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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언약

박길현목사(대구)

by 김경호 진실 2014. 11. 11.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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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언약  

 새 언약(New covenant)
구약성경에서 새 언약에 대한 조망은 나라로서의 이스라엘이 망하였다가 다시 돌아오게 되는 것과 연관지어지고 있다. 따라서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을 통하여 전개된 계시역사의 흐름의 끝 부분 전체가 새 언약과 관련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요엘,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등이 보여주는 관점이 이 끝 부분과 관련이 있다. 이 관점은 모세가 이미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시해 주었던 것이기도 하다(신4:25-31,30:1-14). 그리고 또 이스라엘의 돌아 옴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실 실체적인 구원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두 가지 구원 사건이 어떻게 연결지어지고 있는가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새 언약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새 언약이라고 하는 말을 예수께서 자기의 사역에 사용하셨기 때문에(눅22:20), 우리는 구약에서 예시하는 새 언약을 예수의 사역과 관련지어서 이해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우리는 구약 계시역사의 흐름의 끝 부분을 보여주는 본문들에서 그리스도 사건을 예시 또는 암시하는 것들을 잘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으며, 또 이것들이 옛 이스라엘이 망했다가 돌아오는 사건과 어떻게 관련이 있는지를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점들을 유의하면서 새 언약을 생각하여 보자.

