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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주차. 영적인 가족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4. 5. 25. 19:40

본문

 

19주차. 영적인 가족

 

 

 

본문/ 4:23-37

 

 

 

1. 동류

 

 

 

한 차례의 핍박을 당한 후 사도들이 풀려났습니다. 믿음의 승리입니다. 그 무시무시한 재판정에서 두 사도는 조금의 미동도 없이 담대하게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제일 먼저 찾아 간 곳이 어디입니까? 23절에 보니 동류에게 가서라고 했습니다.

 

 

 

동류라는 단어는 잘 사용되지 않는 것인데 누가가 이 단어를 특별히 사용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감옥에서 풀려난 사도들이 그냥 보통의 집단에게 간 것이 아니라 적어도 매우 친밀한 가족 이상의 모임에 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영어성경(NIV)은 이것을 ‘there own people’이라고 번역했는데 믿음의 형제들이 곧 자기 자신과 하나라는 뜻을 담은 특별한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 사도들이 제일 먼저 달려간 곳이 그런 영적인 가족이 기다리던 공동체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여기서 함께 예배드리고 있는 사람들이 그저 일주일에 한 번 얼굴 보는 그런 사이가 아닙니다. 다시 말해 이 동류들은 주 안에서 피붙이보다 더 가까운 영원한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2. 혈연중심의 가치관

 

 

 

동 서양을 불문하고 세상의 중심은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입니다. 가장 궁극적인 가치는 많이 가졌든 못 가졌든, 유식하건 무식하건 결국 세상은 자신과 피를 나눈 혈연에 집착합니다. 혈연의 가족을 최우선순위에 두므로 세상은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이어 받을 수 없습니다.

 

 

 

특히 유대인의 경우, 대표적인 혈연 중심적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에게 임했던 구원도, 심지어 그들이 대망했던 메시아도 민족주의와 혈연을 중심으로 이해하고 해석했습니다. 유대인의 선민의식은 하나님에 의해 택함 받은 백성으로서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당위성보다 자신들이 마치 타민족들보다 탁월하고 우수한 것처럼 우쭐대라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만 위해서 메시아가 약속되어진 것이 아닌데도 그들은 오직 자신들만 구원을 받는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잘못된 민족주의와 혈연주의에 함몰된 잘못된 구원관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끼리 어울리고 타민족을 배타적으로 대했습니다.

 

 

 

서양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 <대부>가 이를 잘 말해줍니다. 폭력배의 대부(말론 브란도)는 결국 자신에게 충성을 다했던 심복들을 다 물리치고 망나니 같은 아들(알 파치노)에게 사업을 물려줍니다. 결국 중요한 일은 자기 피붙이에게 맡길 수밖에 없는 이 저속한 가치관이 지배하는 곳이 바로 세상입니다.

    

 

한국인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선거할 때 보면 결국 마지막에 기대는 것은 혈연입니다. 정치인들이 욕을 들어가면서도 상습적으로 써 먹는 것이 뭐냐 하면 내 고향이고, 내 친척이고, 내 가족입니다. ‘우리가 남이가하면 다 되는 것입니다. 국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정책이고 무엇이고 간에 이미 자기와 지역이 같거나, 고향이 같거나 친척이거나 하면 일단 지지하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그렇게 후보를 결정해 놓고 나면 상대방이 주장하는 것은 모조리 까부수는 것입니다. 제아무리 상대방이 훌륭하고 바르고 옳다고 해도 씨알도 먹히지 않습니다. 장사하는 사람은 더합니다. 현금전대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못합니다. 사돈의 팔촌이라도 피붙이에게 맡깁니다. 회사를 운영해도 자식에게 경영권을 물려줍니다. 온갖 성경상의 명분을 내걸고 자식에게 담임목사직을 물려주는 행위도 같은 가치관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가치관을 뿌리 채 흔들고 있습니다. 성령의 강력한 강림과 함께 탄생한 교회공동체는 바로 이 혈연 중심적 사고체계와 잘못된 구원관을 혁신하는 일을 제일 먼저 시작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가족공동체를 새롭게 해야 했습니다. 이에 대한 하나의 단초가 있는데 바로 에베소서 5:28~31에 있습니다.

