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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주차. 왜 핍박입니까?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4. 5. 15.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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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주차. 왜 핍박입니까?

본문: 4:1-4

 

 

1. 기적과 그 뒤

 

지금까지 진행된 사도행전의 이야기를 일단 정리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지내시다가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하늘에서 오셨으니 다시 하늘로 돌아가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늘에서 왔으니 하늘로 갈 것입니다. 주님은 올라가시기 전에 내가다시 오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이에 제자들이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며 주님의 약속을 기다립니다. 드디어 오순절 날에 주님은 성령으로 다시 오셨습니다. 이제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이른바 성령의시대요 교회의 시대요 복음의 시대가 개막된 것입니다. 이에 베드로와 요한을 비롯한 사도들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 복음을 전합니다. 복음을 듣고 하루에 삼천 명이나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여기에 베드로와 요한에 의해 앉은뱅이가 치유를 받는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그것은 기적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놀라워하자 베드로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 일은 우리가 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한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오늘 등장하는 예루살렘의 기득권자들인 대제사장과 사두개파를 비롯한 산헤드린공회원들입니다. 오늘은 바로 이들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2. 영광과 고난의 순환: 체포와 구금

 

 

앉은뱅이의 기적을 선보인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한 복판에서 체포되고 구금됩니다. 우리가 성경의 역사와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믿음의 조상들의 삶을 볼 때마다 공통적으로 발견하는 것은 하나의 패턴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영광과 고난의 순환이라고 명명해 봅니다. 영광이 있으면 고난이 잇고 고난이 끝나면 영광이 찾아듭니다. 비슷한 뜻으로 중국 고사에 塞翁之馬라는 말이 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이는 성경적인 의미와는 다릅니다. 새옹지마는 인생의 무상함을 말하고 싶어 하지만 성경은 결코 인생무상을 말하지 않습니다. 인생은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을 근거로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다는 것을 증언합니다. 모든 인생의 목적이 한 마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광을 받는 것도, 핍박을 받아 고난가운데 처해지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논리와 관점과는 판이하게 다른 인생의 법칙인 것입니다. 특히 이 법칙은 인간의 입장에서는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구약의 엘리야를 보십시오. 아합 왕이 통치하던 때, 이스라엘에 3년 반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마치 요셉 시절에 애굽 땅에 7년 기근이 들었던 시절을 연상케 하는 어려운 때를 만나 온 백성이 고통으로 울부짖었습니다. 그때 엘리야라는 걸출한 하나님의 사람이 나타나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서 비가 내렸고, 이를 시기 질투한 850명의 우상숭배자들을 갈멜산에서 만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찌릅니다. 완전한 엘리야의 승리였습니다. 사람들은 무시무시한 능력을 가진 엘리야를 감히 쳐다보지도 못합니다. 모든 권력은 백성들에게 나온다면 당연히 그 다음의 장면은 엘리야가 실질적인 권력을 손에 쥐고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어떤 역사적인 사실을 알려 주고 있습니까? 승리의 주역이었던 엘리야에게 찾아 온 것은 이세벨 왕비의 체포령을 피해 달아나는 도망자 신세였습니다. 엘리야는 광야 깊숙한 곳에까지 숨어 들어가 까마귀가 날라주는 음식을 먹으며 숨어 사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졸지에 이런 졸지가 어디 있습니까? 어느 날 로뎀나무 그늘 밑에 앉은 엘리야가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나이다”(왕상19:4) 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도라기보다는 신세한탄을 하면서 하나님에게 불평을 늘어놓았다고 해야 정확한 해석입니다. 어찌 아니 그러겠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충성을 다했는데 고작 주신 선물이 고난의 연속이라는 말입니까? 이것은 세상의 법칙이 아닙니다. 세상은 준 만큼 받아야 하고 일한만큼 받아야 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 모든 판단이 하나님의 주권에 달렸습니다.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요 가져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베드로와 요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앞부분에서 우리는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성령충만함으로 설교를 하던 베드로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어지더니 베드로와 요한의 신세가 핍박받는 모습으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을 것입니다. 조금 전만 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관원들에 의해 체포되고 있는 광경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이런 일이 지금 나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정당하게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왜 고난이 닥치는가 하고 혼란스러워 합니다. 왜 최선을 다해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애매한 고난이 닥치고 이해하지 못할 어려운 일들이 생기는지,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기쁨이 아니라 슬픔이 되는지, 가도 가도 고난의 끝이 보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 합니다. 이것이 우리 서도들이 가끔씩 맞닥뜨릴 대마다 느길 수밖에 없는 혼란의 주제들입니다. 이럴 때 많은 성도들이 내가 예수 믿고 교회를 다니는 보람이 무엇인가? 예수 잘 믿으면 내가 얻는 유익이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방식으로 지금까지 세상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늘 그런 관점으로 하나님의 밀을 판단하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세상은 동일보상의 법칙‘(give & take)대로 움직이는 곳입니다. 내가 준 것만큼 받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랑도 이와 같습니다. 사랑을 끝내는 사람들이 주로 하는 말이 무엇인가 하면 내가 너에게 해 준 게 얼만데 나를 배신하냐?“고 불평함으로서 사랑이 식어지고 끝장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너에게 준만큼 돌려받아야 된다는 동일 동가 보상법칙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은 순종의 대가로 진리를 붙잡은 대가로 이 땅위의 것으로 우리를 대접하고 보상해 준다는 약속은 없습니다. 한 번도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충성하면, 이 땅세서 보란 듯이 우리를 대접하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물론, 간혹 성도들의 견고함을 위해, 불신자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이끌기 위해 이 땅의 복을 주시고 보상해 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수단과 방법은 될지언정 결코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약속한 목적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잘 믿으면 병이 낫고 부자가 되고 축복을 받는 다는 것은 하나의 가정이지 결코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사도들을 보십시오.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에게 찾아온 것은 축복이 아니라 체포와 구금입니다. 이것은 차원이 다른 하나님나라의 일이기에 더욱 우리를 조심스럽게 만듭니다.