이사야서 전체는 새 언약의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 된다. 이사야 6장에는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아서 사람들이 멀리 옮기움을 당한 후에 십분의 일이 남게 되어서 그들 역시 불살라짐을 당할 것이지만, 거룩한 씨가 그 땅의 그루터기가 될 것을 예언한다(사6:12-13). 여기 거룩한 씨는 누구인가? 멀리 옮기움을 당하거나, 남아 있는 1/10과 같은 이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들은 결국 죄로 인하여 망할 죄인들이지만 거룩한 씨는 이들과 구별되는 '거룩한' 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룩한 씨는 죄로 인하여 망할 이스라엘과는 다른 종류의 씨라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이 씨는 이스라엘의 죄에 빠지지는 않지만, 이스라엘의 대표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루터기'( tb,C,m;)라는 말은 세운 것을 의미한다. 즉 돌기둥을 세우고, 물이 쌓이도록 세우고, 문이나 집을 세우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하여서 기념이 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것은 기념비석을 의미하기도 한다. 문맥적으로 생각하면, 약속의 땅에 남아 있는 사람이 없어졌기 때문에 그 땅이 이스라엘이 사람들이 살던 땅이라는 흔적이 없는 차에 거룩한 씨가 이스라엘의 흔적을 보여주는 기념비석이 될 것이라는 뜻이다. 이 씨는 홀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비석이기 때문에, 그 씨가 곧 이스라엘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 땅의 그루터기'라고 했으니 이스라엘 백성이 터를 잡고 먹을 것을 거두면서 사는 땅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이사야의 문맥이나 통일성을 생각할 때에 이 씨는 처녀가 잉태하여 낳을 '임마누엘'(7:14)이라고 할 수 있으며, 성소로 오실 여호와 자신이시며(8:14), 고통과 흑암과 멸시와 압제 아래 있던 자들에게 평화를 주실 하나님 같은 한 아기이며(9:1-7), 그 날에 남은 자 이스라엘을 돌아오게 하시며 죄에 빠진 온 세계를 심판하여 파멸시킬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이며(10:20-23; laeÞr"f.yI vAdïq. hw"±hy>)이시며, 이새의 줄기에서 날 여호와의 영이 충만하여 화목과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하게 할 가지이다(11:1-9). 열방도 그에게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11:10). 하지만 이런 일은 열방들과 온 세상이 그의 심판으로 깨어짐으로 이루어질 것이다(13:-24:). 이스라엘도 이런 심판을 받을 것을 볼 때, 여호와의 백성은 이스라엘과 열방에서 여호와께로 돌아온 사람들로 새롭게 이루지는 것이 분명해진다. 여호와는 이들의 왕으로서 그 영광을 나타내실 것이다(24:23). 이들은 새롭게 형성될 세계의 거민이다(26:9,18-19). 땅의 거민들을 심판하심을 통하여 세계 거민을 형성할 것이다. 이스라엘의 포로로 잡힘은 온 땅 심판을 피하는 밀실이다(26:20-21). 그리고 세계 거민을 미혹케 하는 자는 날랜 뱀 기워야단 곧 용인데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실 것이다(27:1). 그 때에 야곱의 뿌리는 견고해질 것이고 이스라엘은 새롭게 열매를 맺을 것이다(27:6,12-13).  이들은 시온에 둔 한 기촛돌에 기초하여서 시온으로 지어질 것이며, 능력의 통치로 인하여 사망의 세력이 서지 못하게 될 것이다(28:16-18). 그날에는 귀머거리가 들으며, 맹인이 볼 것이며, 가난한 자가 즐거워하고, 겸손한 자가 참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29:17-20). 이들을 다스리는 왕은 성령으로 자기 백성을 새롭게 만드시며 의와 공의로 다스려서 화평하게 하실 것이다(32:1-5, 15-18). 광야 같았던 약속의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같이 낙원같이 변하여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살 곳이 될 것이다(35장). 이런 일들이 새 언약적인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겠다.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이 포함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초점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사건을 예시하는 것에 있다.
히스기야를 산헤립의 침공에서 구원하신 일(36:-37:)과 죽을 병에서 구원해 주신 일(38:-39:)은 여호와 하나님의 미래 구속 사역 즉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사역을 선취적으로 계시해 주는 사건이다. 즉 미래에 다윗의 자손이 가져 올 여호와의 속량을 히스기야에게 맛보게 하고 계시해 주고 보증하는 사건이다. 히스기야와 그의 통치 하에 있었던 이스라엘은 산헤립으로부터의 구원과 히스기야의 치료 사실을 통해서 미래에 올 다윗의 자손 메시야의 구원과 치유를 오래 전 자기들의 시대에 경험하게 되었다. 구원의 실체는 먼 미래의 일이지만, 그림자와 같은 구원과 용서 받은 사건들을 통해서 미래의 구원과 사죄를 희미하게나마 맛보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이사야서 후반부(40:-66:)를 이해하는 열쇠가 될 수 있다. 즉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갔다가 고레스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돌아오게 되는 사건과 바벨론에서 이스라엘이 겪었던 수난은 미래에 있을 메시야에 의한 구속을 예시하는 사건들로 이해하게 해 준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이 역사적으로 겪었던 가까운 구원사건과 미래에 올 종말적인 구원사건이 하나의 캔브스에서 그려지고 있음을 이해하게 해 준다. 이스라엘이 겪었던 고난과 구원사건은 미래 메시야의 고난과 구속 사건을 선취적으로 알게 해 주는 경험들이었다. 따라서 바벨론에서 이스라엘을 돌아오게 하시는 사역을 서술하는 언어들은 미래의 메시야의 구속 사역을 서술하는 것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주지하고 이사야 후반부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이제 이런 관점에서 대략적으로 이사야서의 후반부를 살펴 보자.
이스라엘의 죄 사함과 해방되어 돌아오게 하심과 여호와의 목양(40:1-11)은 비교할 수 없이 위대하신 하나님을 증거한다. 그것은 곧 창조사건에 비교된다(40:25-26). 이스라엘은 출애굽 때와 방불한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돌아오게 될 것이다(40:31). 온 세상에서 이렇게 돌아오게 하시는 이가 여호와라는 것을 아브라함의 자손은 깨달아야 한다. 여호와는 아브라함의 자손을 자기의 종으로 삼고 버리지 아니하시고 약속의 땅에 다시 심으실 것이다(41:4,8-9,18-20). 이 일을 위해서 여호와는 북방에서 자기 종 고레스를 일으켜서 이 일을 행하실 것을 말씀하신다(41:25,42:1-9). 당시 아브라함의 자손은 이러한 일을 깨닫지 못하는 맹인이요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와 같다(42:19-19,24,43:8). 그래서 여호와는 자신이 이스라엘을 구속하여 보호하고 인도하여서 건져낼 것임을 강조한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가 창조하여 내실 피조물이다(43:1-7). 피조됨으로 여호와를 증거할 종으로 택함을 받은 자가 이스라엘이다. 고로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어서 마시게 할 것이다(43:19-21). 그리고 하나님의 신으로 충만하게 하실 것을 말씀한다(44:1-5). 그러므로 야곱은 우상을 버리고(9-20), 장차 있을 여호와의 구원과 죄 없이함을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44:21-21-23). 여호와는 창조적 권능으로 고레스로 하여금 이런 일을 하게 하실 것이다(44:21-28,45:1-8). 이스라엘의 여호와는 창조의 능력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루어내시며, 오히려 이방들까지 이스라엘에 귀속되도록 하실 분이다(45:9-25). 여호와 하나님은 바빌론 신들 곧 바벨론을 한 사람 자기의 종 고레스를 통해서(46:1,11) 멸망시키심으로(47장) 이스라엘의 구원(46:13)을 이루겠다고 하신다. 이스라엘이 쇠 같은 목과 놋 같은 이마를 가져서 깨닫지 못하고 완고하기 때문에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여호와는 이 말씀을 하신다(48:1-11).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다시 바벨론에서 나올 것은 확실하다(48:20-21).
따라서 이어지는 맥락에서 '여호와의 종'이라고 불리어지는 이는 '이스라엘'이다(49:1-11). 까닭없이 잡혀가서(52:5) 고난 당한(50:4-9)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종이다. 이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가르침을 받아서 고난을 능히 참고 견디고(49:13,50:4-9), 또 여호와의 인도함을 받아서 바벨론을 떠나(52:11-12) 광야를 통과하여서 돌아와서 높이 들려서 존귀하게 될 것이다. 바벨론에서의 상함도 몰라보도록 컸었지만, 이 후의 영광은 열국이 놀라고 말할 수 없도록 존귀하게 될 것이다(52:13-15). 53장은 종 곧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겪은 고난, 수모, 죽음 같은 과정을 겪을 것과 그것의 의미 곧 선민의 대속을 이룰 것이므로 존귀에 이르게 될 것을 말한다. (물론 이 장은 그리스도의 대속 사건을 정확하게 예시해 주고 있다.) 그 존귀는 과부 같이 되어서 자녀를 얻을 수 없는 상태에서 자식이 많아져서 그 자식이 사방으로 퍼져서 열방까지도 얻게 되는 것(54:1-3)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은 버림을 받았던 아내를 다시 취한 남편 같이 영원히 긍휼을 베푸실 것이라고 한다(54:5-8,9-10). 예루살렘과 그 온 지경은 온갖 보석들로 건설되며, 예루살렘의 대적들이 파멸과 정죄를 당할 것이다(54:11-17). 영원한 긍휼을 입는 것이나 예루살렘이 보석들로 지어지는 상황은 분명히 신약적인 상황을 암시하는 것 같다(계21:9-21). 목마르고 돈 없는 자에 대한 초청과(55:1-2) 이방인이 여호와께 연합하여 이스라엘에 참여하게 하실 것에 대한 말씀(56:3,5,6,8;요17:20-23) 역시 신약적 상황을 암시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암시 역시 쫓겨났던 이스라엘의 돌아옴과 관련지어서 말해지고 있다(56:8).
여기서 한 가지 중요 원리를 확인할 수 있다. 바벨론으로 쫓겨났던 이스라엘이 돌아옴은 신약적인 미래의 구원을 계시해 주고 확인하게 해 주는 예언적인 사건이라는 점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바벨론과 열국에서 돌아오게 하시는 사건으로 미래의 구원을 믿도록 하셨음을 알 수 있다.  

