미를 누릴 수 있는 열린 문화의 공간으로 활용하기도 하고, 발달된 SNS 등을 이용해 자신의 의견을 마음껏 개진할 수 있는 소통의 장과 스트레스 해소의 장소로 사용하기도 한다. 이 정도면 한국인에게 있어서 인터넷은 일상생활과 밀접한 도구이자 벗으로 자리매김된 것이다. 특히 젊은 층일수록 인터넷은 자기 인생의 동반자 이상으로 역할과 기능을 한다. 또한 인터넷을 통해 자신이 흠모하거나 이상적인 모델로 삼은 인물을 멘토로 삼아 그를 추종하고 그의 많은 사상이나 가치관들을 모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좋은 의미에서 이러한 사례들은 한 개인의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고 비록 인터넷 상이지만 좋은 인간관계를 구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은 불행히도 우리가 누리는 것에 비해 너무나 많은 위험요소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는 정보화 사회의 특징이기도 하다. 정보화 사회는 많은 정보의 유출과 함께 매우 빠른 속도의 특성을 가진다. 그러나 빠른 속도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위험도를 가진다(High Speed, High Risk). 인터넷으로 인한 가장 위험한 요소는 올바른 정보 뿐 아니라 매우 나쁜 정보들도 함께 횡행한다는 것이다. 모든 정보들 중에서 필요하고 유익한 정보를 얻기가 매우 힘들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거나 꼼꼼히 따져보지 않고는 한 개인의 차원에서 정보의 선악을 가려내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다음으로 인네넷은 소통의 장으로 공헌을 하는 반면에 공공의 적을 낙인찍고 그 대상 인물을 악의적으로 매도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소위 ‘악플러’들에 의한 ‘인간 영혼 죽이기 게임’이 매일같이 발생하는 곳이 인테넷 세상이다. 나아가 이런 일을 자행하는 자들은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거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한다. 일종의 마녀사냥으로 얻는 쾌감이 더 앞서기 때문이다. 또 인터넷 문화로 인한 부정적인 측면은 오류의 정보들이 검증 없이 삽시간에 전파되어 수많은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잘못된 여론을 형성시킨다는 점이다. 이렇게 형성된 여론은 국가 정책결정에도 심대한 영향을 끼쳐 반정부운동으로 확대되거나 온갖 유언비어로 발전하여 국가사회를 마비시키는 엄청난 폭발력을 가지고 있다. 수많은 인터넷 활동가들이 밥 먹는 것마저 잊은 채 거짓된 정도들을 퍼 나르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인터넷은 기독교사회마저 변화시키고 있다. 많은 교회들이 인터넷 공간을 전도와 교회홍보의 장으로 활용한다.특히 전도에 있어서 인터넷은 21세기형 전략으로 등장하여 이제 길거리 전도나 직접 방문전도 등의 문화를 까마득한 옛날 일로 밀쳐내고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인터넷을 통해 자신이 좋아하는 목회자의 설교나 신학적인 탐구활동에 가담하고 있다. 기독교 전체의 입장에서 이런 문화는 복음전도의 폭발이라 할 수 있다. 가만히 앉아서 복음을 마음껏 전할 수 있는 인터넷 세상은 복음의 친구요 하나님나라의 건설에 가장 기능 좋은 기술이 된다. 필요할 경우 홈페이지, 카페, 블로그 등을 이용해 인터넷 상에서 활약하는 교회의 수와 그 면모들을 조사해 볼 가치가 충분히 있을 것이다.
인터넷 문화의 발달과 함께 한국의 젊은이들 사이에 인터넷을 통해 교회를 검색하고 교회를 탐방하는 사례가 빈번해 지고 있다. 특히 고무적인 현상은 미국과 더불어 한국에서도 칼빈주의와 개혁교회를 찾는 젊은이들이 부쩍 증가추세에 있다는 소식이다. 여기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본다. 번잡하고 세속적인 문화가 발달할수록 영혼의 갈증은 더해지는 법이다. 이 갈증을 해소하는 길은 오직 성경 안에만 존재한다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과연 누가 성경대로 바로 말하고 바로 해석하고 바르게 가르치는가 하는 것이다. 젊은 그리스도인들은 인터넷 공간을 통해 이미 판단을 내린 것이다. 오직 개혁주의만이 바른 신학과 신앙을 말한다고 확신을 가진 것이다. 나아가 그들은 인터넷을 통해 여러 개혁주의 선생들을 만나고 그들의 신학적 의견이나 사상과 학문들을 섭렵하고 있다. 신학적 지식의 상승은 그들의 발걸음들을 개혁교회로 향하도록 만드는 동인이 된다. 현재 줄잡아 이런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약 1백만 명에 달한다는 소식이다. 실로 엄청난 숫자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이런 젊은이들의 형태를 통해 매우 우려스러운 현상들을 목격하게 된다. 한 마디로 이들 대개가 ‘인터넷 방랑객들’이라는 것이다. 이들의 대다수는 아직 자신이 뼈를 묻을 교회를 확정하지 못한 부류이다. 이들은 지금도 거의 2~3개월을 주기로 교회를 옮겨 다니며 자신의 입맛에 맞는 교회를 찾으러 다니고 있는 실정이다. 심한 경우 7~8명씩 떼를 지어 다니며 교회를 탐방하듯이 순회하고 이 교회와 저 교회를 떠돌고 있는 중이다. 대형교회의 경우엔 또 다른 입장이겠지만 이들이 스쳐 지나간 개척교회는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기 일쑤다. 떠나간 사람은 자신이 떠난 자리가 얼마나 공허함을 주는지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남은 사람들은 큰 상처를 받게 된다. 결코 이런 일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들이 아니다. 아리엘개혁교회를 비롯한 여러 개혁교회들은 이런 사례들로 인해 이미 많은 상처를 받은 기억들을 가지고 있다.
