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주차. 아나니아와 삽비라
본문: 행5:1-11
1. 들어가는 말- 교회의 사실주의
여기에 기록된 다소 엉뚱한 기록은 앞의 바나바의 기록과 정반대의 실상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특히 초대교회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이 부분은 지워버리고 싶을 만큼 범죄에 대한 가혹한 징벌, 다시 말해 즉사라는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를 당황케 합니다. 하나님이 범죄에 대해 그런 심판을 단행하신다면 누가 하나님 앞에서 생존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앞에서 초대교회의 순전하고 아름다운 교제와 흠 없는 신앙생활을 누가를 통해 엿보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누가는 이 끔찍한 초대교회의 치부를 숨기지 않고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마치 선생님으로부터 잘못을 하여 뺨을 한 대 얻어맞은 그런 느낌입니다.
흔히 우리는 초대교회를 교회의 이상향으로 설정하고 우리 신앙들을 초대교회로 회복되기를 소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라고 해서 완전한 사람들의 사회가 아니었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누가의 의도대로라면 초대교회의 공동체의 모습에 대해 우리는 지나친 환상을 가지지 말아야 합니다. 즉, 기록자 누가는 초창기 기독교회의 단일성과 거룩성을 후대의 사람들이 과대평가하는 것을 미리 예견하고 이런 정반대의 두 기록을 우리에게 남겨놓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한편으로 이런 점이 바로 성경의 위대성입니다. 성경의 정직한 사실주의(realism)로 인해 사람들은 진실한 유익을 제공받는 것입니다.(Meyer의 ‘교회규율의 원칙’)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모든 사건은 우리가 판단하기에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 해도 우리의 유익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2. 사건개요
먼저 정확히 언제 이 사건이 발생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베드로와 요한의 투옥 사건이 있은 지 그리 멀지 않은 시기일 것입니다. 교회는 점점 자리를 잡아 가고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열 두 사도들의 헌신과 성도들의 일심단결이 크게 기여했을 것입니다. 특히 바나바의 전적인 헌신으로 교회는 크게 고무되었을 것입니다. 날마다 예배당에 모여 기도하고 찬양하고 거리로 나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널리 알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교회 안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 주인공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입니다. 아나니아는 히브리어로 ‘하나니아스’이고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은혜로 주셨다’이고, 삽비라는 아람어 이름이며 뜻은 ‘아름다움’입니다. 둘 다 얼마나 좋은 이름입니까? 결론적으로 이 두 사람은 이름값을 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좋은 이름대로 살지 못하고 부끄러운 모습으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사람은 모두 이름이 있고, 사람마다 이름값이 있습니다. 유명하다는 것은 그만큼 이름값이 높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유명해지려고 합니다. 유명해지면 이름값이 높아지고 이름값이 높아지면 돈을 잘 벌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이름값을 높여야 합니다. 단지 세상 사람과 다른 점은 이름값으로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주님의 복음을 널리 전하기 위해 이름값을 높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름값은 또한 영향력을 말합니다. 권세는 영향력이 얼마나 크냐에 달려 있습니다.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한 마디 하는 것과 영향력이 거의 없는 평범한 사람이 하는 말 한 마디가 같지 않습니다. 성도들의 말 한마디가 세상을 움직여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세상은 이제 교회의 말을 거의 귀 담아 듣지 않습니다. 그 모든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참된 신앙인들로 인정받지 못하고 타종교인들과 다를 바가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그리스도인이 분명히 구별되어야 함에도 별로 다르게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한국의 그리스도인은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이 세상 사람들과 대동소이합니다. 그만큼 영적인 일을 추구하기보다 육적인 일에 함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세상을 등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에 나가 함께 섞여 살면서도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등대는 바다를 향해 빛을 비추입니다. 등대가 산을 향해 빛을 비춘다면 존재가치가 없듯이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향해 빛을 비추지 못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저버리고 사는 부끄러운 사람일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 부분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늘 우리는 교회 안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교회공동체라고 완전한 공동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문제를 어떻게 슬기롭게 해결하는 가를 하나님이 지켜보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 문제가 나면 사람들은 혀를 차며 피하기 일쑤입니다. 회피하는 것은 가장 쉬운 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회의 문제를 통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유익을 주려고 갈등을 일으키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갈등이야말로 교회와 성도가 성장하는데 필요한 묘약이 됩니다. 이것이 세상의 갈등과 다른 점입니다.