또 하나의 중요 원리가 57-66장에 나온다. 즉 이 부분에서는 미래 구원을 바라보면서 이이사야 당시의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와 죄악을 버리고 겸손하게 회개할 것을 촉구함에 초점이 있는 것 같다. 57장에서 무당의 자식, 간음자와 음녀의 자식이라고 책망하면서 고쳐 줄 것이니 통회하는 마음으로 돌아 서라고 하는 대상(2,15-18)은 이사야 당시에 우상숭배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 된다. 고치시는 일은 이스라엘을 돌아오게 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고 이해하는 것이 옳다(19). 망함으로 우상을 버리게 만든 후에 돌아오게 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고치는 일이 이루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상숭배에 빠져 있다고 책망하는 사람들은 돌아 올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먼 미래에 메시야에 의해서 고침을 받을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여기서 통회하는 마음으로 돌아오라고 하는 대상은 이사야 당시에 죄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이루실 미래의 고침 곧 이스라엘의 회복을 믿고 현재 이스라엘에게 회개할 것을 종용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을 거절하는 악인에게는 희망이 없지만(57:21), 회개하면 미래의 회복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58장에서 말하는 여호와께서 기뻐하는 금식과 안식일 준수하는 것 역시 당시 부패한 이스라엘을 향해서 참으로 여호와를 향해서 돌이킬 것을 촉구하는 것이며, 59:1-8의 죄악에 대한 규탄도 당시 부패한 이스라엘에 대한 규탄이라고 생각 된다. 그리고 자신들의 죄를 직시하고 탄식하는 사람들이 있는데(59:9-15), 이들은 이사야와 같이 이스라엘의 죄로 인하여 탄식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이들은 '우리'라고 지칭되고 있는 사람들이다(59:9,10,11,12,13, 53:1-6, 7:14). 이들이 회개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을 위하여 여호와께서는 친히 중재자와 구속자가 되셔서 원수와 섬들에게 보복하시면서 오셔서 시온을 구속하실 것이라고 한다(59:16-21). 원수와 섬들에게 보복하시고 시온에 구속자로 임하실 것이라는 말씀은 이스라엘을 돌아오게 하심으로 이루어질 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1차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겠다. 이렇게 볼 때에 59장도 미래에 올 이스라엘의 구원을 근거해서 현재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있다. 회개할 사람은 미래 구원을 믿고 현재에 회개하도록 촉구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미래의 구원은 물론 이스라엘이 망하여서 흩어졌던 열국에서 돌아와 시온 성을 채우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60장). 이 무리 속에는 이방 나라들에서 예배하러 온 사람들도 많다. 이런 일로 인하여 시온(10,11,14)은 영광을 받는다. 이런 일은 야곱의 구속자요 전능자에 의해서 이루어진다(16).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이스라엘이 포로 되었던 자리에 다시 돌아옴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인하여 실체적인 구원도 암시하고 있다(18-22; 마5:3-5,계21:22-27). 이스라엘이 열방에서 돌아오게 되는 것은 신약의 그리스도 사역으로 인하여 이루어지는 구원을 예시한다. 그리고 이러한 미래 구원을 믿고 이사야는 당시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했고 믿을 자는 정신을 차리고 믿었다.
61-66장의 황홀한 찬양과 구원에 대한 묘사들은 두 가지 구원이 하나의 화폭에서 한 그림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돌아옴에 대한 묘사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루지는 실체적인 구원의 묘사와 연합되어 있다. 돌아 옴은 그림자요, 실체는 그리스도의 구원이다.