대체적으로 방랑객들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그들은 개혁주의 신학에 대해 무지하거나 매우 파편적인 지식에 함몰되어 있다는 것이다. 개혁주의는 그런 조각난 몇 개의 지식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님을 그들은 간과하고 있는 듯하다. 둘째, 그들 대부분이 매우 비판적이라는 것이다. 비평과 비판 혹은 비난이 구별되지 않고 마구 혼재한다. 확실한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은 비판 혹은 비난은 남을 정죄하는 일로 매우 경계해야 할 일임은 성숙한 성도의 수준에서 판단하기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미숙하기에 함부로 말하고 판단하는 결과를 낳는 것이다. 셋째, 그들은 신자로서의 기본적인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십일조의 경우, 인터넷 상에서 제기된 몇몇 선생들의 주장으로부터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만을 획득하고 그것을 기초로 십일조가 신자의 의무사항이 아니라며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 십일조를 헌금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십일조가 안식일을 비롯한 십계명처럼 명백하고 확고한 기독교의 규례이자 전통으로 더 이상 신약에서 재확인하고 강조할 필요가 없었다는 점을 보지 못한다. 이것을 우리는 지식과 정보의 이기주의라고 부른다.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얻고 싶은 것만 얻고자 하는 신 이기주의적 신앙형태가 건전한 기독교문화를 좀 먹고 있음을 그들은 깨닫지 못한다. 넷째, 그들은 거의 ‘봉사하지 못하는 봉사’라는 것이다. 선교를 꿈꾸는 어떤 자매의 경우, 그녀는 단 한 번도 교회를 위해 봉사의 손을 드린 적이 없다. 모두가 교회를 위한 봉사의 손과 발을 부지런히 움직일 때 그 자매는 오직 자리에 앉아 자신의 일에만 신경을 쓸 뿐이었다. 그 자매는 개인적으로 밥하고 반찬을 만들고 국을 끓이고 설거지 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짐을 나르고 주일학생들을 돌보고 다른 성도의 일을 돕는 일에 관심이 없다. 그러면서 그 자매는 늘 자신을 선교의 현장으로 보내 달라고 기도한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도 봉사하지 못한 그 자매가 교회 밖에서 어떤 봉사를 할지 매우 궁금하다. 하나님은 자신의 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짐을 대신 질 수 있는 당신의 일꾼에게 하나님나라의 사역을 맡기신다. 끝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과 생활의 절대적 지침으로 ‘오직 성경’을 말하지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 중의 하나가 진리의 절대화를 부정하는 것인데 은연중에 많은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현상에 물든 것 같이 보인다. 심지어 어느 전직 대통령을 존경하다는 명목으로 추도식에 찾아가서 그의 명복을 빌고 있는 젊은이가 있다. 시민사회단체의 활동에 동참하고 종북파들과 같이 미군철수를 외치고 북한 인권에는 눈을 감은 채 오직 국내의 인권유린에는 피를 토한다. 온갖 자유와 혜택을 누리고 살면서 아직도 민주화운동대열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각종 사회적 반대운동과 파업 등을 지지하고 있다. 그들에게 과연 그러한 행동들이 성경적이냐 하고 반문하는 것은 우이독경(牛耳讀經)에 불과하다. 성경이 그들의 생각과 가치관을 결정하는 절대적 기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의 가르침보다 그들은 자신의 주장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그들은 정부정책에 반대하는 일이 매우 지성적이고 진보적인 일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들은 정부를 옹호하고 편을 들기라도 하는 것을 보면 바로 자신의 반대편으로 인식하고 공격한다. 외눈박이도 이런 외눈박이들이 없다.
메뚜기 떼들이 들판을 쓸고 지나간 자리를 상상해 보라. 작금의 젊은 방랑객들로 인해 그나마 숨 쉬기도 힘든 개척교회들이 더 많은 아픔을 겪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을 꾸짖기 이전에 먼저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는 그들을 꾸짖을 자격이나 있는 것인가? 이참에 개혁주의 신학을 주창하고 그것을 가르치며 그것을 토대로 목회하는 이 땅의 모든 개혁파의 지도자들에게 고한다. 이 모든 현상들이 우리 책임이라는 것을 통감해야 한다고 말하고자 한다. 반면에 인터넷 상에서 무분별한 개인적인 주장과 비 개혁주의 신학을 논하는 유사 개혁주의자들은 회개해야 한다. 이제라도 정통 역사적 개혁주의 신학의 노선에서 벗어난 독단적이고 아집적인 자기주장을 접고 건전한 공교회의 객관주의 신학의 세계로 들어와 모든 문제를 함께 논하고 공론의 장을 이끌어 가야 한다. 그리하여 새롭게 형성된 건전한 개혁주의와 개혁교회에 대한 젊은이들의 열망에 부응하며 아울러 이 소중한 재원들을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잘 양육해야 하는 책임의식을 공유하여 위대한 개혁신학의 깃발을 이 땅에 함께 세우기를 소망한다. 아멘.
[출처] 교회를 떠도는 방랑객들--최더함목사 (한마음개혁교회) |작성자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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