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주차. (사도행전강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본문) 행4:5-12
1. 역사 앞에 선 인간
성전에서 주님의 부활을 증언하던 두 사도가 성전 문지기들에 의해 체포되고 하룻밤을 성전 감옥에서 지낸 다음날 재판정에 서게 됩니다. 오늘은 이 재판 과정을 지켜봅니다. 이 재판 자리에는 그 당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모든 권력자들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6절에 보니 그 면면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이 말은 유대사회의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 공회가 급히 소집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죽이자고 누가 결의했습니까? 바로 이들입니다.
- 먼저 안나스는 주후 6년 로마 황제 구레뇨에 의해 대제사장에 임명되어 15년 로마 황제 발레리우스 그라티아에 의해 해임되었습니다. 그에겐 아들이 다섯이나 있었는데 이들이 모두 대제사장직에 오릅니다. 그래서 그는 공식적으로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눅 3:2, 요18:13-24에 보면 배후에서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하는 자였습니다.
- 그의 뒤를 잠시 이스마엘과 엘르아살과 시몬이 15년에서 18년까지 대제사장이 되지만 다시 안나스에 의해 가야바(오목하다. 비어 있다)가 36년까지 대제사장직에 있었습니다. 본명은 요셉이고 가야바는 별명입니다. 그는 안나스의 사위입니다. 아마 안나스의 아들들이 장성할 때까지 얼굴마담을 한 것 같습니다. 실제로 가야바의 뒤를 이어 안나스의 아들들이 대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그중 아나누스는 주후 62년 예수님의 형제인 야고보를 칼로 죽이도록 모의한 대제사장이었습니다.
- 다음의 요한과 알렉산더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 모두 안나스와 같은 집안으로 막강한 권력을 발휘하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에 기록된 이들의 이름들은 참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 후손들은 두고두고 오욕의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삶이 부끄럽지 않도록 살아야하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내 인생이 나의 문제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잘못 살면 내 후손들이 욕을 먹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과 모세를 대적하였다가 땅 밑으로 꺼져 버린 고라 일당의 후손들이 얼마나 많은 아픔을 겪고 살았습니까? 그 후손들의 아픔이 시편 41부터 약 8편에 걸쳐 소개되어 있습니다. 조상들의 악행으로 인해 고개를 들고 살 수 없었던 후손들의 아픈 역사가 고스란히 역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라 후손들은 철저히 회개를 하여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지만 그렇지 못하고 영영히 버림을 받은 사례들은 비일비재합니다. 예수를 십자가처형에 넘겼던 빌라도와 그 후손들은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반면에 친일파 이완용의 후손들은 부끄러움도 모른 채 자신들의 땅을 찾겠다고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가 국민들의 호된 반발에 부딪쳐 무산되었습니다. 참으로 후안무치한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은 역사를 알고 역사 앞에 겸허한 마음가짐과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2. 공회의 재판
아무튼 예수님을 죽였던 당사자들이 오늘은 그 제자들을 다시 죽이기 위해 재판을 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첫 질문이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7절입니다.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종교재판관들이자 최고의 권력자들이 두 사도를 세워 놓고 질문했던 두 가지는 첫째가 ‘무슨 권세’이고 둘째가 ‘누구의 이름’이냐 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이 질문의 속뜻은 ‘너희 배후가 누구냐, 누가 이런 일을 시켰느냐?’입니다. 그런데 권력자들은 언제나 질문을 빙빙 돌려 말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사도들에게 누명을 씌워 처단하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기 위해 가장 좋은 빌미가 무엇입니까? 율법 상 사형선고를 내리려면 살인죄나 간음죄 등 특수한 악행을 찔러야 합니다. 그러나 두 사도들은 그런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직 한 가지 두 사도를 죽일 수 있는 것은 이단으로 정죄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단이란 야훼 하나님 이름이 아닌 다른 신의 이름으로 행사하는 모든 것이 이단이 됩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거나 자기들에게 심각한 손해를 끼칠 소지가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단’항목을 걸어 잘랐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이름 이외 다른 이름으로 병자를 고치거나 기적을 나타내면 이단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 질문 자체는 두 사도들로 하여금 다른 이름을 말하도록 올무를 걸어놓고 덫을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너희 배후냐?’하고 질문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배후를 캐려면 잡아다가 족치면 될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두 사도는 몇 대 맞고 풀려날 것입니다. 그러나 이단으로 만들기 위해 모의하고 그물을 쳐 놓은 상태에서는 쉽게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질문 자체가 음모가 담겨 있지 않습니까? 이런 행위를 교활하다(sly, foxy=여우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교활한 속임수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때로 우리는 뱀처럼 지혜롭게 대처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잔꾀를 쓰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런 일을 당할 때엔 반드시 주님께 지혜를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지혜로 위기를 모면하도록 해야 합니다. 주님은 감당치 못할 시험을 주시지 않으시고 반드시 피할 길을 주시고 반드시 할 말을 생각나게 하시어 자신을 변호하도록 역사하십니다.