구약의 다른 선지서들도 이사야의 관점과 다르지 않는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멸망을 전후해서 사역했던 선지자다. 예레미야는 에브라임과 유다가 다시 자기들의 지경들과 성읍들로 돌아 올 것을 말씀한다(렘31:16-25). 빈 성읍들이 돌아온 사람들로 채워져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이루는 것을 '새 일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했고,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라고 했다(22). 자식 잃은 라헬이 강력한 자식을 안을 것이 암시 된다(15참조). 여호와는 돌아 온 유다와 이스라엘에게 새 언약을 맺을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들이 다시는 여호와와 맺은 언약을 깨뜨리지 않도록 여호와의 법을 그들의 마음에 새겨서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여호와를 알도록 하겠다고 한다(31-34). 그리고 창조의 원리 즉 주야의 원리가 폐지되지 않듯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 앞에서 영원한 나라가 되는 것을 폐하지 않겠다고 하신다(35-37). 그리고 이 나라를 다스릴 자 '다윗의 가지'가 나며, 온 백성이 레위인 제사장이 되게 할 것이라고 한다(33:15, 21-22;출19:6). 포로에서 이스라엘이 돌아옴과 다윗의 자손이 다스리는 제사장 나라가 이루점이 하나의 사건처럼 다루어지고 있다. 돌아옴과 다윗의 자손이 다스리는 제사장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 지 잘 알 수 없지만 '그 날'의 일로 진술된다.
하지만 우리는 포로에서 돌아 오는 이스라엘의 회복은 다윗의 자손이 다스리는 제사장들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을 보증하는 그림자와 같은 것이요, 실체는 다윗의 자손 그리스도가 오셔서 이루는 제사장 나라라고 말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메시야에 대한 약속과 계시역사의 진행과 완결을 생각할 때에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당연하고 옳기 때문이다.

다니엘서는 아예 먼 미래의 구원사건에 초점이 있는 것 같다. 이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하여 인자 같은 이가 다스리는(단7장) '하나님의 나라'로 묘사했다. 그 나라가 네 종류의 세상 나라(바벨론, 메데-바사, 헬라, 로마) 곧 짐승의 나라 후에 온 세상을 가득 채우는 방식으로 올 것을 내다보았다(2장). 다니엘은 이 나라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유대로 돌아가는 것에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이 나라를 향해서 이 세상을 떠났던 같다.

에스겔은 여호와의 영광이 예루살렘을 떠나서(겔10장) 바벨론 지경으로 갔다가 다시 성전으로 돌아오는 것(44:1-4)을 말하고 있다. 여호와가 바벨론 지경으로 가시는 것은 거기서 잠깐 동안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의 성소가 되기 위함이라고 하신다(겔11:16). 그리고 다시 이스라엘을 모아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11:17). 이스라엘을 바벨론 지경으로 가게 하시는 이유는 거기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우상을 버리게 하고, 새 마음을 주셔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백성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다(11:18-20). 우상숭배로 더러워진 똥 통 같은 이스라엘의 마음을 바벨론에서 비우고 새 마음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런 후에 이스라엘을 다시 모아서 돌아오게 하셔서 이스라엘에게 땅을 주실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사실을 환상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의 신에 의해서 마른 뼈들이 살아나서 큰 군대를 이루는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분명하다(37:1-14,39:25-29).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에브라임과 유다로 나누어졌던 이스라엘이 하나의 나라가 되어서 한 임금이 다스리도록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37:15-23). 이들을 다스리는 왕을 '내 종 다윗'이라고 한다(37:25). '내 종'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서 신실하게 하나님을 의뢰했던 다윗 같은 다윗의 자손 메시야 왕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겠다. 이런 왕이 영원토록 돌아와 한 나라가 된 이스라엘을 다스릴 것이라고 한다. 이것을 보아 돌아온 이스라엘은 미래에 올 메시야와 연결이 되어 있음이 틀림 없다. 이것은 새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서 돌아온 이스라엘과 같은 사람들을 메시야 왕이 오시기까지 있게 할 것이라는 약속이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포로에서 우상을 버리고 정신을 차리고 돌아온 이스라엘은 미래 메시야의 나라와 연결되어 있으며, 메시야의 나라가 옴이 틀림이 없음을 계시해 주는 것이다. 포로에서의 돌아옴은 메시야의 나라의 옴의 서막이요, 계시요, 보증임이 분명하다.
이런 이스라엘을 북방 군대 곧 곡과 마곡이 침입할 것과 또 그들이 이스라엘 땅에서 멸망을 당할 것을 에스겔은 예언한다(39-40). 이 예언이 에스더 시대에 에스더와 그녀의 아자비 모르더개 사건에서 성취되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J. B. Jordan). 이런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새 마음을 가지고 여호와를 섬기게 된 참 이스라엘을 침략하는 세력은 인간 역사에서 항상 있는 세력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곡과 마곡은 참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세상 세력에 대한 에스겔 시대의 표현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옳겠다. 이런 세력은 후에 수리아 세력, 애굽 세력, 로마 세력, 이스라엘 내에서 타락한 제사장과 그의 세력, 신약에서 교회를 핍박하는 세상 세력 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하나님 나라와 세상 세력의 싸움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싸움의 배후에 궁극적인 대적 사탄이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도 결국 결정적으로 패배하였다(계20:1-3).
이런 관점에서 볼 때에 회복된 예루살렘과 생수의 근원이 되는 성전과 생수로 되살아난 약속의 땅, 그리고 왕의 거처와 이것들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분배되는 약속의 땅은 (겔40:-48:) 그리스도의 사역을 내다보도록 가르치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에스겔이 예언하는 약속의 땅과 그 안에서 이루어질 일들은 새 언약적 서술들과 은유들 즉 메시야 통치 시대의 암시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스겔은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만을 보는 것에 머물지 말고, 하나님의 더 큰 구원을 내다보고 그것을 믿음으로 살도록 자기 시대 이스라엘 백성을 일깨웠던 것이다.

