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주차. 가말리엘의 교훈
본문: 행5:33-39
“저희가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 하고자 할 새,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율법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400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두라 이사상과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1. 가말리엘은 누군가?
첫째, 바리새인입니다.
- ‘바리새’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perushimm에서 나온 말로 아람어로는 perishyya이고 헬라어로는 parisioi입니다.
- 이들은 의식상 결례를 주의하지 않는 자들과 접촉을 멀리하는 유대 경건주의자들로서 일명 ‘하시딤의 후예들’입니다.
- 이들이 역사에 출현한 것은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4세(주전 175-163)와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하도 괴짜 짓을 하고 가혹하기로 유명해서 ‘미친 개’라는 뜻의 ‘에피파네스’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자입니다. 이 독재자는 유대사회를 지배하면서 그들의 야훼신앙을 지독히 싫어하였습니다. 그래서 주전 167년에 예루살렘성전에서의 제사를 금지하는 칙령을 반포하고 성전대신에 제우스신을 숭배하는 신당을 만들었습니다. 어떤 날에는 성전 안에다 유대인들이 극히 싫어하는 돼지를 풀어 다니게 했다고 합니다. 참 악랄한 왕입니다.
- 이 때 제사장 하스모니안 가문의 막카비우스란 사람이 다섯 아들과 함께 이 미친 왕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고 유대를 독립시킵니다. 이 ‘하스모니안 왕조’는 이후 약 80년간 존속하다가 주전 63년 로마제국이 예루살렘을 정복할 때 멸망합니다. 그러나 이 왕조는 강압적인 통치로 민심의 지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독립운동 당시 하스모니안 왕조를 지지했던 하시딤을 비롯한 일부 경건한 유대인들은 시망하고 지지를 철회하고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기 시작했는데 이들이 유대사회의 바리새파의 축이 되었습니다. 이후 바리새파는 여왕 살로메 시절(주전76-67)을 제외한 전 국왕의 통치에 반대하고 비주류로 존속했습니다.
- 독립왕조가 멸망한 뒤로 헤롯왕가와 빌라도 총독의 통치가 이어졌습니다. 이때 유대사회는 하나의 자치기구인 산헤드린공회를 구성하여 운영했는데, 바리새파는 사두개파(Saducees)와 서기관그룹(Scribes)과 함께 이 공회의 구성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항상 공회 안에서도 사두개파에 비해 세력이 약하여 소위 야당의 입장에 섰습니다. 그러나 많은 서기관들을 배출한 바리새파는 비록 실권은 없었으나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종교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가말리엘은 바리새파의 일원으로서 비록 정치적인 권력자는 아니었으나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던 위치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둘째, 율법교사로 힐렐학파의 사람입니다.
- 율법교사들은 서기관으로서 산헤드린공회원으로서 율법을 연구하는 일을 전담했지만 또 백성들에게 율법을 부지런히 가르치는 일을 성직으로 알고 담당했습니다. 유대 지역 어느 곳을 가더라도 작은 회당에서 율법교사들에 의한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그만큼 유대사회에 있어서 율법교사들의 역할이 지대했습니다.
- 신약시대에 접어들면서 율법교사들은 두 개의 큰 학파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샴마이이고 하나는 힐렐학파입니다. 전자는 율법해석에 있어서 매우 엄격한 보수파였고 후자는 샴마이에 비해 진보적인 입장에서 율법해석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를 취한 학파입니다. 원래 이 두 학파는 샴마이와 힐렐이라는 뛰어난 두 랍비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은 성전 멸망 후 쓰러져 가던 유대사회의 민족혼을 일깨우고 유대종교를 보존하고 계승하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이 두 사람의 후예들이 훗날 각각의 문파를 이루었는데 그중에서 율법의 심층적 연구와 학문적 발달에 기여한 학파는 힐렐파입니다. 가말리엘은 바로 이 위대한 랍비 힐렐의 직계손자입니다. 그래서 백성들로부터 귀한 대접을 받은 사람입니다.
