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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주차. 하나님의 일은 멈추지 않는다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4. 6. 23. 23:42

본문

 

22주차. 하나님의 일은 멈추지 않는다

 

 

 

본문: 5;17-26

대세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가로되,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저희가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와서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사람을 옥에 보내어 사도들을 잡아 오라 하니, 관속들이 가서 옥에서 사도들을 보지 못하고 돌아와 말하여, 가로되 우리가 보니 옥은 든든하게 잠기고 지킨 사람들이 문에 섰으되 문을 열고 본즉 그 안에는 한 사람도 없더이다 하니, 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 의혹하여 이 일이 어찌 될까 하더니, 사람이 와서 고하되 보소서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더이다 하니, 성전 맡은 자가 관속들과 같이 가서 저희를 잡아 왔으나 강제로 못함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함이러라

 

 

1. 2차 투옥

 

 

 

오늘의 사건은 사도들이 두 번째로 투옥되는 장면입니다.

 

첫째, 누가 사도들을 체포합니까?

- 17절 앞부분을 보면 그 실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하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입니다. 정리하면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동시에 사도들을 체포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것은 이 두 당파는 평소에 철천지원수관계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바리새파는 보수쪽이고 사두개파는 진보쪽입니다. 이 둘은 교리도 다르고 신앙생활의 패턴도 다릅니다. 바리새파는 사두개파를 입만 살아있는 식자층이라 모독하고 사두개파는 바리새파를 두고 법과 원칙의 울타리 안에 갇혀 사는 수구 골통이라 여겼습니다. 교리적으로도 사두개파는 부활과 천사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공부깨나 했다고 하는 이들은 늘 대명천지에 부활이 가당키나 한 일이고, 무슨 천사가 있다고 헛소리를 하느냐고 바리새파를 공격했습니다.

- 그런데 지금 전혀 함께 할 수 없는 이 두 부류가 의기투합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에도 뜻을 함께 모았습니다. 참 신기한 일입니다. 평소에는 그렇게 으르렁거리던 두 파의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같은 위기가 닥쳤다고 판단하는 일에는 어김없이 하나가 됩니다. 저는 WCC 부산총회를 지며 보면서 악인들은 항상 진리를 반대하는 일에는 하나가 되는 생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깨달았습니다.

 

 

 

둘째, 무엇 때문에 사도들을 다시 체포합니까?

- 오늘 본문은 시기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시기라는 말은 헬라어로 젤로스라고 하는데 이 말에서 영어 jealous가 유래했습니다. 국어사전에는 남이 잘 되는 것을 샘하여 미워하다라고 풀이되어 있습니다. 참고적으로 비슷한 의미로 질투가 있는데 이것은 경쟁자를 대상으로 그가 가진 것을 부러워하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시샘으로 풀이합니다. , 시기가 공동체 전체 안에서 일어나는 심리현상이라면 질투는 개인을 대상으로 일어나는 것이 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시기는 경제적인 이유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면 질투는 주로 애정관계에서 일어나는 것이 다릅니다. 결론적으로 시기질투는 미움이라는 뿌리에서 생겨난 타락한 심리적 현상임은 틀림없습니다.

-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좀 더 면밀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은 사도들을 잡아들인 이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단순히 사도들을 미워하는 이유 하나로 그랬을까요? 그보다는 좀 더 심층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이유는 사실 명분입니다. 실제 속에 감추어진 이유는 따로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지금 이들 기득권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이 도전받는 위기감을 느낀 것입니다. 자신들이 통치하는 세계에 제 3의 강력한 복음의 세력이 밀쳐 들어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교권을 위협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또 실리와 이득이라는 밥그릇문제도 깔려 있습니다. 이것이 사도들을 체포한 진자 이유입니다.

- 기득권자들은 지금까지 백성들을 자기들이 지도하고 가르쳐 왔습니다. 백성들로부터 자신들이 존경받고 선생으로 대접받아왔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주는 모든 경제적 후원 또는 헌납을 통해 풍요로운 삶을 구가해 왔습니다. 나라가 로마에 통치를 받던 받지 않던 이들은 여전히 좋은 인생을 누리고 삽니다. 일제시대에도 이런 친일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라는 빼앗겼어도 그들의 풍요로운 삶은 빼앗기지 않았던 자들이었습니다.

