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주차. 미쳐야 산다
본문: 4;13-22
오늘은 세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는 소위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의 맹점이 무엇인지 알아봅니다.
둘째로 명백한 증거의 힘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논하고,
셋째로는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위해 필요한 것은 그 일에 미쳐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자 합니다.
1. 식자들의 고정관념
성전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친 표적으로 인해 구름 데 같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베드로와 요한에게 몰려들었습니다. 그 수가 오천에 이르렀다고 하니(4;4) 이는 놀랄만한 숫자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에 사는 주민들이 1만 명이 안 되었으니까 거의 다 한 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를 지켜보던 산헤드린공회의 지도급 인사들이 얼마나 지금 당황스럽고 놀라겠습니까? 잘못하다간 자신들의 기득권이 두 사도와 예수 제자들에 의해 송두리째 날라 갈 판이 되었습니다. 이대로 두다가는 뭔가 큰 일이 터질 것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긴급하게 두 사도를 체포하고 재판정에 세워서 이단 혐의를 적용하여 속전속결로 해치우고자 하였습니다.
지도자들은 갈릴리 촌놈인 두 사람을 그리 대수롭게 여기지 않습니다. 13절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그냥 평범한 ‘범인’으로 봅니다. 헬라어로는 ‘이디오타이’이고 영어로는 ‘laymen'인데 세상에서는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가리키고 교회에서는 ’평신도들‘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소위 배웠다 하는 사람들이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깔보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만만하게 보았던 두 사도가 재판을 해 보니 만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하고 물으니 베드로가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했다“하고 담대하게 말할 뿐 아니라 그 언변이 논리정연하고 확신에 찬 발언이었습니다.
그러자 심문을 하던 공회원들이 오히려 놀라서 뒤로 자빠지는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와 요한이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이미 예언을 한 일입니다. 막 13;11절이 증명합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그 때에 너희이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라”. 그러나 지금 예루살렘의 권력을 쥔 이 사람들은 이 이 성령의 사역을 알 턱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은데 어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겠습니까?
그들은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역자가 될 수 있느냐 하는 고정관념에 빠져 있습니다. 좀 배웠다 하는 사람들의 경우, 대개 이런 교만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보다 조금 못 배우고 못 났다 싶으면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고 깔보기 일쑤입니다. 목회자들의 세계에서도 이런 일이 내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목회자가 되는 과정에는 두 개의 과정이 있습니다. 하나는 정규 코스를 거치는 것입니다. 정규 코스에는 또 두 과정이 있습니다. 하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대학교에 들어가서 4년간 공부한 다음, 다시 3년간의 신학대학원의 과정을 거치는 것 하고 다른 하나는 일반대학을 졸업한 사람인 경우엔 바로 신학대학원으로 가서 3년 코스를 밟고 목회자가 됩니다. 그렇다고 졸업만 하면 목사가 되고 설교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모르시겠지만 설교자가 되려면 면허증이 있어야 합니다. 처음 듣는 이야기인가요? 아무나 이 강단에 서서 설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자가 되려면 ‘강도사시험’을 치루어야 합니다. 여기서 ‘강도’라는 말을 잘 해석해야 합니다. 나쁘게 해석하면 큰 일 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설교한다’는 말입니다. 그 시험에 합격해야 강단에 서서 설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험이 만만하지 않습니다. 일종의 사법고시입니다. 한 해에도 낙방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특별하게 이런 정규 과정을 거치지 않고 목회자로 부르시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해당합니다. 대충 신학교 만들어 놓고 1년 만에 뚝딱 졸업장 주고 목사 안수하는 그런 것 하고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역사상 이런 특별한 소명자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D.L 무디 같은 사람입니다.
문제는 정규코스를 거친 사역자들이거나 좀 유명하다 싶은 신학교를 졸업한 사람들 중 극히 일부의 사람들이 은근히 비정규코스를 밟고 사역자가 된 사람들을 깔보고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소위 일류병이라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무디는 구두 수선하던 청년이었습니다.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해 학식도 짧았습니다. 그래서 설교할 때 어수선하고 논리가 정연하지 못하고 발음도 틀리고 글을 쓸 때 철자도 틀렸습니다. 좀 배웠다 하는 사람이 무디의 설교를 듣고 놀렸습니다. 무식하면 설교를 하지 말든지 그게 뭐냐고 조롱하였습니다. 어떤 날은 틀린 부분만 다 적어 와서는 꼬치고치 따지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이 항상 있습니다. 대개 이런 사람은 틀린 것 지적하는 것을 사명으로 아는 사람입니다. 어디 가서 특강을 하거나 집회 때 설교하면 꼭 한 사람이 아까 그거는 잘못 말했다고 지적합니다. 그러자 무디가 뭐라고 그랬는줄 아십니까?
“그래, 선생님은 많이 배우셨고 말이 청산유수 같은데 그 많이 배운 학문과 청산유수같은 언변으로 하나님 앞으로 몇 사람이나 영혼을 인도했습니까?”
