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주차.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본문: 행 3;11-26
1. 기적과 설교
성경에는 기적이 발생했을 때 매우 독특한 일정한 패턴이 있습니다. 즉 어떤 초월적인 기적이 발생했을 때 그것으로만 끝나지 않고 그 다음에 반드시 기적을 재해석하고 설명하는 설교나 하나님의 말씀이 부연된다는 것입니다. 일례로 오순절 성령강림이라는 기적이 일어난 후에 베드로의 설교가 있고 오늘도 앉은뱅이의 치유 뒤에 베드로의 두 번째 설교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는 여기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4복음서에도 같은 패턴이 존재합니다. 기적이 일어난 뒤에 예수님의 가르침이 뒤에 따라 나옵니다. 이것은 성경은 기적을 기적으로, 초월을 초월로 그냥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뜻하는바 의미가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초월적인 사건은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타종교나 샤머니즘에도 초월적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들이 접신을 하고 작두를 타고 줄을 타고 하는 등 보통 사람이 보기에 신기한 일들을 행합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가지는 초월적인 사건과 일반적인 사건에는 초월이라는 형태는 같지만 차이가 있습니다. 초월이라 해서 그 안에 다 생명이 있고 진리가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가끔 이상한데 가서 성경이 가르치는 원리와는 전혀 다른 현상을 배우고 온 사람들이 교회에서 이 사람한테 애기하고 저 사람한테 막 얘기하고 은혜 받았다며 전도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개 그 사람들은 그것을 사실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자신의 눈으로 목격한 일이므로 확신합니다. 목사님이 불러놓고 이런 일이 있을 때엔 거기 가도 되는지 먼저 교역자와 상의하셔야 하고 또 가셔서 성경적으로 좀 이상하고 우리 교회의 가르침과 다르다 싶으면 돌아오셔서 그걸 전도하거나 나중에 같이 가보자 하거나 하시면 안 된다고 점잖게 권해드렸음에도 ‘제 눈으로 똑똑이 본 것입니다’하며 뜻을 굽히지 않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실이라고 다 진리가 아닙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무당들도 작두를 타고 고명한 스님도 예언을 하고 신비한 명상가들도 신비한 무엇을 보고 듣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실이라 해도 그 모든 것이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는 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특별히 세계의 많은 인종 가운데 유별나게 감성적인 민족입니다. 어떤 진리에 근거한 신앙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직접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한 주관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각자가 자신이 체험한 신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세계 이단의 80%가 한국의 계룡산과 지리산과 용문산 등에 밀집해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옵니다. 한 번 분위기에 휩쓸리면 모든 국민이 한쪽 방향으로 기울어집니다. 유행을 잘 타기로 유명합니다. 2002년 월드컵 때 모든 국민이 붉은 악마가 되었는데 세계인들이 놀랄 정도였습니다. 너도나도 붉은 옷을 입고 거리에서 가게에서 직장에서 심지어 집에서도 그 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외국인들은 왜 이름을 ‘붉은 악마’라고 섬뜩한 느낌이 드는 이름을 지었는지 궁금해 합니다. 대개 한국인들은 감성적이고 기분파들이 많아서 뜻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골치 아프다며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 이상한 버릇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번 방향이 결정되면 모두가한 곳을 바라보고 뛰어 가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이런 열정을 가진 민족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LA의 자바시장이라는 재래시장은 전 세계 사람들이 와서 장사를 하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이곳의 실질적인 패권을 쥐고 있는 사람들은 스페인과 멕시코 사람들입니다. 굉장히 열정적인 민족들이죠. 그런데 이 두 민족이 딱 한 군데를 쳐다보는 곳이 있는데 바로 한국인들이 장사하는 곳이랍니다. 그들마저 한국인들의 장사하는 모습을 보면 두 손 두 발 다 들고 입을 딱 벌린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한국인들은 장사를 해도 신바람을 내며 하는 겁니다. 누구도 못 말리는 이 한국인들의 기질로 인해 각양각색의 종교들이 판을 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신앙은 객관성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기적이 있으면 반드시 기적의 의미를 되새기는 일을 합니다. 예수님도 그리했습니다. 오늘도 기적 다음에 베드로가 설교를 합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기독교의 기적은 늘 하나님의 말씀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 없는 기은 없습니다. 모든 성령의 조명은 말씀과 함께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이상한 곳에 가서 이상한 것을 보고 듣고 하는 것이 왜 이상한 일인지 알아야 합니다. 근자에 병 고치는 사역을 한답시고 많은 사람들을 모아 놓고 이상한 짓을 하는 사이비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곳엔 하나님의 말씀을 사칭하는 일은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역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기적과 다른 기적이 다른 이유입니다.