-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의 영역에 도전해 온 베드로와 요한 사도 두 사람을 1차로 투옥하고 다시는 예수 이름으로 백성들을 가르치지 말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가르침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날마다 성전에 모여 이들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개종을 하는 사태가 연일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베드로와 요한 두 사람이 주동이었지만 이제는 거의 모든 사도들이 합세한 것 같습니다. 1차 투옥 때에는 베드로와 요한 두 사도만 체포되었는데 18절에 사도들이라고 복수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니 모든 사도들을 다 잡아 들인 것 같습니다. 그만큼 이들이 가지고 있는 위기감이 최고조에 달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 그럼에도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등 종교지도자들은 여러 명을 한꺼번에 잡아들이면서 어떤 죄목이나 해명도 내놓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가는 비웃기라도 하듯이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라고 체포명분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누가 보아도 웃기는 체포명분입니다. 누가는 이들 지도자들의 속내를 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속으로 자신들의 밥그릇이 빼앗길까봐 체포를 하긴 했지만 이런 명분을 밖으로 떳떳하게 밝히지 못하는 것입니다. 겉 다르고 속 다른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율배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굉장히 무서운 말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숨길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 여기서 잠깐 우리는 권력의 속성에 대해 알아보기로 합니다. 세상의 권력은 말할 것 없고 교회 안에도 얼마든지 이런 권력 투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가 발전해 오면서 여러 교파가 생겼습니다. 처음엔 하나였다가 동방과 서방교회로 나뉘고, 그 뒤에 서방교회는 죵교개혁으로 카톨릭과 개신교로 나뉘고, 개신교는 여러 대륙과 국가로 전파되면서 다양한 교파를 형성했습니다. 우리는 장로교이지만 우리 이외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등이 있습니다. 이것을 교파라고 합니다. 다시 각 교파 안에는 다양한 교단들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한국 장로교 안에는 약 200여개의 크고 작은 교단들이 있다고 합니다. 고려, 합동, 대신, 합신, 통합, 보수 등이 이런 교단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교단들을 형성하고 운영하기 위해선 최상위의 지도기관이 필요합니다. 처음에는 이들 지도부의 사람들도 나름대로 선한 목적과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세월이 흐르면서 자꾸 권력이 되는 겁니다. 주변에 사람이 모이고, 무슨 일을 하려면 지도부의 승인을 받아야 하니까 빨리 해결하기 위해 뒷돈을 주고 하다 보니 돈맛이 든 겁니다. 돈이 모이고, 힘이 모이고 글다 보니 고개가 벗뻣해지고 권세를 행사하는 겁니다. 처음에는 각 교회를 섬기고 교회의 필요를 돕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그들이 이제는 오히려 교회를 지배하고 군림하고 명령하는 위치가 된 겁니다. 오늘 우리가 보는 산헤드린공회라는 최고 권력기관이 이와 같은 곳입니다. 이들도 처음에는 이스라엘 백성을 섬기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자 어느새 이들은 기득권이라는 안락한 자리에 앉아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맛에 취하자 자기들의 자리를 위협하는 일에 지금처럼 강경대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부 밥그릇 싸움입니다. 한국교회에도 이런 광경을 자주 목격합니다. 한 마디로 자리와 명예때문에 일어나는 아전투구입니다. 과연 하나님이 이런 잘못된 지도자를 어떻게 벌한다고 하였습니까? 말라기를 봅니다.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서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라.”(3:13-15)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4:1)

 

 

 

셋째, 체포된 사도들이 간 곳이 어디입니까?

- 그곳은 바로 성전 안에 마련된 감옥입니다. 이곳은 당시 온갖 잡범들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거룩한 성전에 감옥을 설치하고 운영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 일입니까? 왜 이런 감옥이 필요합니까?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들은 어느새 권력자가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바로 이들뿐입니다. 모든 백성들은 이들이 권력자임을 다 압니다. 한 번 권력을 손에 쥐면 놓기 힘듭니다. 권력에는 반드시 저항이 따릅니다. 그러면 권력자들은 자기도 모르게 독재자가 됩니다. 반대자들을 투옥시키고 벌을 줍니다. 이것은 하나의 본보기입니다. 자기들 말을 듣지 않으면 좋을 게 없다는 하나의 경고입니다.