요엘서는 북방 군대가 메뚜기들처럼 이스라엘을 황폐화시킬 것을 내다보면서,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실지 모르니 이제라도 회개하라고 촉구한다(욜2:1-17,12-17). 그리고 여호와께서 약속의 땅과 시온을 회복시켜서 밀과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도록 하겠다고 하신다. 주의 백성이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할 것이라고 한다(2:21-27). 그렇게 한 후에(욜2:28(히,3:1, !keª-yrEx]a;(; '그 시대에'(29),hM'heêh' ~ymiäY"B;와 동의어다. 그리고 '그 시대에'는 '그 날에'와 용례상 다르지 않다, Whittaker's revised BDB) 여호와께서 모든 육체(rf'êB'-lK';자기의 모든 선민들) 곧 남종들과 여종들에게도 자기의 영을 부어주실 것이다(2:28-29). 또 하늘과 땅에 이적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을 베푸시며,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된다(2:30-31). 이것은 첫 창조 세계의 심판의 징조들이다. 주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이런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한다. 영을 부음과 심판의 징조가 선행되는 주의 크고 두려운 날은 구원과 심판이 시행되는 대 심판의 시대임(29)이 틀림 없다. 그리고 이 말씀이 오순절 날에 성취되었다고 사도 베드로는 선포했다(행2:17-21). 따라서 오순절 성령 강림은 구원과 심판의 시대가 시작됨을 가리킴이 틀림 없다. 이 때에도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여호와의 부름을 받아 주의 이름을 불러 구원을 얻을 남은 자가 있을 것이라고 한다(2:32). 이렇게 하여서 이스라엘이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않음'(2:27)이 이루어지는 것 같다.
요엘도 바벨론에서 돌아 옴과 성령 주심을 시대적으로 명확하게 구별하지 않는다. 구원사건으로 하나로 연결시키고 있다. 하지만 성령 주심에는 구원과 만국심판이(3장) 함께 시행될 시대가 될 것임이 가르쳐지고 있다. 바벨론 포도에서 돌아와서 땅을 회복시키는 복된 모습과는 차이가 있다. 그래서 두 시대가 구별될 것임이 암시되고 있다. 따라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시는 회복된 약속의 땅의 모습은 미래에 성령 주셔서 구원하시는 사건의 예조라고 이해하는 것이 옳겠다.

하박국도 갈대아인의 침략으로 이스라엘이 고난을 당할 것이지만, 여호와께서 그 침략자들을 응징할 것을 말씀하신다. 역사를 이루며 교훈을 베푸시는 여호와는 그의 성전에 계신다. 여호와는 성전에서 자기의 위엄을 나타내실 것이다. 그러므로 온 땅이 성전에 계시는 여호와 앞에서 잠잠하라고 말씀하신다(합2:20;슥2:13참조). 여기서 '온 땅'은 온 세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 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을 괴롭힌 갈대아를 향해서 '까불지 마, 여호와가 예루살렘 성전에 계신다'라고 말하고 있는 뜻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망하여 없어진 것 같지만, 예루살렘이 망하지 않고 회복될 것이고, 오히려 원수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응답에 하박국은 '수년 내에 행하소서'(2:2)라고 기도한다. 여기서 하박국이 말하는 성전은 회복될 예루살렘 성전을 의미한다. 즉 이스라엘이 다시 돌아와 세운 성전을 의미한다.
하지만 계시 역사를 생각하면, 하박국이 내다 본 예루살렘 성전의 회복은 그리스도가 성전 곧 자기 몸을 일으킬 것을 보장하고 또 예언하는 것이라고 할 수밖에 있다. 하박국도 이런 사실을 깨달았을 것으로 믿는다. 왜냐하면 선지자는 구원 사역의 대단원 곧 메시야의 구원을 깨닫게 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지자 하박국도 바벨론에서 돌아와 지어지는 성전은 그리스도가 지은 성전의 그림자요, 그것을 통해서 또한 실체적인 구원을 확인했다고 할 수 있다.

요시야 때 선지자 스바냐는 바벨론에서 돌아옴에 초점을 맞추는 것 같다(습3:19-20). 포로를 통하여 여호와께서 교만하여 회개하지 않는 자는 제거하고, 돌이켜 회개하며 겸손하여서 남겨진 사람들(습3:10-13)은 예루살렘에서 임재하여 계시는 여호와의 지극한 사랑을 받을 것이라고 한다(3:14-17). 하지만 이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거하시는 여호와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다(3:17). 여기에는 미래의 구원이 암시되어 있는 것 같다. 이렇게 이해할 때에 포로에서의 귀환은 미래의 큰 구원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시온에 대한 여호와의 보호와 말할 수 없는 사랑은 이런 관점에서 읽을 때에 이해가 된다.