 

 

3. 누가 체포합니까?(1)

 

 

여기서 사도들을 체포한 자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바로 성전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입니다.

 

 

1) 성전을 맡은 자

- 이들은 제사장들(heleis)을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랍비 문학에서 우두머리로 언급된 관리들입니다. 주로 대제사장 가문에 속한 사람으로서 성전에서 최고 제사장(the high prist) 다음 서열입니다. 이 사람이 통솔하는 성전지기들은 레위 족속 가운데서 선발한 요원들로서 역대상 9:22에 보면 이들을 두고 택함을 입어 문지기(쇼페르) 된 자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비록 문지기이지만 하나님이 구별하여 쓰시는 사람들로서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시편84:10에 보면 악인의 장막에 거하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한편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던 보초들이 이들입니다(27:65). 그러나 이들은 대제사장의 사설 군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성전을 소란스럽게 하거나 유대교에 위협이 되는 인물이라면 대제사장의 명령에 따라 체포하는 것입니다.

- 참고로 구약시대에 성전을 지키는 자들의 수는 시대마다 달랐습니다. 다윗시대에는 93명이었고(대상26:2), 포로귀환 이후에는 212(대상9:22), 스룹바벨 성전시대에는 139(2:42), 172(11:19)이었습니다. 특히 다윗 시대에는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을 24반열로 조직하여 제사장, 성가대, 레위인으로 구분했습니다.(대상23:26:32)

 

 

2) 사두개인

- 다음으로 사두개인들입니다. ‘사두개라는 이름의 어원에 대해 논란이 있지만 가장 많이 알려진 바로는 대제사장 사독 가문에 속한 후예들이라고 하는데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양대 세력이 있었는데 하나는 바리새파이고 하나는 사두개파입니다. 바리새파는 주로 재산이 많은 중산층 이상의 기득권층이면서 매우 보수적인 반면에 사두개인들은 제사장 가문을 포함한 매우 현실주의자들입니다. 이들은 가능한 한 영토의 유지와 민족의 안녕을 명분으로 점령국인 로마와 결탁하여 잘 지내기를 바라는 부류들입니다.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우지만 실은 자신들이 세력유지와 기득권보호라는 속셈이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이스라엘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공회의 주도권을 잡고서 어떤 종교적인 운동이나 민족운동이거나 간에 로마의 의혹을 사고 보복을 초래할만한 소지가 있는 운동은 모두 배격하였습니다. 신학적으로 이들은 육체의 부활 등과 같은 혁신적인 내용을 부정하고 선지서나 성문서들에 비해 모세오경을 더 우월한 최고의 성경으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들과 논쟁을 벌일 때(22;23, 12;18, 20:27) 부활의 확실한 근거가 나타나 있는 선지서(26:19, 37:1)나 성문서(12:2)을 근거로 삼지 않고 사두개인들이 선호하는 출3:6을 근거로 부활의 도리를 설명했던 것입니다.