- 힐렐과 샴마이학파에 대한 탈무드의 한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한 이방인이 샴마이학파의 한 사람에게 찾아와 자기가 한 쪽 발을 들고 서 있는 동안에 율법을 요약하여 설명해 준다면 유대교를 믿고 개종하겠다고 했습니다. 이에 샴마이 사람은 화를 내며 쫓아버렸다고 합니다. 이대 힐렐의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무엇이든지 자기가 싫어하는 것은 이웃에게도 행하지 말라. 이것이 율법의 전부다. 나머지는 주석이다. 이제 가서 배우도록 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은 과연 이 두 학파를 어떻게 대했을까요?
➀ 예수님 당시에는 샴마이학파가 대세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샴마이학파의 가르침보다는 힐렐학파와 비슷한 가르침을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마7:12 같은 구절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➁ 그러나 이혼문제에 있어서는 이혼에 대한 자유로운 입장이었던 힐렐학파의 주장을 반대했습니다.
➂ 반면에 두 학파가 견지한 소위 ‘장로들의 전통’ 즉, 구전법(Orallaw)에 대해선 예수님은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했습니다. 전통에 따라 박하와 회황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는 행위 등 율법의 형식을 버리고 자비와 정의 등 율법의 내용을 더 중시했습니다. 또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하는 것,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 것(신랑과 함께 있을 때는 슬퍼하지 않고 기뻐하라), 안식일에 이삭을 자른 행위(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 등으로 유대교의 잘못된 전통을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셋째, 라반으로 불리던 사람이었습니다.
- 유대사회에서 존경하는 선생을 일러 ‘랍비’(Labbi)라 부릅니다. 랍비는 ‘나의 선생’이라는 뜻인데 다른 말로 ‘라보니’(Rabboni)라고도 합니다. 처음에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이렇게 불렀습니다. 이 용어는 1세기에 이르러 보편화되었는데 이후 유대교의 지도자제도로 정착되었습니다. 랍비가 될 사람은 우선 구약성경과 탈무드에 대한 연구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러나 시대가 발전할수록 랍비교육과정에는 다양하고 총체적인 지도력 배양을 위한 과목들이 포함되어졌습니다. 일번적인 기능과 역할은 종교행사와 각종 의식을 주재합니다. 나아가 지역사회의 구심점으로서 다양한 구제와 봉사활동을 관여하고 여러 형태의 공동체 사업을 지원하기도 합니다. 14세기 이후부터 랍비에게도 봉급을 지급하고 있다고 합니다.
- 그런데 이들 랍비 중에서도 최고의 랍비, 즉 가장 존경하는 랍비에게는 다른 호칭이 부여됩니다. 바로 그 이름이 ‘라반’(Rabban)인데 뜻은 ‘우리 선생님’으로 백성들 모두에게 존경받는 이를 가리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힐렐학파를 계승한 랍비 중에 뛰어나고 존경받는 인물에 대한 아람어 경칭으로 평범한 랍비 명칭과 구별하기 위해 사용한 명칭입니다. 그런데 가말리엘이 바로 이 ‘라반’으로 불리어진 인물이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가말리엘이 백성들로부터 어떤 인물이었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입니다.
2. 본문의 역사성에 대한 논쟁
자유주의자들은 성경의 본문 하나하나를 해부하고 검증하였습니다. 그리고 성경이 마치 오류투성이인 인간의 기록물인 것처럼 결론을 내리고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의 기록이 아니라 훌륭한 도덕교과서 쯤으로 격하시켰습니다. 오늘 본문에 대해서도 자유주의자들은 딴지를 걸고 있습니다. 바로 가말리엘이 언급한 두 개의 사건이 시기적으로 누가가 이것을 기록할 당시와 맞지 않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첫째, 드다 사건입니다.
- 유대인 출신의 역사가인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에 따르면 유대 지방군 사령관 파두스 장군(주후44-46) 시절에 드다라는 한 마술사기 있었는데 그는 백성들에게 ‘내가 명하면 강물이 둘로 나누어지고 사람들이 마른 땅을 건너갈 것’이라고 선동했다고 합니다. 이에 백성들은 드다가 자신들이 기다리던 메시아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요단강으로 몰려갔다고 합니다. 이에 파두스 장군이 기병을 보내어 무리를 진압하고 주동자인 드다의 목을 잘라 예루사렘으로 가져왔다는 사건입니다.