학개는 포로에서 돌아와서 성전 지대를 놓았지만(학2:18), 방해로 인하여 더 이상 건축을 진행하지 못하다가 그만 안일에 빠져서 성전을 지을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하면서 자기들만 판벽한 집에 살면서(1:2,4,9) 여호와의 징계하심을 무시하는(1:10-11, 2:16-17) 이스라엘에게 성전 건축을 시작하도록 독려한다(520 B.C.). 이 말씀을 듣고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에 의해서 성전 건축은 다시 시작되었다(1:12-14).  이 때에 지어진 성전은 보잘 것 없이 보이는 것이었다(2:3,1:1:8). 하지만 낙심하지 말 것은 그 성전의 영광이 미래에는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 곧 온 세상을 진동시킬 것이며, 모든 나라의 보배(tD:äm.x,) 곧 '갈구하는 것'이 그 성전을 채울 것이라고 한다(2:6-9). 이어지는 은과 금에 대한 언급을 볼 때, 여기서 '갈구하는 것'은 물질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온 세상의 보배로운 물질이 성전을 채우는 것이 성전의 영광이라는 것은 온 세상이 여호와의 영광을 깨닫고, 이스라엘 하나님을 경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때가 미래에 온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 때에는 성전이 이스라엘의 성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성전이 된다는 뜻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런 일은 온 세상이 심판을 받음으로 이루어질 것을 말해 준다(2:21-22). 성전을 건축하는 스룹바벨은 미래의 영광스런 성전을 건축하는 이를 상징하는 인물로 선택된 자다(2:23). 학개는 스룹바벨 성전은 미래 성전의 그림자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미래에 온 세상을 놀라게 할 성전이 지어질 것을 바라보도록 하기 위하여 스룹바벨에게 보잘 것 없는 성전을 짓도록 학개는 촉구하였다.

