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행5;12-16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무리더라.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라고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밀려들더라. 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주증이 즉시 그쳤더라”(눅8:42하~44)
1. 초유의 사태
초대교회 안에 예기치 못한 불행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자신의 재산을 팔아 헌금을 드리려다가 교회를 속이고 일부만 드리려다가 세 시간 간격으로 죽어나가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초대 교회와 이 사건을 목격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큰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지난주에 살폈던 11절을 다시 봅니다.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 하니라”
이 두려움은 하나님을 향한 것입니다. 누가는 여기서 이 두려움이 일반적인 두려움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매우 특별한 단어를 채택합니다. 바로 ‘포보스’라는 단어입니다. ‘포보스’는 그리스 신 아포르디테가 자신의 정부에게서 낳은 아들입니다. 그런데 이 포보스 신화에 얽힌 이름의 의미는 ‘전쟁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누가는 지금 이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이 단어를 사용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사람들이 교회에 일어난 사건 하나로 인해 두려움에 떨게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지는 전쟁을 겪은 사람만이 압니다. 전쟁은 가장 참혹한 상황입니다. 전쟁은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앗아갑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이 전쟁을 우습게 알지만 그것은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까불대는 것과 같습니다. 저도 전쟁을 겪은 세대가 아닙니다. 제가 청춘시절에 잠시 피치 못할 사정으로 강원도 파로호에서 지낼 때 물속으로 잠수했다가 그 깊은 물속이 주는 공포를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정말 창세기 1장 2절에 있는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의 상태였습니다. 얼마나 놀랐는지 그 뒤 몇 번이나 꿈속에서 저는 땀을 흘려야 했습니다. 아마 그것이 ‘포보스’의 두려움일 것이라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성경에 있는 이 두려움은 세상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을 감히 쳐다보지 못할 경외심에서 비롯된 두려움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와 성도들의 문제가 어디에 있습니까? 과연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갑니까? 과연 우리는 우리 자녀들을 경건한 자녀로 잘 키우고 있습니까? 혹시 자녀들의 기를 살린답시고 무조건 봐 주고 그것이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얼마 전 이런 뉴스를 보았습니다. 범죄를 저지르고 붙잡힌 청소년들에게 기자가 ‘왜 그랬느냐?“고 묻자 한 청소년이 ”제가 공부도 안 하고 학교에도 안 가고 집에도 들어가지 않아도 아무도 저를 야단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누구 탓입니까? 자유와 방종을 구분하지 못한 부모의 책임이지 않습니까? 지금 한국사회는 왜곡된 진보자유주의자들의 손에 의해 개인의 ’무한 자유‘와 ’인권‘이 대세를 이루며 모든 것이 용납하는 방종의 시대가 만들어졌습니다. 가정에서부터 회초리가 사라지자 사회는 겉잡을 수 없는 무한방종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누구도 국가의 법과 공권력에 복종하는 사람이 없이 조금만 자기에게 불이익을 주면 득달같이 항거하고 데모합니다. 이런 사회, 이런 세상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이 ’무한 책임‘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각자의 가정에서 하나님의 훈육을 실시하지 못한 결과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라 믿고 회개해야 합니다. 세상은 교회를 닮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경건하면 세상도 어느 정도 경건해집니다. 그러나 교회가 타락하면 세상도 덩달아 타락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빛이요 소금인데 빛이 위력을 잃고 소금이 제 맛을 잃어버린다면 무엇으로 세상을 밝게 하고 세상의 부패를 방지할 있습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사건을 통해 우리는 교회라는 존재의 본질이 무엇인지 늘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두려움을 가진 공동체여야 합니다. 그래야 감히 하나님을 향해 대적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나아가 교회는 세상을 향해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을 섬길 때 세상이 교회의 권위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이번에 일어난 세월호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모두가 대통령을 욕하고 정부를 불신하고 남의 탓을 할 때 오직 그리스도인들은 세월호 사건의 주범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교회의 부흥과 조국의 발전이 뒤따를 것입니다.