- 이에 자유주의자들은 누가가 이 사도행전을 기록할 시기는 드다사건이 일어나기 이전이므로 누가가 요세푸스의 기록을 잘못 이해하고 이 부분에 삽입한 것이라며 성경의 오류를 지적했던 것입니다.
-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억지요, 억측에 불과합니다. 먼저 당시 드다라는 이름은 유대사회에 우리나라 김씨, 이씨처럼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가말리엘이 언급한 드다라는 이름이 꼭 반란을 일으켰던 그 드다라는 증거가 없습니다. 또 당시 유대사회에선 하루가 멀다 하고 반란 또는 저항운동이 일어났는데 한 사람의 드다라는 인물만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은 매우 편협한 생각에 불과합니다. 또 누가가 요세푸스 사건을 잘못 읽고 오해하여 기록한 것이라는 주장 또한 누가가 요세푸스의 기록물을 읽었다는 근거도 없이 주장하는 것입니다.
둘째, 갈릴리인 유다의 사건입니다.
-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주후 6년 로마는 세금징수를 위해 총인구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이때 갈릴리 가말라지역(구약의 골란) 출신의 유다라는 인물이 ‘오직 야훼만이 이스라엘의 진정한 임금이시오, 따라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큰 반역이다’라고 주장하며 반란을 주도했습니다. 그는 로마군에 의해 체포되어 참수되었지만 그의 이 저항정신은 열심당(Zerrotes)으로 계승되어졌습니다. 알다시피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시몬이 이 열심당 출신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자유주의 성경해석자들은 성경의 사건들 중 과학적으로 증명하기 힘든 초자연적인 역사이거나 정확한 역사적 근거가 희박한 것은 성경의 오류라고 주장합니다. 나아가 그들은 고고학적으로도 유물 유적이나 문헌적 근거가 없는 성경상의 지명들도 소설적으로 지어낸 이름들일 수 있다며 불신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불신했던 출애굽 당시 여정을 다라 기록된 여리고성을 비롯한 여러 도시들이 속속 발견되고 있고, 아브라함의 고향인 메소포타미아의 갈대아 우르와 여러 구약성경의 도시들이 고고학자들의 발굴에 의해 하나씩 그 베일을 벗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부정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어리석은 행위와 진배 없습니다.
3. 가말리엘의 교훈
첫째, 가말리엘은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자였습니다.
- 34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교법사로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했습니다. 그는 공회의 공식적인 직함도 없음에도 자리에서 일어나 사도들을 잠시 밖으로 나가라고 명령하고 자기의 의견을 밝힐 수 있었습니다. 공회원 중에 가말리엘이 발언하는 것에 대해 아무도 제지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만큼 가말리엘이 정치적으로도 파워가 있는 인물임을 실증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위력 있는 권력의 힘은 백성들의 지지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보다시피 안철수 의원은 초선임에도 불구하고 지지도가 높으니까 야당의 대표직을 맡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백성의 힘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백성들로부터 이런 존경을 받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자라면서 하나님과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눅2:52)
둘째, 역사적 근거를 제시합니다.
- 요즘 우리 아이들은 입시 또는 취업을 위해 논술을 배웁니다. 논술이란, 한 마디로 말을 조리있게 하도록 하는 논(論)과 글을 논리적인 체계를 가지고 짓도록 하는 술(術)을 말합니다. 생태학적으로 말과 글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말을 잘하는 사람이 글을 잘 씁니다. 반대로 글을 잘 쓰면 말도 조리 있게 잘하게 됩니다. 그런데 말 잘하고 글 잘 쓰는 재주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학습에 의해 얻어지는 능력이라는 것입니다.(물론 목소리는 재능입니다) 그런데 이 둘을 잘하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독서가 필수적입니다. 많은 독서를 통해 인간의 지성이 개발되고 상상력이 확대되고 논리적인 체계가 생겨납니다. 대체적으로 말을 조리 있게 못하는 사람은 그만큼 책을 읽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이 논술의 가장 기본적인 체계가 ‘서론-본론-결론’이라는 구조입니다. 이 3단 논법이 아리스토텔레스 등 그리스의 스토아학파들이 개발한 논법입니다. 이 체계가 인간이 가장 이해하기 쉬운 사고의 시스템이라는 것이 과학적으로도 밝혀졌습니다. 여기에 이야기식 진술 즉, 나레이션 기법으로 계발된 것이 바로 희극 즉, 드라마의 구성법인 ‘기-승-전-결’이라는 구조입니다. 저는 이미 바이블시네마를 통해 이 구조에 다른 성경읽기를 제시한 바 있습니다.