이와 같이 남편도 아내를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와 함께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의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족공동체에 대한 암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알다시피 부모 자식 간은 1촌이고 부부는 0촌입니다. 위 성경에서 사람은 성장하면 일단 시집 장가를 가서 부부관계를 맺습니다. 그러려면 먼저 부모를 떠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부모 자식 간은 혈연중심적 가치관계입니다. 부모를 떠나라는 것은 바로 이 혈연중심에서 벗어나라는 것을 말합니다. 부모들이 들으면 섭섭한 이야기지만 아들이 장성하면 아내와 결혼을 하고 그러면 부모보다 자기 아내와 더 가까워지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부모를 돌보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성경은 구원의 일에 있어서만큼은 부모관계가 아니라 부부관계를 통해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진정한 가족은 혈연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한 인연이며, 피붙이가 아니라 믿음으로 맺어진 관계라는 것입니다. , 성경은 결국 우리에게 부부관계를 통해 진짜 가족, 즉 교회 공동체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떠나그 혈연 중심적 가치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라고 한 것이고 이어 32절에서 이 비밀이 크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교회는 신랑과 신부의 관계입니다.

 

 

 

3. 영적인 가족이 하는 일

 

 

 

이제 사도들이 자신들의 육적인 가족을 찾지 않고 자신들과 같은 믿음을 가진 동류, 즉 영적인 가족을 찾아가서 그간에 일어났던 일들을 상세하게 보고합니다. 그러자 모든 영적 가족, 교회공동체가 한 마음 한 뜻으로 몇 가지 일을 합니다. 무엇을 했는지 살펴봅니다.

 

 

 

첫째, 기도했습니다.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24절 상)

- 먼저 한마음으로기도했습니다. 제사장과 장로들의 협박에 가까운 말을 전해 들은 교회공동체는 그들의 위협에 인간적인 대처를 하지 않고 제일 먼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 다음으로 영적 가족들은 하나님을 대주재여하고 특별한 이름으로 부릅니다. ‘데스포테스라는 이 말은 그리 흔한 말이 아닙니다. 이 단어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사회의 노예제도에 대한 선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당시 노예들은 물건처럼 시장에서 사고 팔리는 존재였습니다. 노예를 산 주인들은 노예에겐 절대적 주인이 됩니다. 생사여탈권을 가진 주권자로 군림합니다. 이런 절대 주인과 노예관계는 로마와 유대의 관계를 상징하고, 예루살렘을 지배하는 기득권자들과 새롭게 탄생한 신생아 같은 교회공동체의 관계를 상징합니다. 노예는 자신을 지배하는 주인을 당연히 주재자라고 부릅니다.

- 그러나 지금 교회공동체는 그런 세상의 지배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지배자들이 제아무리 자신의 권력을 휘두른다 해도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라는 대주재자에 의해 통치되고 관리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산헤드린공회가 제아무리 로마의 권력을 등에 업고서 사도들을 비롯한 새로운 영적 가족들을 노예로 부려먹으려 해도 하나도 두려울 것이 없다는 이 부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 다음으로 교회는 하나님을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우리 주권이 모두 하나님에게 속한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 이어 동류들은 다윗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했다고 말합니다.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이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했습니다. 여기서 열방은 로마제국을, 족속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장악한 제사장들을, 군왕들은 헤롯왕을, 관리들은 빌라도를 지칭합니다. 이 모두가 합세하여 벌인 일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일입니다. 예수를 거스르는 일을 하기 위해 저들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지금도 종교다원주의자들이나 혼합주의자들은 기독교와 교회들을 무너뜨리기 위해 하나로 뭉치고 있습니다.