2. 사건 이후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이런 사건이 발생했음에도 초대교회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더욱 부흥을 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기사는 바로 이 사실을 명백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12절 전반부를 봅니다.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전에도 설명했듯이 교회가 행하는 표적과 기사의 목적은 믿음이 목적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게 하기 위해 표적과 기사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표적’의 헬라어 단어가 무엇이냐 하면 ‘토큰’(token)입니다. 요즘에는 버스를 탈 때 교통 카드를 사용하지만 옛날에는 토큰을 사용했습니다. 한 마디로 버스를 탔을 때 요금을 냈다는 증거물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오늘 표적이라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는데 달리 말하면 표적을 나타낸 것은 하나님의 일을 증거하는 징표라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표적과 기사는 하나의 경고이기도 합니다. 마치 절벽 낭떠러지 앞에 위험 경고판이 서 있으면 사람들이 더 이상 가지 않아야 된다는 주의를 받는 것처럼 하나님의 표적과기사가 나타날 때엔 즉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한다는 뜻이 담겨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만약 이 경고를 무시하고 절벽 아래로 달려가면 그는 목숨을 잃게 될 것입니다. 경고판은 그냥 겁주려고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를 무시하고 질주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만 표적과 기사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를 통해서도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을 사도들도 그대로 전수받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베드로를 비롯한 열 두 사도들의 권위와 능력은 뒤에 바울에게 그대로 전수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권위와 전통의 승계입니다.
15-16절에서는 베드로의 치유 사역이 소개됩니다. 15절에 보니 심지어 사람들은 집에서 기다리는 수준이 아니라 베드로의 그림자라도 맛보기 위해 아예 베드로 사도가 지나가는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병이 나을 것이라고 믿었던 여인의 믿음과 예수님의 권위를 생각나게 합니다. 눅8:42하~44가지를 봅니다.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밀려들더라. 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주증이 즉시 그쳤더라”
얼마나 간절한 모습입니까? 하나님은 바로 이런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마음에 간절한 기도가 있으면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대충 건승으로 하는 간구는 응답을 이끌어내지 못합니다. 만사가 같은 이치입니다. 무엇이든지 열심을 다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여기서 잠깐 ‘그림자에 덮이다’에 사용된 동사는 ‘에피스키아제인’인데 누가복음에서 두 번 사용(눅1;35, 9:34)되는 단어로 ‘하나님의 임재가 덮이는 상황’을 묘사합니다. 누가는 지금 독자들에게 베드로에 의해 일어나는 표적과 기사가 하나님에 의해 발생하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3. 세 부류의 반응들
아무튼 초대교회는 1차적 핍박을 딛고 일어서고 있습니다. 이런 교회의 일에 대해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두려운 눈으로 바라봅니다. 그런데 사도들을 통해 하나님의 일이 눈앞에 드러나자 사람들의 반응이 제각각입니다. 오늘 본문의 기사에는 세 부류로 나누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믿는 사람들의 부류입니다. 14절을 보니, “믿고 주게로 나오는 자가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복음을 듣고 보고 믿은 무리가 이렇게 많이 생겨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나아가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깨닫고 마음을 돌이키고 더욱 하나가 됩니다. 이제 갓 태어난 초대교회의 환경이 그리 녹녹하지가 않습니다. 내부적으로 아나니아 사건으로 인해 어수선하고 외부적으로는 여전히 유대 지도자들, 예루살렘의 기득권을 손에 쥐고 있는 대제사장을 비롯한 산헤드린 공회원들, 장로들에 의한 위협이 상존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믿음의 사람들은 더욱 열심히 복음에 순종하고 마음을 하나로 하여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누가 진짜인지 알아보려면 결정적일 때 그 사람이 어떤 결정을 하고 반응을 하는가 보면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 열매로 그들을 안다’고 했습니다.