3. 베드로
여기서 저는 잠시 베드로를 바라봅니다. 지금 자신이 서 있는 가야바의 들은 베드로에게 벼를 쑤시는 아픔이 있는 장소입니다. 숯불이 피어오르던 그 새벽에 체포되어 지친 몸으로 성전 군사들에 의해 체포되어 온 자신의 주님이자 스승을 바라보며 ‘나는 모릅니다’를 외쳐야 했던 아픈 기억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입니다. 어린 여자 아이 앞에서 창피한 줄도 모르고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며 도망쳤던 자신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오늘은 바로 자신이 끌려와 스승처럼 심문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베드로는 그 때의 베드로가 아닙니다. 지금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8-10절입니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베드로는 그들의 숨은 의도를 모르고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앉은뱅이의 기적을 보였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분명 아닙니다. 지금의 베드로는 예전처럼 겁에 질려 모른다, 아니다 하는 그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의 베드로는 성령에 완전히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울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변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가 죽음을 불사하고 예수의 이름을 숨기지 않고 꺼내놓은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증언하는 예수님의 이름과 권력자들이 말하는 이름의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잠시 구약의 출애굽기로 돌아갑니다. 하나님께서 가시떨기 불꽃 가운데서 모세를 부릅니다. 그리고 애굽의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백성을 놓아 주라고 말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네’ 하고 냉큼 갔습니까? 아닙니다. 모세가 중요한 질문을 합니다. ‘사람들이 당신이 누구냐 하고 물으면 내가 뭐라고 대답해야 합니까?’하고 묻습니다. 다시 말해, ‘나이 40에 제가 유대인일줄 알고 애국심을 발휘하여 일 좀 하려고 할 때에는 저를 광야로 내좇으시더니 이제 나이가 80인데 이 늙은 나이에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그건 그렇다고 치고 사람들이 너를 보낸 사람이 누구냐 하고 묻는다면 내가 그들에게 뭐라고 말해야 합니까?’하는 속마음이 숨어 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매우 중요한 대답을 하십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 즉 여호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는 단순히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을 뜻하는 말입니다. 속성을 부르다보니 이름이 된 것입니다. ‘만나’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만나가 무슨 듯입니까? ‘저게 뭐냐?’입니다. 그게 이름이 되었습니다. 케빈 코스트너가 주연한 영화에 등장하는 인디언들의 이름이 재미있었잖아요. 하나 기억나는 것이 ‘주먹 쥐고 일어서’라는 추장 이름입니다. 그런데 이 이름은 원래 이름이 아니라 그 추장의 속성을 표현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이름이 뜻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인생에, 역사에 하나님이 ‘주재자’이시고 ‘주권자’이시고 ‘절대자’라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존재는 누구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이지만 오직 하나님만이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선언은 모든 것의 주관자가 바로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어찌됐든 모세가 바로에게 갔습니다. 모세는 시킨대로 말했습니다. 그러자 바로가 여호와의 이름을 듣자마자 놀라서 바로 무릎을 꿇으며 ‘내가 잘못했습니다’하고 용서를 구했습니까? 아닙니다. ‘여호와가 누군데?’ 그럽니다. 모세 입장에서는 환장할 일입니다. 그냥 여호와라고 말하면 다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왜 하나님이 모세에게 단지 이름 하나 손에 쥐어준 채 바로에게 보내었는지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이야기 한 것은 그것을 주술적 개념으로 부적을 들이대듯이 그렇게 이야기 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이상한 기적이나 일으키라고 이름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왜 모세를 여호와 이름 하나만 가지고 가도록 한 줄 아십니까? 그 이름이 나타내는 의미가 뭐냐 하는 것입니다. 바로에게 그것을 알려주라는 것입니다. 그 이름이 바로 세상의 처음과 끝의 계획을 모두 가지신 작정하시고 창조하시고 구속하시고 섭리하시는 유일하신 주님을 인간적인 언어로 나타내는 바로 그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이 이름에 모든 권세가 담겨 있습니다. 