2. 본문해설
1) 먼저 11절에 보니 병을 고침 받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듭니다. 아마 감사의 인사를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듭니다. 어디냐 하면 예수님이 설교를 하시던 바로 솔로몬 행각이라는 곳입니다. 얼마 전만 해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그 베드로가 이제 설교자가 되어서 예수님이 설교하시던 그 장소에 서서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과연 베드로가 이런 일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지금 베드로는 성령으로 충만해 있는 상태입니다.
2) 12절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소리칩니다. 함께 읽습니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 베드로는 지금 설교의 본질을 밝히고 있습니다. 설교자의 본분은 시종일관 청중들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강단은 자기 자랑을 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어떤 사건을 소개하고 뉴스 시사 이런 거 해석해서 평가하고 정치적인 발언 등을 하는 곳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만 말해야 하고 오직 성경만 이야기해야 하고 예수만 보이게 해야 합니다. 청중들로 하여금 오직 예수님만 영광을 받는 일로 채워져야 합니다. 자신의 말재간이나 언변이나 어떤 학식을 자랑하는 자리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강해해야 합니다. 지금 베드로는 자신들이 마치 기적을 일으킨 주인공인양 자신들을 주목하는 군중을 향해 손사래를 치며 ‘우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지나치게 단장을 하거나 화려한 옷으로 치장하는 일도 삼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얼굴이 잘 생긴 미남은 오히려 설교자로서 자격이 안 된다고 말합니다. 만약 배우 장동건이 이 앞에 있다고 생각해 보면 사람들은 예수님은 보지 못하고 장동건만 바라볼 것입니다.
3) 베드로는 자신은 숨기고 예수님을 앞에 내세웁니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13절에서 예수님을 높이는 일은 하나님도 하신 일이라는 것을 여기서 사례를 들어 설명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여길 보면 일단 세 인물이 등장합니다.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 이 세 인물은 이스라엘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사적 위인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누구를 영화롭게 하셨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라고 증언합니다. 지금 베드로는 이스라엘이 자랑스러워하는 세 인물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 앞세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예수님이 이 기적의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어느새 설교의 핵심요소인 역사성까지 거론을 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역사의식을 가진다는 것은 시대를 분별하고 산다는 것과 같은 뜻이 됩니다. 한 사람의 성도가 기독교의 역사성을 무시한 채 그저 예수만 믿으면 된다고 말한다면 그는 매우 어린 신앙인일 것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이 믿음이 과연 우리 선조들에게는 어떻게 나타났으며,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 믿음의 선진들은 어떤 삶을 살았으며 어떤 역사적인 길을 걸어왔는가를 알아야 나의 신앙의 본질과 상태가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신앙의 역사성이 라고 부릅니다.
4) 그런데 이 예수를 유대인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14-15절을 보니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이 말씀을 들으면 굉장히 뼈아픈 소리입니다. 보십시오. 정리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귀하게 여기고 존경해 마지않던 세 사람보다 더 거룩하고 의로운 자이자, 생명의 주이신 예수님을 유대인들이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예수님을 살인자와 맞바꾼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아, 14-15절의 말씀은 유대인들에게 두고두고 한이 되고 지워버리고 싶은 역사적 사건에 관한 기억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 부분을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잘못 이야기하면 거센 저항에 부딪칠 이야기임에도 베드로는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유대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밝힙니다. 이런 일은 사람들에게는 매우 인기가 없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결코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해야 할 말을 빠트려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설교가 횡행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우리 개혁교회 성도 여러분은 자신에게 벼 아픈 설교가 들릴지라도 겸허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시고 회개하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할 것입니다. 당장은 기분 나쁠지 모르지만 나중에 지나고 보면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일입니다.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쓴 법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교육 철학이자 방식입니다.