둘째, 복음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감을 가지는 부류입니다. 13절 앞 부분입니다.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이들은 그리스도인들과 상종도 하지 않으려 합니다. 지금도 이런 부류가 존재합니다. 이들은 노골적으로 기독교를 ‘개독교’라 부릅니다. 안티기독교운동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처럼 기독교에 대해 악의적인 언행을 서슴지 않습니다. 대개 이런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해 이해하거나 어떤 정확한 지식을 습득조차 하지 않으려고 이미 작정을 하고 덤비는 부류입니다. 솔직히 이런 사람들은 악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악인의 멸망을 기뻐하거나 조롱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도 처음엔 그리스도인을 멸시하고 핍박하던 자였습니다. 아무리 악인이라 해도 우리는 오직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의무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 맡겨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원수 악인, 핍박하는 자를 위해 주님의 가르침처럼 그들을 위해 중보 기도해야 합니다.
셋째, 자기 유익을 위해 복음을 이용하는 부류입니다. 이들은 적극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에 대해 은근히 찬동의 표시를 합니다. 13절 하반부에 “백성이 칭송하더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칭송은 사도들이 자기들의 아픈 곳을 고쳐 주기 때문에 하난 일종의 립 서비스입니다. 이들은 언제라도 교회가 자기에게 유익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면 즉시로 칭송을 멈추는 부류입니다. 어떨 때는 차라리 앞에서 욕하고 침을 뱉는 악인들보다 이들이 더 미워 보일 때가 있습니다. 결정적일 때 이들은 대개 등을 돌립니다. 그럼에도 지금 사도들이 병을 고쳐준다고 하자 구름떼같이 몰려듭니다. 15절을 보세요. 병든 사람을 메고 옵니다. 심지어 침대와 요에 누인 채로 옵니다. 예수님 당시에 지붕을 뚫고 병자를 방 안으로 내린 사례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입니다. 이들의 목적은 오로지 병을 고침 받는 것입니다. 그들이 믿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런 것에 아랑곳 하지 않고 병을 고치는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작은 학원 하나 운영하는 일에도 이런 사례들을 수없이 경험합니다. 그러나 선을 행하다가 결코 낙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달려가야 합니다. 우리 눈앞에는 오직 푯대만 보여야 합니다. 곁눈질 하지 않고 믿음의 경주를 해야 합니다.
4. 결론
요즘 세월호 사건으로 많은 국민들이 상심에 젖어 있습니다. 나라 안팎으로 참 중요한 시절인데 세월호에 발목이 묶여 대한민국호가 휘청거립니다. 국민들은 다시 한 번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상태에 대해 실망하고 분노합니다. 이 국가가 얼마나 시스템이 허술한 지 사건이 터질 때마다 알게 됩니다. 그럴 대마다 우리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 의 땜질처방으로 일관해왔습니다. 알다시피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안팎으로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요, 핵으로 무장한 채 아직도 무력 침공을 포기하지 않는 적을 두고 있는 초유의 위험천만한 국가입니다.
오늘 초대교회의 신자들도 이런 위기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교회가 무너지지 않고 우리의 조국이 무너지지 않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조국 대한민국을 풍전등화 앞에서 건지시고 지켜 주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왜 이런 엉망진창인 대한민국을 지켜주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 땅에 여전히 기도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보시기에 믿는 사람들이 없다면 소돔과 고모라처럼 하나님은 즉시로 대하민국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긍심과 함께 책임감을 가지고 조국을 위해 더욱 기도하고 봉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출처] 21주차. 복음과 세 부류 (아리엘 개혁교회) |작성자 아리엘
23주차. 그리스도인이라는 것 (0) | 2014.06.25 |
---|---|
22주차. 하나님의 일은 멈추지 않는다 (0) | 2014.06.23 |
20주차. 아나니아와 삽비라 (0) | 2014.06.11 |
19주차. 영적인 가족 (0) | 2014.05.25 |
18주차. 미쳐야 산다 (0) | 2014.05.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