- 한 마디로 이들은 권력의 달콤한 맛에 길들여진 사람들입니다. 권력과 함께 이들의 손에는 막강한 재력이 함께 쥐어져 있었습니다. 돈과 권력이 있으니 무엇이 아쉬웠겠습니까? 이런 부류들을 보면 마치 일제 때 친일파들을 연상케 합니다. 역사적으로 이런 현실안주의자들이 항상 사회를 부패시키는 주범이었습니다. 물이 고이면 썩듯이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기존의 불변하는 가치와 질서를 지키되 새로운 시대적 상황과 문물의 도래에 발맞추어 개혁하는 일이 늘 병존해야 건강한 사회를 유지 발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이 바로 이 개혁의 요구를 묵살한 결과 그들은 종교개혁이라는 하나님의 철퇴를 맞은 것입니다.

 

 

4. 무엇 때문에 체포하였습니까?(2)

 

 

1) 나비효과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이들 기득권 세력의 신경을 건드리는 일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만 죽이면 모든 것이 끝날 줄 알았는데 예수가 다시 부활했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온 도시가 술렁대는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미풍에 그칠 줄 알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나비효과처럼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득권을 지키려는 세력들이 가만히 앉아 보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를 방치하다간 자신들의 자리 뿐 아니라 엄청난 손실을 오래하게 될 것이 뻔해 보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계속해서 자기들에게 기대고 살아야 돈도 생기는데 관심이 다른 곳으로 가면 현실적으로 많은 손해를 볼 것이 뻔한 것입니다. 그래서 손을 봐 줘야 된다는 위기의식이 발동했습니다.

 

 

2) 체포의 명분

 

 

그러던 차에 기회가 왔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라는 사도들이 성전 한 복판에서 40년 동안 앉은뱅이를 일으킨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관리들을 시켜 두 사도를 현장에서 체포한 것입니다. 명분이 무엇이냐 하면 2절에 있습니다.

 

 

첫째, 가르치는 일입니다. 백성에게 종교와 신앙을 가르치는 것은 이들의 몫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성전에 와서 새로운 도를 가르치니 이들이 용납할 일이 아닙니다.

둘째, 예수의 이름으로 행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과연 이들이 누구의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말씀을 전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유대교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절대적입니다. 그 어떤 다른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킨다면 이단입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의지하여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눈에 사도들은 명백한 이단입니다. 율법 상으로는 돌로 쳐 죽일 대상입니다.

셋째, 부활의 도를 전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사두개인들이 도저히 수용하지 못할 부활의 도를 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부활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됩니다. 그렇다면 성부 하나님 야훼 유일사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의 신앙이 통째로 무너지는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일입니다.

 

 

3) 진짜 이유: 경제적 손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기득권의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어떤 일에 대해 그 일이 옳은지 그른 것인지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이들이 염려하는 것은 이런 별종들로 인해 자신들이 어떤 손해를 보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사도들을 체포한 이유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5:1-20에 보니 거라사 지방에 한 미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밤낮으로 무덤 사이에서, 산이나 들에서 소리 지르고 돌로 자기 몸을 헤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사람에게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하니, ‘군대라고 답합니다. “그에게서 나와라하니 그 사람 안에 있던 귀신들이 돼지 떼로 들어가서 돼지들이 바다로 달려들더니 몰사하고 맙니다. 그랬더니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께 어떻게 했습니까? ‘오 주님 감사합니다.’ 그랬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더러 마을에서 떠나기를 간구했습니다(17). 그들의 관심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과 가르침보다 자신들이 입은 경제적 손실로 인해 마음이 상한 것입니다.