- 그런데 이 감옥에 지금 사도들이 잡혀간 것입니다. 실제로는 사도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아무런 죄 없이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 들어가야 할 곳임에도 거꾸로 죄 없는 사도들이 투옥되었습니다.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자들은 좋은 침상에서 잠을 자고 예수님 부활을 알리며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은 감옥에서 잡니다. 참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이런 일들이 오늘날에는 일어나지 않으라는 법이 어디 잇습니까? 감옥이라는 형태는 달라도 지금도 권력자들은 자기들이 만든 법과 전통, 어떤 규례들을 이용하여 복음의 진리를 옭아매고 숨도 쉬지 못하게 하는 일들이 교회 안에서 얼마든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교회와 총회의 이름으로, 어떤 대표기관의 이름으로 생명의 복음전파와 그 위대한 사역의 발걸음들을 구속하고 있지 않는지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이 하시는 일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억울하게도 지금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권력자들이 이들의 입을 막아 백성들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복음, 진리의 말씀을 틀어막고 자기들의 자리와 명예를 지키겠다는 이 타락한 인간군상의 속내를 목격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이 단순한 생각은 큰 착각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막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잠시도 중단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도 오늘도 내일도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잠시도 쉬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비록 일곱째 날에 안식했지만 그것도 우리를 위해 안식일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안식일을 주시고 희년을 주신 것입니다.

 

- 하나님은 지금 사도들을 통해 당신의 일을 하셔야 했습니다. 사도들을 자유롭게 하여 당신의 말씀을 온 세상에 전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감옥에 갇힌 사도들을 위해 특별한 일을 해야 했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주의 사자를 보내 옥문을 열고 끌어내었습니다. 여기서 주의 사자라 함은 천사를 일컫습니다. 어떤 성경에는 메신저라고 되어 있는데 천사들이 주로 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일을 맡았기에 이르는 말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재미있으신 것은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사두개파는 천사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보란 듯이 지금 감옥으로 천사를 보낸 것입니다. 한 마디로 사두개파들의 얼굴을 납작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 이 부분에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하신 것은 단지 사도들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사도들 입장에서 보면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이겠지요. 하나님은 하나님이 택한 자녀들에게 환란이 임한다든지 고난 가운데 처할 때 반드시 구원해 주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그런 1차원적인 구원의 은혜를 베풀기 위해 천사를 동원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사도들이 감옥에 갇힌 것을 구원해 주기 위해 천사를 보낸 것이라면 사전에 사도들이 부르짖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간청도 없었는데 하나님이 먼저 나서서 사도들을 끌어내신 것입니다. 정리하면 사도들보다도 하나님이 필요해서 이런 기적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하시기 위해 지금 사도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 중요하고 급했으면 하나님이 직접 나서 사도들을 감옥에서 끌어낸 것이겠습니까? 이 부분에서 여러 성경과 주석들은 사도들이 탈옥한 것으로 표현하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이것은 탈옥이 아닙니다. 지금 사도들은 하나님에 의해 출옥한 것입니다. 사도들은 하나님에게 자신들을 풀어 달라고 기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받는 핍박을 오히려 영광스럽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를 필요로 하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일에 쓰임을 받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인정하는 사역자들을 통해 하나님나라의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만약 당신이 주를 믿는다 하면서 하나님에게 쓰임 받지 않는 사람이라면 당신은 지금 당신의 구원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 아무튼 하나님이 사도들을 자유롭게 하신 다음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20절에 있습니다.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었습니다. 바로 이 생명의 말씀을 백성에게 전하기 위해 사도들을 감옥에서 끌어낸 것입니다. 단순히 사도들이 당한 고난을 해결해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렇게 하나님은 쉬지 않고 일하시기 위해 사도들을 하나의 방편으로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지키시고 함께 하시고 돌보시는 궁극적이 이유는 하나님의 일이 방해받지 않을뿐더러,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이 하시려고 우리를 도우시고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 우리가 하나님 앞에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기 때마다 구해 주시고 하는 이유가 단순히 우리를 편안하게 하고 행복하게 하기 위해 돌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사도들을 출옥시킨 목적이 있습니다. 21절을 봅니다. “그들이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25절에서도 사람이 와서 알리되 보소서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더이다 하니했습니다. 이들이 뭘 하고 있었습니까? 새벽부터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 여기서 잠깐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어떻게 새벽부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 수 있는 것입니까? 그 개에도 새벽기도회라도 한 것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유대 지방의 날씨를 알아야 합니다. 유대지방은 날씨가 더운 지역입니다. 그래서 한낮의 더위를 피해서 이른 아침 새벽 시간부터 성전에 나와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때를 골라 사도들을 출옥시킨 다음 사람들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 이렇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하나님이 하시고자 할 때엔 누구도 막을 자가 없습니다. 세상 어떤 권력도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지금 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악랄한 기독교 박해국가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하교회에서 숨을 죽여 가며 기도하는 성도들이 남아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20만 명에 달하는 우리 형제자매들이 목숨을 걸고 신앙의 절개를 지키고 있습니다. 발각되면 바로 사형을 당하는 이 참혹한 현실 속에서도 이들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누구보다 하나님은 이들을 사랑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북한의 성도들을 통해 하나님은 분명히 하시고자 하는 목적이 따로 있을 것입니다. 저는 남쪽의 성도들이 먼저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의 신앙이 과연 참 신앙인가를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죽음을 무릅쓰지 못하는 신앙이 과연 기독교 신앙인가를 되물어 보아야 합니다. 혹자는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함에 있어서 한 순간도 핍박이 없었던 시대가 있었습니까? 어떤 시대에는 순교가 필요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시대가 기독교 역사에 존재한 적이 있었습니까? 순교가 없었던 시대는 없었습니다. 순교가 없다면 신앙이 죽었다는 말입니다. 1949년부터 약 10년간 중국에는 모택동이 문화혁명이라는 명목으로 모든 교회를 다 몰아내었습니다. 그리고 모택동은 이제 중국의기독교는 박물관의 전시실에서나 구경할 수 있게 되었다고 큰소리치며 교회를 없앤 것을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모택동은 크리스찬들을 너무 우습게 여겼습니다. 지금도 중국에는 지하에서 예배를 드리는 신자들이 1억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 하나님의 전능하신 역사는 한 번도 이 세계에서 멈춘 적이 없습니다. 그 역사의 한복판에 성도들을 세우시고 쓰시려고 각자를 다스리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십니다. 때로는 환난도 주시고 좋은 선물도 주십니다. 잘 살게 하시기도 하고 가난하게 하시기도 합니다. 병들게도 하시고 건강을 회복케도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과 불행의 기준을 내가 잘 사느냐 못사느냐로 갖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준으로 볼 때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앉으나 서나 죽으나 사나 절대적인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내 인생이 그분을 위해 쓰여지고 헌신되어지는 것인가?’ 이렇게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누구를 위해, 무엇 때문에 근심하고 염려하는가?’ 하고 묻고 또 물으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인생을 보는 가치의 눈이 달라져야 합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눈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전 생애가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이 복음의 역사, 하나님나라의 일을 위한 삶과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3. 결론