5) 그런데 15절 끝 부분에서 베드로는 유대인들이 처참하게 죽였던 그 예수가 다시 살아나셨다고 선언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와 사도들이 바로 이 부활의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백주대낮에 백성들 앞에서, 공공연하게 이 믿기지 않을 사실을 당당하게 밝히고 증언하는 베드로입니다. 이 선언은 공식적으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지금 이 순간, 아무도 이 선언이 가지고 올 파장을 예상하는 이는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유대 사회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라는 믿음의 위대한 선조의 영예를 뛰어넘는 이가 나타났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님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6) 그렇다면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어떻게 해서 불치병자를 났게 하였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됩니다. 분명히 앉은뱅이는 예수님이 고치신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고친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자기 때문이 아니라 앉은뱅이가 무엇 때문에 나았는지에 대해 설명합니다. 바로 16절입니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난 것입니다. 앉은뱅이는 베드로가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 그 믿음대로 치유를 받은 것입니다. ‘일어나 걸어라’, 이 선언과 동시에 일어나 뛰기도 하고 걷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성전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회복하고 낫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죽은 영혼들, 비틀어진 세상, 병들고 상처 입은 마음들, 오염되고 병든 땅과 기업들을 새롭게 하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7) 그렇다면 어째서 유대인들은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몰라보고 아무 죄도 없는 주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했는가? 메시야를 못 박은 일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바로 알지 못하여 저지른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실수였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유대인들이 알지 못하여 저지른(17절) 십자가 사건은 이미 예정된 일의 성취라고 밝힙니다(18절). 그러나 그것은 15절 끝에 있는 예수님의 부활을 위한 하나님의 예정된 일이었습니다. 이미 메시야의 도래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은 구약의 선지자들에 의해 예고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사례들을 22-25절까지 설명합니다. 모세 이후부터 사무엘 때의 모든 선지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가리켜 말씀했다고 설명합니다.
8) 그러나 불행히도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계획하신 바를 이루는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메시야를 못 박은 유대인들이 구원 받을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믿고 영접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하면 모든 죄인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면 새롭게 되는 날을 맞이할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이것이 19절에 있는 회복의 약속입니다. 이 회복은 21절에서 ‘만유의 회복’으로 이어집니다. 즉, 창조 때부터 하나님이 온전한 모습으로 지었던 그 질서, 그 힘과 기운, 아름답고 조화로운 상태로 회복시킨다는 것입니다. 이 회복의 모습을 이사야 선지자가 잘 그리고 있습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젓 뗀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하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11:6-9) - - 이사야가 무엇을 예언했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궁극적으로 회복될 모습을 이렇게 그림처럼 묘사한 것입니다. 이 회복의 날이 이르면 어떤 고통도 없는, 완전한 날들이 도래할 것입니다. 우리는 도저히 이 놀라운 일들을 상상하지 못합니다. 과연 어떤 일들이 천국에서 벌어지는 것일까요? 분명한 것은 지금 우리가 누리고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삶과는 비교도 안 될 영화로운 사람이 보장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3. 결론
오늘 베드로는 유대인들이 아무 것도 모르고 거리낌 없이 죽였던 그 나사렛 예수가 다름 아닌 구약의 수많은 선지자들이 예고한 바로 그 주인공이며, 그가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사망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생명의 주이시며, 이 생명의 주를 믿음으로 앉은뱅이 같은 불치병도 낫게 되며, 이런 불치병을 낫게 하시는 이유는 바로 주님 안에서 만유를 회복시키시려는 하나님의 작정하심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회복된 세계는 영원무궁하고 완전하며 가장 평화로운 세계임을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통해서 부분적으로 지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영원히 살아야 할 영원한 세계에 대한 매우 작은 지식과 정보일 뿐입니다. 한계를 가진 인간의 머리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상할 수 없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이 회복시키고자하는 세계가 지금의 세상과는 비교도 안 되는 영원 천국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합니다. 몰론 이는 돌이키면 은혜를 주겠다고 하는 조건적인 약속은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궁극적인 승리를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을 통해서 확증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회개하고 돌이키라는 것은 우리보고 남은 생애를 결단하고 돌이키라는 말입니다. 이 일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물론 포도원 품군의 비유에 나타난 것처럼 아침에 온 일군이나 저녁 해질 무렵에 온 일꾼 모두 구원을 받는 데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침 일직부터 포도원에 와서 일을 한 일군을 그냥 홀대하시지는 않을 분이십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돌아오라, 돌아오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왜 지금 당장 돌아오라고 하십니까? 오늘의 마지막 말씀인 26절을 살펴봅니다.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 다시 말해, 지금이라도 돌아오면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우리는 다음 세 가지의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첫째, 모든 설교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대언자일뿐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만유를 회복시키기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원래 창조하셨던 그 모습과 상태로 회복하는 일에 힘서야 합니다. 이것은 교리적으로 성화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역이지만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반응입니다. 우리는 성화사역하시는 하나님께 협력해야 합니다.
셋째, 지금이라도 남은 생애를 주님과 함께 하겠다고 결심하고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합니다. 불신자들은 늘 ‘조금만 더 있다가 가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다 결국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오라고 할 때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은 비록 오래 참으시며 당신을 기다리시지만 당신이 늦는다면 그만큼 하나님을 슬프게 만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보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큰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아멘.
[출처] 14주차.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아리엘 개혁교회) |작성자 아리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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