스가랴도 학개와 같이 다리오 제 2년이 선지자로서 전달해야 하는 말씀이 임한 해라고 말하고 있다(슥1:1,7). 학개가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성전을 건축하도록 촉구하던 해에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도 임하였다. 사람들의 마음은 여호와로부터 떠나 있었고(1:3), 자기들 집만 아름답게 짓기에 정신이 없었다(학1:4,9참고). 여호와의 성전은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상황이다. 근 70년(1:12) 동안 황폐해진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을 보고 탄식하는 선지자에게 여호와는 자신이 다시 시온에 돌아왔은즉 성전을 건축케 하며 성읍들을 풍부하게 할 것이라고 하신다(1:16,17). 천사가 예루살렘을 측량하러 나가는 것은 예루살렘이 곧 세워질 것을 암시한다(2:1-2). 하지만 이렇게 세워지는 예루살렘은 사람과 가축이 많음으로 인하여 성곽 없는 성이 될 것이며, 여호와께서 불로써 둘러싼 성곽이 될 것이라고 한다(2:4-5). 그리고 여기에 바벨론에서 거주하던 사람들(시온)이 돌아와서 거하며,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여호와의 백성이 될 것이며(2:7,9),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다시 택하실 것이라고 한다(2:12). 이것은 이어지는 성전과 예루살렘 재건으로 성취된다. 그리고 이런 성취를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다시 제사장으로 세우는 환상(3:1-5)으로써 보여 주신다. 대제사장을 다시 세우신다는 것은 성전을 다시 세우신다는 뜻이며, 이스라엘(유다)을 다시 세우신다는 뜻이다. 스룹바벨을 통해서 성전을 다시 세우시는 것은 이스라엘을 다시 선택하신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다시 선택하시는 것은 단순히 당시의 이스라엘을 위함이 아니라, 여호와의 종 "순"(싹;xm;c,()을 나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 땅의 죄악이 일시에 제거되는 것은 이 순으로 인하여 이루어지는 일임이 분명하다. 이스라엘은 평화로운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3:8-10). 여호수아와 스룹바벨 같은 사람들은 성전을 건축함으로 이 순을 예표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성전을 짓는 것은 이 순의 사역 곧 이스라엘의 건축을 미리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스가랴는 당시 성전 건축을 통해서 순의 사역을 이해시키고자 했다. 스가랴 당시의 성전 건축 사역은 미래에 순이 와서 하실 사역을 계시해 주는 것이었다.
이런 이해는 순금 등대와 두 감람나무에 대한 환상에서도 이어진다(4장). 순금 등대는 스룹바벨이 지을 성전을 상징한다(4:2-3,6,9-10). 두 감람나무(4:11-14)는 등대에 기름을 공급하는 자 곧 성전을 세우는 자를 상징하니 당시의 스룹바벨과 여호수아가 이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들이 예표의 사람들이듯이, 이들이 지을 성전 역시 그리스도가 지을 성전의 예표가 분명하다. 이스라엘 땅에 악을 제거하고(5장: 날아가는 두루마리, 에바 속 여인을 시날로 옮김), 북쪽 땅 심판함(6:1-8:북쪽 땅은 악의 진원지다:단38장 참조)도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순의 사역(6:12-13)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순은 성전을 짓는 자요, 다스리는 자며, 또 제사장이기도 하다(6:13).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이런 순 곧 그리스도가 와서 사역할 것을 예표하는 자로서 세움을 받아 머리에 면류관을 쓴다.
7장에서 14장까지는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옛 이스라엘이 겪어야 하는 역사적 과정을 개괄해 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요약해서 다음과 같이 정리 해 본다:
7장: 이스라엘이 겪었던 바 바벨론 지역으로 흩어졌던 것은 이스라엘이 완고하게 하나님을 배역함으로 폐망했던 사건이었다(다리오 왕 제 4년 곧 주전 518년에 주어진 말씀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당시에 돌아와서 성전 재건하는 이스라엘을 교훈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이 틀림 없다).
8장: 여호와가 시온에 돌아와서 거하심을 말씀하며, 그로 인하여 예루살렘은 남녀노소, 동남동녀가 희희낙락하는 즐거움의 성읍이 되게 할 것을 말씀한다. 동서에서 인도되어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여서 이렇게 될 것이며(1-8), 여기서 또 많은 백성과 강대한 나라들이 여호와를 찾게 될 것을 말씀한다(18-22). 이것은 시온의 미래에 대한 말씀이다. 제 2 성전을 짓는 당시의 사람들에게 이 말씀은 미래의 시온을 내다보면서 성전을 지으라는 것이 틀림 없다. 이러한 미래에로의 이행은 역사적으로 볼 때에 점차로 이루어져서 마침내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절정에 이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제 2 성전 건축은 이러한 미래에 이르는 시작이요, 전조라고 할 수 있다.
9장: 이스라엘의 주변 나라들 하드락, 다메섹, 두로, 시돈, 아스글론, 에그론, 가사, 아스돗 등은 멸망하는 중에 구원 받는 자들이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에 편성될 것이다(1-7). 이런 심판을 시행하고 이스라엘에 구원을 주는 것으로 보이는 한 의로운 왕이 소개 된다(9-10). 이 왕을 '그리스도'로 이해하는 주석가들이 많지만, 위의 나라들을 몰락시킨 헬라의 알렉산대로 이해하기도 한다(조-던). 물론 이 말씀이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진다고 신약은 말하고 있다(마21:5). 하지만 이스라엘을 들어서 헬라는 칠 것이라는 다음의 말씀들을 생각해 보면(9:13) 공의를 베푸는 왕은 알렉산더의 사역에서 1차적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겠다. 이 헬라가 나누어져서 4나라가 되고, 이 나라들이 서로 싸우며(9:14참조), 특히 유다와 에브라임에 의해서 헬라가 깨어질 것이라(9:13)고 하는 말씀이 후에 유다 마카비 가문에 의해서 실행된 역사적인 과정을 생각할 때에, 9장은 알렉산더의 활동과 그 후에 헬라 세력이 깨어지는 사건을 순차적으로 하나의 조망 안에서 말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 된다.   10장: 여호와께서 헬라화 된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을 벌하고(3; '숫염소'는 헬라화된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단8:21참조), 유다에서 용사 같은 지도자들을 내셔서 그 족속을 견고하게 할 것이며(3-5), 요셉 족속도 흩어져 있던 곳 애굽과 앗수르에서(10-12) 돌아오게 하여서 용사 같이 강하게 할 것(6-7)이라고 하신다. 귀환도 계속해서 이루어질 것이 암시된다. 마카비 시대와 그 이후에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일이 계속되었을 것이다. 이런 돌아옴으로 인하여 레바논과 요단이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변모하였을 것이다(11:1-3).
11:4-17: '살육당할 양 떼'(4,7;hg")rEh]h; !acoï)라는 표현을 보아 이스라엘 백성이 죽을 수밖에 없는 부패한 상황에 있음을 암시한다. 지도자들은 백성을 팔고 사면서도 그것을 '여호와께 찬송'거리로 삼는다(5). 여호와께서도 이런 이스라엘을 이웃 나라에 넘기기로 결심하신다(6). 은총과 연합을 소원하면서 양떼를 먹이든 선지자도 목자들과 양떼를 내버린다. 은총도 연합도 폐지한다. 이런 중에 선지자의 말씀을 여호와의 말씀인 줄 아는 양들에게서 은 30을 고가로 받는다(7-14). 여호와께서는 어리석은 목자를 파면하시고, 한 목자를 일으키겠다고 하신다. 하지만 이 목자는 백성을 돌보는 일에는 관심이 없으며 오히려 잔인하여 살찐 자의 고기를 먹고 그 굽을 찢는 자다(16). 이 자의 칼에 의하여 양떼를 버린 무가치한 목자가 힘을 잃고 소경이 되어가는 것 같다(17). 이스라엘의 무가치한 목자를 무력하게 만드는 심판을 위한 심부름꾼은 누구일까? 그리스도 탄생기의 헤롯 가문이 아닐까?
12장: 예루살렘이 무거운 돌이 되어서 그것을 건드리는 천하만국이 망하게 하실 것이라고 한다(1-6). 반면 유다 지도자들을 화로와 횃불 같게 하여서 에워싼 민족들을 불태우게 하며(6), 유다 전체를 예루살렘처럼 만드시겠다고 하신다(6-7). 그리고 유다의 주민들은 다윗 같고 다윗 족속은 하나님 같을 것이라고 한다(8). 강력한 유다가 될 것을 말씀한다. 그리고 다윗과 예루살렘과 온 이스라엘 족속들과 심지어 다윗을 대적했던 시므이의 집까지 집집이 회개하게 될 것은 그들이 찌른 바 '그'분 (또는 '나') 때문이다. 그들이 찔렀던 자는 '여호와'이심이 암시된다. 이런 의미로 읽고 보면 애통하는 영을 부어주신 여호와 자신이 찔림을 받을 대상으로서 '나'(yl;Þae)라고 하신 것은 더욱 의미가 있는 것 같다(BHS, 슥12:10참조). 찔렀다면 상하고 죽었다는 말이요, 그를 다시 본다는 것은 그가 살아 있다는 의미가 암시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내다보고 있음이 분명하다.
13장: '여호와'가 찔림으로 죄와 더러움(hD"(nIl.W taJ;Þx;l.)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린다고 한다(1). 이 사역으로 인하여 계시사역의 애매성은 사라진다. 계시가 명백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거짓 선지자, 귀신들, 예언자가 필요 없어진다(2-6). 이것을 위하여 여호와의 짝 된 자를 칼로 치신다(7). 그러나 작은 무리에게 여호와의 보호하심이 있다. 그리고 이들은 연단되어 나오는 1/3이다(7-9).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은 오순절 성령 주심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은 것으로 생각 된다. 죄와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는 일이 그리스도가 부활하시고 보내신 성령이 오심으로 온 세계적 차원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하늘이 열리고 땅이 하늘에 편입되는 일이 시작되었음으로 온 세상을 향해서 공식적으로 선언하신 사건이 오순절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세상은 인류의 근본적인 죄와 부정함이 제거된 세상이 된다. 오순절은 이런 세상의 시작이다. 이 세상이 곧 예수님이 니모데모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다(요3장).
14장: 생수가 흐르는 예루살렘(8),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며(9), 높이 들린 예루살렘(10), 저주가 없는 예루살렘(11), 이 땅의 광명이 필요 없는 예루살렘(6) 등은 하늘에서 내려온 새 예루살렘의 표상들이다. 그리고 이것을 치러 왔던 모든 백성들은 큰 재앙을 당하여 파멸하며(12), 또 치러 왔던 이방 나라들 중에서도 남겨져서 여호와를 섬기게 될 것과(16) 온 유다가 성전 뜰과 같이 거룩하게 되는 것은(20-21) 신약 시대에 성취되는 사건들이다.
이상에서 볼 때에 스가랴 7-14장까지는 바벨론에서 돌아와서 성전을 건축함으로 시작된 종말적인 이스라엘의 구원 사건이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완성되는 것을 하나의 조망 안에서 개괄적으로 그러나 순차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 된다. 이런 점에서 스가랴서의 독특함이 있는 것 같다.