아무튼 초대교회 시절에 아나니아와 삽비라라는 부부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헌금을 하기 위해 자신의 재산을 처분했습니다. 여기까지는 하등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헌금을 하든지 안 하든지는 개인의 선택입니다. 교회가 이를 강제할 권한이 없습니다. 누구도 아나니아에게 재산을 팔아 교회에 바치라고 얘기한 적 없습니다. 토지를 처분하고 얻은 돈은 아나니아의 것이었습니다. 그 돈으로 그가 무엇을 하든지 아무도 간여할 수 없습니다. 그 돈으로 교회에 얼마를 내든 그것은 순전히 아나니아의 권리입니다. 다만 하나님은 자발적으로 헌금을 내는 자를 기뻐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위해 기꺼이 즐겁고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바나바의 행위가 아름다운 것은 그가 자발적으로 선행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엔, 굳이 헌금을 드리면서 이 헌금이 자신들의 재산 전부를 팔아 내는 것이라고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1절에서 이렇게 묘사합니다.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즉, ‘일부러 감추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누가의 고차원적인 의도를 파악해야 합니다. 누가는 이 사건을 서술하면서 ‘에노스피사토’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단어는 70인역 여호수아 7:1에 나오는 단어와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누가가 이 단어를 여기에다 사용한 것은 바로 이 사건을 가나안 정복 당시 아간이 범한 범죄와 이 사건을 동일한 선상에서 다루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는 것입니다. 두 사건은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역했다는 점에서, 즉 탐욕에 눈이 멀어 공동체 전체를 기만했다는 점에서 그 결과 끔찍한 심판을 받았다는 점에서 공통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아나니아의 속임의 말은 속으로는 하나님에게 바치는 것이 기뻐하지 않으면서 겉으로는 분우기상 바나바처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바나바가 전 재산을 팔아 교회에 헌납하자 모든 교인이 박수를 치고 칭송을 하자 자신도 그리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다만 아나니아는 돈으로 그런 칭송을 사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탐욕을 속에 가지고 있었던 아나니아는 결코 바나바 같은 그릇이 못 됩니다. 아무나 대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소인배는 늘 생각하는 것이 밴댕이 소갈딱지 같습니다. 큰물에서 큰 물고기가 노는 법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큰 세상에서 견문을 넓혀야 큰 그릇이 되고 큰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름값을 톡톡히 치루는 것입니다. 박찬호가 국내에서 선수생활을 했다면 그 이름값이 높아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아나니아는 소인배였습니다.
아나니아는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즉시로 베드로의 입을 통해 아나니아의 탐심을 공개하고 맙니다. 32절을 보세요. 베드로가 이렇게 소리칩니다. “아나니아야, 네가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소인배와 하수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둑을 두어 보면 하수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하수들은 대개 눈앞의 이득을 취하고 고수들은 전체적인 전략을 가지고 천천히 판세를 장악해 나갑니다. 하수들의 얕은 수는 금방 들통이 나고 맙니다. 지금 아나니아가 딱 그 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아나니아의 이 속임이 단순히 한 개인을 속인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 전체를 속인 것이라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4절 끝 부분을 보면 베드로는 아나니아가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인 것”이라 선포합니다. 다시 말해 한 개인으로서의 베드로에게 한 거짓말이라면 비교적 사소한 문제일 수 있으나 아나니아가 의도했든 그렇지 아니했든 결과적으로 교회를 속인 것이 되었고,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대적한 중대한 범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인생에서 제일 위험하고 무모한 일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의 원래 뜻이 ‘대적’(Adversary)입니다. 즉,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은 곧 사탄이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정신은 무엇이든 무력으로 대적하지 않는 것입니다. 심지어 억울한 일을 당하더라도 대적하지 않는 것이 기독교 정신입니다. 세상은 자신에게 조금만 불리하고 억울하다 싶으면 항의하고 삿대질을 하고 우르르 몰려가 데모합니다. 기독교를 빙자한 이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들의 정체가 드러나고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대적합니다. 법을 무시합니다. 지금 구원파가 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금수원이라는 그들의 본거지에 모여 국가의 법집행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통 기독교는 어떤 억울한 일이 발생하고 핍박을 받는 경우에도 절대로 대적하고 억울하다고 항의하거나 데모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결정은 하나님에게 맡겨두고 설사 억울하다 해도 끝까지 참으며 오히려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해야 합니다. 끝에 가 보면 알지만 결국 진실은 승리합니다. 하나님이 억울함을 다 풀어 주십니다. 완전히 역전을 시켜 주십니다.
3. 하나님의 심판
자, 이제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먼저, 5-6절에 보니 베드로 사도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아나니아가 갑자기 땅에 엎드러져 죽고 맙니다. 얼마나 아나니아가 놀랐으면 즉사하고 만 것일까요? 이 일을 보고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아 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아나니아의 시체를 들고 나가 장사 지냅니다.