지금 고정관념에 둘러싸인 종교지도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베드로와 요한 같은 촌뜨기들이 어떻게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느냐고 도무지 믿지 못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인간의 영역을 초월해 계신다는 것을 잊고 삽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다 알 수 있는 하나님이라면 그분은 이미 하나님이 아닙니다. 전에 그랬잖아요? 아프리카의 한 선교사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일을 하나님이 시키자 ‘어떻게 이런 일을 이해하라는 말입니까?’ 하고 항의하자 하나님이 즉시 “니가 이해하면 내가 사람이지 하나님이냐?”하고 말씀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식과 이성의 한계를 초월하신 분이십니다. 감히 인간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다 아는 듯이, 하나님의 섭리를 다 이해한다고 하는 태도가 가장 무지하고 교만한 태도일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소위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의 무지와 교만, 그 실체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도 조금의 지식을 가지고 우쭐대거나 자랑하는 거만한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가 가늠하지 못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이 모사가 되었느냐?”(롬11“33-34)
2. 명백한 증거
자, 산헤드린 공회의 높으신 양반들이 하찮은 두 사도를 이단으로 몰아 처단하려고 하나 눈앞에 벌어진 명백한 증거가 있기에 어찌하지 못합니다. 자기들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지금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멀쩡하게 되어 걷고 뛰고 있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무슨 죄목을 뒤집어 씌울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당황합니다. 14-16절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기를 가로되 이 사람들이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이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이 명백한 증거를 무슨 수로 부인한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은 바로 이 확실한 증거가 있기에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예수 예수 귀한 예수 믿음 더욱 주소서”하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예수 증거를 몸에 지니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손에 만져지지도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분이시지만 우리는 늘 그분과 동행하고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특히 성령님은 우리가 말씀 안에 거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할 대 가장 크게 기뻐하시고 가장 크게 역사하십니다. 왜 기도한 대로 응답이 되는 줄 아십니까? 하나님을 가장 기쁘게 해 드렸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부보를 기쁘게 해도 용돈을 주고, 회사원이 회장님을 기쁘게 해 드려도 보너스를 주는데 하물며 우리 하나님이 자신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보상을 해 주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보상을 바라기 위해 그렇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고 이런 일에 하나님의 기쁘신 도우심은 당연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허탄한 신화나 뜬금없는 일에 대해 확신하는 부질없는 일이 아니라, 신앙은 명백히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고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끼리 하는 이야기이지만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수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다른 것은 말하지 않더라도 수준이 아주 밑바닥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굉장히 똑똑한 줄 착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으로 무장한 사람과 자신의 수준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어찌 같은 차원의 지식을 가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모르고서 어떻게 세상의 기원을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모르고서 어떻게 우상숭배종교의 본질을 알 수 있으며, 사단 마귀의 교활한 속임수를 간파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모르고서 십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고 구원이 무엇인지, 왜 인간이 구원을 받아야 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여기 이 자리에 하버드대 박사 학위를 가진 한 불신자가 서 있다 합시다. 그 사람에게 “이 세상이 어떻게 해서 생겨났습니까?”하고 물으면 그 사람이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 앞에 앉아 있던 할머니 권사님이 웃으시면서 “이 양반아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세상이 어떻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는 말이냐? 당신, 헛공부 했구먼”이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누가 과연 무지한 사람입니까?
이렇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알고 믿고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확실하고 명백한 증거를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 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억만금을 준다한들 이 받은 복과 비교할 수 있습니까? 이 명백한 증거로 인해 우리는 어떤 것에 의해서도 거꾸러지거나 멸망당하지 않습니다. 제아무리 사단이, 귀신들이 나를 넘어뜨리려 한다 해도 우리는 결코 쓰러지지 않습니다. 지금 베드로와 요한이 그런 경우입니다. 할렐루야, 주님께 영광을 올려드립시다.
3. 미쳐야 산다.
이제 궁지에 몰린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아니라 이 두 사람을 처단하려고 했던 소위 배운 사람들, 잘난 체 하는 사람들, 종교지도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궁여지책으로 두 사도에게 ‘앞으로는 예수 이름으로는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경고하는 선에서 마무리 지으려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여기서 물러서지 않습니다. 큰 소리로 말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용기입니까? 웬만하면 입을 닫고 얼른 법정을 빠져 나와야 하는 것이 신상에 좋을 것인데 그러지 않고 오히려 큰 소리를 치며 당당하게 복음을 증거합니다. 19-20절을 함께 읽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참 부럽지 않습니까? 두려움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베드로의 이 선언을 들으십시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것은 목숨을 걸고 진실을 이야기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목숨을 이미 내 놓았기에 어떤 경우에도 자신이 알고 들은 것을 숨기거나 변명하거나 왜곡하지 않습니다. 일제시대에 일본형사들이 10만 군중보다 주기철 목사님 한 분을 더 무서워 했습니다. 어떤 위협과 고문과 공갈협박에도 주 목사님은 굴하지 않고 당당히 주님을 증거하였고 순교하였습니다. 주기철 목사를 사형시켰다는 소식을 본토에서 들은 일본정부 고위관료가 ‘조선 지배는 이것으로 끝났다’고 실토했다고 합니다.