말라기는 홀연히 성전에 임하실 주 곧 언약의 사자가 오셔서 신자와 불신자를 구별하여 내실 것(3:1,5,4:1,6)을 대비하여서 당시 사람들의 삶이 깨어나도록 절규하고 있다.  


구약에서 새 언약을 상고하는 것은 이제 끝내어도 무방하겠다. 구약이 내다보는 새 언약에서 다음을 기억하자.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이 경험하는 여호와의 구원은 미래의 큰 구원을 예시하는 전조적 사건이요, 예언사건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구원 사건을 경험함을 통해서 미래의 큰 구원을 확신하고 믿으며, 정신을 차리고 그것을 바라보아야 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 구원 사건을 경험한 신약 교회에서는 역사속에서 교회와 성도들이 경험하는 구원 사건들이 과거 그리스도가 이루신 큰 구원을 믿고 확신하도록 하는 동시에 또 이 구원의 종결을 바라보고 믿음에 흔들리지 않고 나그네의 길을 가도록 하는 것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새 언약과 교회
그리스도는 이상과 같은 옛 언약들의 계시를 이루시는 차원에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새 언약을 세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믿는 자는 그리스도가 옛 언약들을 이루시고 세우신 새 언약 속에 들어가는 자이다. 믿고 세례를 받는 것은 그리스도가 세우신 이 새 언약에 들어가는 것이요, 이 사실을 말씀과 성례로써 주일마다 확인하는 자가 새 언약의 성도들이다.
따라서 주일 예배는 언약의 갱신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이루신 새 언약을 누리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영단번(once for all)에 새 언약의 세계 곧 그의 나라 속에 들어와 그 열매들을 먹고 누리는 것이다. 예배 때에 말씀으로 임재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만나 뵈오며, 성례로써 성령을 새 생명의 떡으로 먹고 사는 것을 확인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그리스도가 이루신 새로운 세계 곧 하나님 나라 안에서 사는 자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언약을 새롭게 갱신하는 것이 아니다. 언약을 갱신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리스도가 죽어야하는 일이 반복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리스도가 세우신 새 언약은 반복되는 언약이 아니다. 그가 이루신 나라와 구원이 반복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맺는 말.
역사상 성경의 언약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의 견해들을 우리는 살펴 보았다. 그리고 또 우리는 성경의 언약들을 계시의 수단이라는 관점에서 개괄적으로 정리하려고 노력해 보았다. 성경의 언약의 중심에는 그리스도가 서 계신다고 말할 수 있다. 구약에는 내려오시는 하나님이 언약의 중심에 계셨고, 그 분이 사람이 되어 오신 것이 새 언약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언약을 말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인 이해를 가지지 않으면, 언약이 제대로 이해되지 못한다. 이렇게 되면 언약을 사회학적 언약 형식에 맞추어서 이해하려고 하게 되고, 이로 인하여 하나님 자신의 계시가 무시되거나 결격된 언약 이해로 전락하게 된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으니, 우리가 언약을 지켜야 한다'는 식으로 접근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결국 언약 속에서 그리스도가 빠지게 된다. 따라서 율법주의내지 신율법주의적 경향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성경에서 언약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며, 자기의 계획을 계시하신 것을 시대를 따라서 담아 놓은 그릇이다. 이 사실을 간과하거나 약화시킨다면 성경의 언약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리스도를 성경 이해의 통일성의 기초로 명시했지, 언약을 성경 이해의 통일성의 기초로 명시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 된다. 언약이란 각 시대에 주신 계시의 그릇이기 때문에 아예 통일된 성경 이해의 기초로 삼을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사실은 언약도 그리스도 중심 곧 계시 중심으로 이해해야 함을 암시해 주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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