다음으로 아나니아의 아내가 등장합니다. 시간적으로는 3시간이 지난 뒤입니다. 삽비라는 아직 자기 남편이 죽은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삽비라에게 모른 척 하고 다시 묻습니다. “정말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삽비라도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아마 두 부부는 사전에 이렇게 입을 맞춘 것인지 모릅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매우 간교한 범죄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즉시 아나니아에게 선포한 것처럼 삽비라의 죽음을 선포하자 그 자리에서 삽비라가 죽고 맙니다. 다시 한 번 사람들은 크게 두려워하였습니다.
이 죽음은 분명한 심판의 행동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 심판은 교회에서 일어난 최초의 일입니다. 교회 공동체를 속인 것은 하나님을 속이고 성령을 속인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당연히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점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여전히 대적하는 자들은 이 무시무시한 심판에 대해 하나님을 경멸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저들은 이렇게 불만을 표합니다.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분이 저렇게 끔직한 일을 서슴없이 자행한다는 말인가?” 정말 하나님을 그렇게 표현해도 되는 것입니까? 이런 불만은 참으로 가당치 않은 일입니다. 자유주의자들은 늘 하나님의 사랑만 강조하고 공의를 삭제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용서하시고 오직 사랑으로 모든 것을 봐 주시는 분이라고 호도합니다.
정말 중요한 사실은 이런 주장을 펴는 사람들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목숨을 거두어 간 것이 지극한 하나님의 사랑의 행동이라는 사실을 죽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정말 큰 범죄를 저질렀을 때엔 그 목숨을 일찍 거두어 가셨습니다. 고전5:5의 기록입니다.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을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다시 말해,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그대로 둘 경우, 더 큰 죄악을 저지를 가능성을 미리 차단하고 그들의 구원을 보장하기 위해서 일찍 생을 마감시킨다는 것입니다. 이런 행동이야 말로 진실로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보호하시려는 사랑의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사랑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약 5:20을 봅니다.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한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죄를 덮으시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말 큰 죄를 짓는다면 더 이상 지치하지 않고 이 당의 생을 마감시킬 것입니다.
4. 결론
오늘 우리는 사도행전 5장에 들어서자마자 충격적인 사건을 접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헌금을 일부 떼먹었다가 그저 매 몇 대 맞고 끝나는 사건이 아니라 죽고 맙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그냥 헌금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단순한 문제라면 누가가 이것을 기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교회 공동체를 어떻게 보존하는 가를 알고 배워야 합니다. 또한 교회라는 단체가 세상의 여타 단체와 어떻게 다른 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알다시피 교회란 사람이 모이는 곳입니다. 세상의 여러 단체들, 예를 들어 동창회도 있고 계모임도 있고 로타리 클럽도 있고 합니다. 모두 사람들이 모입니다. 그런데 교회와 세상의 단체들은 틀립니다. 왜 틀린가? 이것을 오늘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싶으신 것입니다. 만약에 베드로와 요한이 제 구시에 성전에 기도하러 가다가 앉은뱅이를 만났는데, 베드로가 요한에게 이 사람을 도와주자 하고 이따가 동지들과 함께 이 문제에 대해 서로 논의하여 결정하자 하고 회의를 열어 한 달에 그 사람에게 얼마를 주어 구제토록 하자고 결정했다면 아마 교회는 자선단체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의 단체들과 다를 바가 없는 곳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렇게 하지 않고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한 마디로 교회는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에는 영적인 실체가 존재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성령께서 교회를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것이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배후에는 성령이 아니라 사탄의 작용이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하나님이 이 땅에 제일 먼저 만들었던 완벽한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바로 에덴공동체입니다. 그곳에 첫 멤버로 아담과 하와를 두었습니다. 그런데 이 공동체에 죄가 들어옵니다. 아담과 하와를 통해 죄가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이 죄의 배경에는 누가 있습니까? 바로 사탄이 있었습니다.
신약으로 넘어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교회공동체가 탄생합니다. 그런데 이 공동체에 다시 죄가 들어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통해 죄가 들어옵니다. 그런데 이 뒤에 누가 있다는 것입니까? 바로 사탄이 조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사건은 단순히 헌금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공동체를 넘어뜨리려 하는 사탄의 음흉한 궤계가 무엇이며 그런 일에 대해 하나님이 얼마나 즉결처분을 하고 있는 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이야기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에 대해 단순한 시각으로 과소평가하는 것은 결코 온전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에는 반드시 당위성이 담겨 있습니다. 함부로 판단하는 어리석은 일을 범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신중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당신의 교회를 얼마나 아끼시고 사랑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런 하나님에게 온 영과 마음과 힘과 뜻을 다해 영광을 올려드려야 할 것입니다. 아멘.
[출처] 20주차. 아나니아와 삽비라 (아리엘 개혁교회) |작성자 아리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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