이 이름에 모든 계획이 다 들어 있습니다. 이 이름 하나면 모든 악한 궤계를 물리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이름을 선포하자 앉은뱅이가 그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이 예수는 어느 날 섬광처럼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 예언되었던 그 메시야입니다. 이 분이 바로 영원 전에 계셨던 분이시고 만물을 지으신 분이시고 타락한 죄인들을 멸망 가운데 버려두지 않으시고 온 인류의 죄 값을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분이시고, 사흘 만에 사망 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이 이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바로 이 이름을 자신을 재판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기 전의 베드로는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저 ‘예수’라는 이름은 자신을 가르쳤던 스승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베드로에게 주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성령을 받기 전에는 늘 죽음을 두려워하고, 비겁하게 도망가고, 주님을 부인하였습니다. 지독한 이기주의자였습니다. 자기 목숨을 아깝게 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지금 확실하게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당당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이 모든 일을 행했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장엄하고 확신에 찬 발언입니까?
이것이 믿음입니다. 시작과 끝을 아니 모든 진리를 다 꿰뚫은 것입니다. 그래서 당황하지 않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야구를 좋아합니다. 특히 메이저리그 야구는 즐겨 봅니다. 그러나 시간이 없어 생중계를 놓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방송에서 녹화경기를 다시 보여줍니다. 그런데 저는 이미 경기 결과를 알고 잇습니다. 그래서 이긴 경기일 경우에는 정말 느긋하게 봅니다. 왜냐하면 이미 결과를 아니까요. 진리를 가지면 이렇게 사람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는 이제 자신의 삶의 결과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것이 없게 된 것입니다. 이렇듯 결과를 알고 사는 인생과 모르고 사는 인생은 차이가 있습니다.
4. 결론
우리는 이 세상에서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갈 길을 인도하시며 피할 길을 열어 주시고 모든 악한 계획으로 걸려들지 않도록 지키시며, 믿음의 순종을 통해 복을 주시고, 결국 우리 종착역이 하나님나라일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안다는 것은 모든 두려움을 없애 줍니다.
그러므로 신앙에 있어서 가장 무서운 적은 무지입니다. 무지하면 아무 것도 모르고 행동할 용기마저 잃어버립니다. 알지 못하고 행동하지 못합니다. 야구 선수가 야구 규칙을 모르고 그라운드에서 뛰어다닐 수 있습니까? 안타를 쳐 놓고 3루에서 1루로 거구로 돌면 점수를 줍니까? 그는 그 자리에서 아웃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이 이름은 단순히 어떤 사람을 일컫는 표식이 아닙니다. 이 이름 안에 모든 하나님의 속성이 다 들어 있습니다.
할렐루야, 자나 깨나 예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예수 이름으로 살아야 합니다. 어떤 위험한 상황이 닥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내걸면 주님이 지켜 주시고 위기를 벗어나도록 도우십니다. 저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버린 돌이지만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집의 모퉁이 돌입니다. 우리 삶의 중심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름만이 우리의 구원이십니다. 북한산 입구에 큰 현수막이 하나 걸렸습니다. <중생을 구원하러 오신 부처님>이라는 글귀가 쓰였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고 실소를 금하지 못했습니다. 언제부터 불교는 자꾸 기독교를 페러디합니다. 구원이라는 용어는 불교에 없는 용어입니다. 불교는 신의 존재를 믿는 종교가 아닙니다. 단지 석가모니라는 깨달은 사람을 통해 해탈의 경지에 오르고자 하는 철학적 종교입니다. 그런 그들이 이제 구원을 이야기합니다. 구원은 절대자가 하는 일입니다. 불교는 절대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자들인데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습니다. 12절을 함께 읽으며 오늘의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아멘.
[출처] 17주차. (사도행전강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아리엘 개혁교회) |작성자 아리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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