오늘날의 시대를 ‘포스트모더니즘시대’라고 합니다. 이 시대의 특징이 세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절대적 가치기준이 없다는 ‘진리상대주의’와 모든 종교는 각자 구원의 길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종교다원주의’와 이런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리 하는 ‘하여가주의’ 즉, ‘혼합주의’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런 사조들이 공격하는 유일한 대상은 바로 기독교라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오직 기독교만 사라지면 세상의 평화가 이룩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만이 자신들만이 옳다고 하고 자신들만이 진리와 구원의 길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배타적이 독선적인 존재라고 공격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기독교만 빼고 자기들끼리 화합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종교간의 대화라는 명목으로 왔다 갔다 합니다. 스님이 교회당에 와서 축하도 하고 거기에 대한 답례를 하기 위해신부와 자유파 목사들이 절에 거서 찬불가를 함께 부르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자고 손을 잡고 사진을 찍습니다. 뭔지도 모른 사람들은 이런 퍼포먼스를 보고 ‘보기 좋다’하고 박수치고 환호합니다. 더욱이 이런 일을 앞장서서 추진하는 사람을 존경하고 추종합니다. 이 시대가 이렇습니다. 엘리야 선지자 시대에만 바알숭배가 만연했던 것이 아닙니다. 21세기에도 바알은 여전히 죽지 않고 하나님을 공격합니다.
이러한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미혹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진리에 대한 분명한 지식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분명한 자기선언을 해야 합니다. 분명하게 신앙고백을 해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유일한 구원이다“고 선언해야 합니다. 하여가를 부를 것이 아니라 ’이 몸이 죽고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도 임 향한 일편단심 가실 리야 있으리”하고 일편단심가를 불러야 합니다. 세상 속에 섞여 살지만 분명히 선을 그을 것은 긋고 살아야 합니다. 아닌 것은 아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면 그리스도인답게 행동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과 다를 바가 전혀 없는 사람을 어떻게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오늘 집에 가시거든 목록을 하난 만들어 보세요. 자신이 세상 사람과 다른 것이 몇 가지나 되는지 한 번 쭉 나열해 보세요. 그 목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번제로 드리시지요. 아마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시는 여러분의 순종이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베드로처럼 자신의 사명에 미쳐야 됩니다. 사명에 미쳐야 예수가 살아납니다. 대한민국이 다시 살아나려면 먼저 그리스도인들이 미쳐야 합니다. 역대 역사를 보십시오. 역사는 늘 미친 사람에 의해 새롭게 되었습니다. 예수도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고 바울도 그랬고 세례 요한도 그런 평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교양있게, 상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오직 좋은 소리 듣고 사는 것이 마치 좋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여깁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태도로는 세상을 바꾸지 못합니다. 좋은 소리, 훌륭한 평판을 다 들어가면서 세상을 바꿀수 없습니다. 다락방에 모인 120명 밖에 안 되는 사람들에 의해 교회가 탄생하고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왜요?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에 휩싸여서 미쳤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소동하자 사람들은 ‘저들이 미쳤다’고 했습니다.
노아시대에 노아가 어떻게 살았습니까? 청천 하늘에 비도 오지 않는데 산 꼭대기에 배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한 마디씩 합니다. ‘미쳐도 제대로 미쳤군’ 그럼에도 노아는 배를 뚝딱거리며 만들면서 ‘회개하라’고 소리칩니다. ‘술 먹고 방탕하지 말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오칩니다. 술 먹던 삶들이 뭐라고 했을까요? 모두 ‘에이 술 맛 떨어지게 웬 미친 영감탱이냐?’했을 것입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저들이 미쳤다고 했던 노아와 그 가족은 살고 나머지 모든 인류는 한 사람도 예외없이 다 죽었습니다. 9참고로 아직도 노아홍수가 사실로 믿어지지 않는 사람은 유트브를 찾아서 ‘김명현 교수’를 검색하시어 그의 특강을 잘 들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4.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진리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 몸과 영에는 예수님의 흔적, 성령님이 함께 하신다는 명백한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인생의 정답을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정답을 알고 있으면서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합니까? 정답을 가지고 있으면서 당당하게 살지 못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죽음이 두려워서 그러십니까? 어려운 일이 닥쳐 나와 내 가족이 거리로 쫓겨나는 것이 두려워서 그러십니까? 만약 그러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약속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감당치 못할 시험거리를 우리에게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시기를 기원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시며 늘 나와 동행하는 친구이십니다. 아멘.
[출처] 18주차. 미쳐야 산다 (아리엘 개혁교회) |작성자 아리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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