 

 

하나님이 직접 나서시어 일을 하는데도 권력자들은 눈이 멀어 하나님의 일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도들을 다시 잡아 오라고 부하들에게 명령합니다(21). 그런데 옥으로 갔던 부하들이 돌아와 사도들이 옥 안에 없다고 보고합니다. 그러자 이들은 사도들이 내부의 도움을 받아 탈옥을 한 것으로 의문을 가집니다. 24절에서 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 의혹하여 이 일이 어찌될까 하더니했습니다. 만약 자신들의 내부에까지 사도들을 돕는 조력자가 있다면 이것은 보통 큰 일이 아닙니다. 이미 자신들의 중심부까지 깊숙이 예수쟁이들의 세력이 벋쳤다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더욱 긴장하고 핏대를 올렸습니다. 당장에 사도들을 없애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들이 지켜봅니다. 백성들이 무서운 것입니다. 26절 끝 부분을 봅니다.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함이더라여론은 이미 사도들의 편으로 돌아섰습니다. 권력자들처럼 사도들은 돈을 요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표적과 기사를 일으키고 병을 고쳐주고 생명의 말씀을 전하면서 자신들에게 공로를 돌리지 않고 대가를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백성들은 지금 진짜 하나님의 사역자들을 현장에서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역자들을 이렇게 보호하십니다. 어떤 환경에 처한다 해도 하나님은 당신이 작정하시고 계획하신 일을 우리기 위해 당신의 일꾼을 이끌어 가십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구일까요? 돈이 많은 사람입니까? 높은 자리에 올라 권세를 누리는 자입니까? 미모가 배어나 대중들의 스타가 된 자입니까? 노래를 잘해 인기를 끄는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께 인정받고 쓰임을 받는 사람입니다. 이 위대한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인생보다 더 불행한 인생이 없습니다. 제아무리 포도나무가지가 열매를 맺고 싶다 해도 그가 포도나무에 매달려 있지 않으면 불가능하듯이 모든 인간은 하나님에게 붙어 있어야 가치 있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버림받은 가지가 말라 죽듯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은 영원한 형벌로 다스려집니다.

 

 

 

인간의 교만은 지옥을 부정할 때 최고조에 달합니다. 그래서 개혁주의의 선조들은 구원받은 백성일수록 늘 지옥의 불을 생각하며 살라고 충고했습니다. 여러분 모두의 삶에 축복이 함께 하기를 기원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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