- 그런데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예정하신 일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초대 성도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대해 정확한 이해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들 모두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인 성경에 대해 누구보다 해박한 지식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도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특별히 오늘의 이 기도 속에서 우리는 교리적으로도 삼위일체의 신학적인 사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또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오늘을 사는 우리가 결코 초대 성도님들보다 더 깊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감히 장담하지 못할 것입니다.

 

 

 

둘째, 간구했습니다. 여기서 교회공동체는 세 가지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 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29-39)

- 먼저, 위협을 하감해 달라고 했습니다. 사도들이 풀려나긴 했지만 이들에 대한 위협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우리는 이런 위험이 사라지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사도들은 위협을 없애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저들의 저 서슬 푸른 위협을 내려 보시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기에는 우선 이 위협도 모두 하나님의 뜻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간구 속에는 하나님, 저들이 하는 것을 똑똑히 보시고 계시다가 반드시 계산해 주세요라는 간절함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하나님의 예정으로 이런 고초를 겪지만 하나님이 저들의 악행을 기억해 주시라는 것입니다.

- 다음으로 담대히 복음을 전하게 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냥 도망치면 될 것인데 아무도 이 위험한 상황을 회피하려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위협 속에서도 복음을 담대하게 전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것은음 죽음을 각오한 사람들만이 선포할 수 있는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은 비겁한 사람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나라는 자기 목숨을 아까워하는 사람에게 세워지지 않습니다.

- 세 번째 간구는 예수 이름으로 말할 때, 치유와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게 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4. 기도의 결과

 

 

 

첫째,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 외적으로는 땅이 진동하고 내적으로는 기도한 사람들에게 성령이 충만하게 역사하였습니다. 혹자는 이 사건을 두고 2의 오순절 사건이라고 부릅니다. 어쨌든 성령충만의 결과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전하게 되었습니다. 29절의 간구가 즉시로 응답된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즉시로 하나님의 응답이 나타나는 것보다 세상에서 더 기쁘고 행복한 순간은 없을 것입니다.

 

 

 

둘째, 삶이 달라졌습니다.

- 32절부터 37절까지 보니 먼저 물질관이 달라졌습니다. 영적인 가족들은 이게 누구 소유냐 하는 물질관을 버렸습니다. 자신의 재산이 얼마냐 하는 땅의 가치관을 버린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공산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산주의는 이론적으로는 모든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하는 사상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물질관은 그냥 분배의 정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위대한 전제 위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 전제가 바로 32절의 한 마음 한 뜻으로입니다. 원어적으로는 미아(하나) 프시케(마음, )’라 하는데 이는 한 영혼이다, 한 생명이다라는 뜻입니다. , 교회공동체가 자신의 재산을 팔아 사도들에게 가져온 이유는 바로 교회공동체는 하나의 생명체가 되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12장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한 몸으로 비유했습니다. ,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성도들이 몸의 지체가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공동체는 하나의 생명을 가진 영적인 가족이자 영생을 누리는 진짜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 특별히 우리는 36-37절을 통해 위대한 사도이자 사도 바울의 동역자인 바나바의 등장을 목격합니다. 그도 자신의 재산을 다 팔아 교회공동체에게 가져왔습니다. 아마 자신의 전 재산을 다 바쳤기에 성경이 특별히 기록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의 이름은 원래 요셉(더하다)이었는데 하나님에 의해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나바로 개명되었습니다. 아마 바나바는 실의에 빠진 채 고향 땅 다소에서 칩거하던 바울에게 찾아가 그를 위로하고 주의 길을 걸어가도록 하는 임무를 부여받았기에 이런 이름이 주어진 것으로 봅니다.

 

 

 

5. 결론

    

 

모든 그리스도인은 땅의 가치관을 버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나라의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3:2)고 했습니다. 거듭났다는 것은 가치관이 변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축복의 결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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