 

 

이런 부류들이 오늘날에는 사라졌습니까?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도 신자들 가운데서 자신의 경제적 손실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습니다. 가령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이상한 풍조가 하나 있는데 바로 십일조의 문제입니다. 그들은 헌금에 관한 다른 주장을 하는 몇몇 사람들의 의견들이 자신의 입맛에 맞아 떨어져서 마치 십일조 헌금이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사항인 양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항상 강조하듯이 여러분이 어떤 선택을 할 때에 성경전제주의를 잊지 말아야 함을 누누이 말씀 드렸습니다. 자유라는 개념이 성경적인 개념과 세상적인 개념이 다릅니다. 십일조의 경우, 하나님의 명령을 전제로 한 자유를 말합니다. 하나님께 순종을 전제로 한 상태에서 기쁘고 자발적인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십일조의 원리입니다. 이것은 내 마음대로 내도 된다는 것과 차원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정작 중요한 본질은 돈을 내기가 아깝다는 것입니다. 경제적 손실이 두렵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신앙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십일조를 자발적으로 드리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순종하지 못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진리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과 자신의 무사안녕과 기복을 위해 다니는 종교생활을 구별해야 합니다. 신앙인과 종교인은 다릅니다. 신앙인은 진리를 가진 사람을 말함이고 종교인은 진리보다 자신의 유익함을 위해 자기가 보기에 경건해 보이는 종교시설을 찾아 다니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헌금생활을 기쁘게 하지만 종교인은 헌금액수를 가지고 늘 돈을 만지작거리는 사람입니다. 이 분명한 차이 앞에서 과연 나는 어떤 쪽인가를 생각하며 무섭고 두려운 마음과 경건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진리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하나님께 언제나 무릎을 꿇습니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복종한다는 것이고 무엇이든 내 마음대로 하지 않고 내 생각대로, 내 판단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명령대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의 원칙대로 살겠다고 선언한 사람입니다. 이에 반해 언제나 자유주의자들은 인간의 가치판단을 중시합니다. 그러나 진짜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절대적 전제주의를 가지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5. 체포와 구금의 결과(3-4)

 

 

먼저 체포된 시간을 알아봅니다. 3절에 보니 날이 저문 시각이었습니다. 유대사회에서 날이 저물었다는 것은 하루가 다 지났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괜히 체포된 시간을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언제 성전에 올라갔느냐 하면 31절에 제 9시 즉, 우리 시간으로 오후 3시경 기도시간에 올라갔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계절상으로 예수님의 부활이 있었던 3-4월 경 이후였으므로 해질 무렵이면 거의 저녁 7시경이 될 것입니다. 적어도 3-4시간 동안 사도들이 성전에서 백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적도 일으키고 진리의 도를 가르쳤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 적어도 진리를 가르치고 배우기 위해 어떤 상황에도 불구하고 열심을 다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정말 놀라운 것은 사도들이 체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믿는 자가 5천 명이나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런 일이 가능한 일입니까? 이것은 성령의 특별한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한 인간의 생각을 바꾸게 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의 변화를 이끌어 내실 수 있습니다. 물론 수도를 하고 수련을 하고 학문을 많이 한 사람들 중에 간혹 심신을 닦아 훌륭한 인격으로 변화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현상에 불과합니다. 근본적인 인간의 변화가 아닙니다. 본질적인 변화만이 진정한 변화입니다. 인간은 성령에 의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자신 속에 있는 더러운 죄와 탐욕을 끊어내지 못합니다. 있음에도 없는 것처럼 꾸밀 뿐입니다. 평생을 도를 닦고 수련을 한 도인들이라 해도 거듭나는 것이 아닙니다. 기발한 화장술로 자신의 외양을 꾸미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철 스님의 유언을 통해서 이 사실을 더욱 명확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 대문에 하루에 5천 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까? 오늘 4절에 있는 것처럼 그들이 바로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사도들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회심의 역사가 일어나고 믿음의 세례가 주어진 것입니다. 보십시오. 성경은 분명히 증언합니다. 그 어떤 사람도 어떤 도구나 어떤 수단에 의해서도 믿음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오직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매일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을 매일 읽는다는 것은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이고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이 날로 새로워지고 자라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하나님은 매 주일 당신의 종들의 입술을 통해 여러분에게 설교하십니다. 설교를 통해 진리를 가르치고 설교를 통해 말씀의 의미를 깨닫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자신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대언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직 성경을 풀어 설명하고 증언하는 일이 설교입니다. 이런 설교를 통해 인간의 영혼의 변화가 일어나고 인격의 향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을 들었다면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려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가 신앙의 요체입니다. 이 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은 신앙인이 아니라 종교인이요 세속인입니다. 거듭났다는 것은 입에 말씀과 기도가 붙어 있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무엇으로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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