- 그런데 이런 논술적인 구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어떤 주장을 할 때 반드시 그 근거를 제시하는 일입니다. 근거 없는 주장은 허위요 모순이 됩니다. 그러므로 논술교육은 아이들에게 근거있는 자기 장, 즉 합리적인 자기주장을 펼치게 함으로써 억지와 모순으로부터 탈출을 선물합니다.
- 가말리엘도 지금 최고지도자로서 자기주장을 하기에 앞서 역사적인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우리는 이런 자기발표를 배워야 합니다. 그런 아리엘교회의 독서토론의 장이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 공회의 분란을 중재합니다.
- 얼핏 보기에 가말리엘의 발언은 자기주장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속내를 들여다보면 가말리엘은 지금 두 당파, 즉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의 날카로운 대립을 중재하고 있음을 눈치 챌 수 있습니다. 가말리엘은 지금 두 당파 사이에서 중용적인 입장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비록 두 당파가 종교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중상모략하고(마22:34) 사도들을 핍박하는 일에는 어느 정도 결탁했지만 종교적 입장으로는 전혀 자리를 함께 할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아마도 바리새인들은 사도들에게 율법 상의 전통을 파기하는 모습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내세우는 부활 교리는 바리새인들이 평소에 주장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두개파에게 부활교리는 말도 안 되는 억지 주장일 뿐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의 날카로운 대립을 극복하지 못한 채 사도들을 아무런 이유 없이 형벌을 주는 것은 온당치 못한 것입니다.
- 이때 가말리엘의 지혜가 빛납니다. 지금 가말리엘은 종교상의 전혀 이질적인 문제를 끄집어 내지 않고 역사적인 이유를 들어 사도들에 대한 핍박을 중지할 것을 제안합니다. 만약 종교적인 이유를 들어 자기의 의견을 제안했다면 어느 한 쪽에서 반드시 이의를 제기했을 것입니다. 그만큼 산헤드린공회는 대한민국 국회와 쏙 빼 닮았습니다. 같은 민족임에도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그런 적대감이 있는 두 세력입니다.
- 그 결과, 공회원들은 마지못한 듯 가말리엘의 의견을 인정합니다. 40절 앞부분에 보니 “저희가 옳게 여겨”라고 했습니다. 마치 사움을 하는 두 아이가 말리는 사람이 없으면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끝까지 싸우는 꼴이라 할 만합니다.
넷째, 지혜로운 해결책입니다.
- 38과 39절입니다. “이 사상과 소행이 사람에게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 얼핏 이 주장은 현실 문제를 회피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사실 재판을 하려면 죄에 대한 정확한 실증과 논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공회는 사도들의 죄를 물을만한 법적인 근거가 없었습니다. 성경은 그저 시기가 가득하여 사도들을 잡아 들였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공회는 무죄한 사람들을 체포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공회의 권위와 신뢰는 바닥에 떨어질 것입니다.
- 그런 점에서 지금 가말리엘은 사도들 뿐 아니라 백성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을 뻔한 공회를 구한 것입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공회를 살린 사람이 바로 가말리엘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가말리엘은 역시 랍비다운 지혜있는 해결책을 제시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가말리엘로부터 4가지 좋은 교훈을 얻었습니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결코 녹녹한 인생이 아닙니다. 험악한 세상살이일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로 무장하고 살라야 합니다. 그리고 필요한 경우엔 회피하지 말고 당당하게 나서서 발언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누구도 반박하지 못할 진리의 변증가로 우뚝 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진리의 체계인 교리공부에 힘써야 합니다. 사탄의 최고 먹잇감은 교리 없는 신앙인입니다. 사실 교리 없는 신앙인을 참 신앙인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교리는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지혜의 샘터입니다. 아멘.
[출처] 24주차. 가말리엘의 교훈 (아리엘 개혁교회) |작성자 아리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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