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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언약

박길현목사(대구)

by 김경호 진실 2014. 11. 12.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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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언약  

다윗 언약(Davidic covenant)
다윗 언약은 다윗의 자손을 왕위에 앉혀서 영원히 그 왕권이 지속되도록 하겠다는 약속이 핵심이다. 그러므로 다윗 언약을 논할 때에 사무엘하 7장11-17에 나오는 다윗의 자손 왕에 대한 약속을 기초로 삼는다. 이 약속이 시편 89:3-4,27-28에서 나타나 있다. 이렇게 취급하는 것은 옳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다윗 언약은 영원한 다윗의 왕권에 대한 약속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다윗의 왕권을 위하여 다윗을 택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다윗을 택하여서 왕으로 세우는 과정도 언약적으로 의미가 있고, 왕이 된 후에 다윗의 생애를 다루시는 것 역시 언약적으로 의미가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다윗 왕권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또 여호와 하나님 자신과 다윗 왕권을 어떻게 관계를 지우시는 지를 보여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윗 언약 역시 포괄적인 측면에서 상고해 볼 필요가 있다. 따라서 '다윗의 선택됨과 왕이 되기까지', '왕이 됨과 약속', '그 이후 다윗의 생애에서 보여 주신 왕국의 통치 원리와 왕직의 사역 계시' 라는 제목으로 구별하여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다.

 '다윗의 선택됨과 왕이 되기까지'
하나님이 다윗을 선택한 것은 예상을 밖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삼상16장). 다윗은 7명의 형들이 왕으로 택함 받음에서 제외되는 가운데서 예상 밖의 선택을 받았다. 그의 아비 이새는 7명 외에 다른 아들이 또 있느냐고 묻는 사무엘의 질문에 양을 치는 다윗을 데리고 와야 했었으며,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택을 따라서 그에게 기름을 부어서 왕으로 선택하였다. 다윗은  용모가 아름다고 잘 생겼고(16:12-'fine appearance and handsome features') 용감한 전사였지만(16:18), 그의 형들과 같지 않은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형들처럼 장대하고 남자답지는 않았던 것 같다(16:7). 하지만 여호와는 그의 중심 곧 마음을 보셨다. 이것은 다윗이 신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음을 뜻할 것이다. 여호와는 이것을 보시고 다윗을 택하셨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청에 의하여 사울이 선택된 경우와 전혀 다른 관점의 선택이었다. 이런 점은 그리스도의 세워짐의 그림자로서 역할 한다(삼상16:13,마2:15,3:17,요1:45-46,시2:7,출4:23;이새의 말째 아들의 선택, 애굽에서 아들을 불러 세움, 나사렛의 출생은 의외의 상황에서 부름 받음이라는 관점에서 상통한다).

또 다윗이 사무엘에 의해서 왕으로 선택된 것 또한 의미가 크다. 사무엘은 선지자와 제사장과 마지막 사사로서 이스라엘을 통치했던 인물이었다. 사무엘은 에브라임 지파의 사람으로서 여호와에 의해서 양육되어(2:21) 이러한 일을 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에 의해서 다윗이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그의 왕직이 선지자와 제사장과 사사의 직분들을 통합한 직분임을 암시한다. 평생동안 다윗이 제사장과 선지자 직분을 수행하며(삼상30:7-8,삼하23:1-7), 성전의 직제와 제도들과 행정직제를 관장하고 확립한다. 이것은 다윗 왕직의 특별한 면모로서, 이것 역시 그리스도 사역의 초월적 기능을 예시하고 있다.

선택 받은 후 다윗은 성령 떠난 사울에 의해서 핍박과 고난을 받고 마침내 피신하여 나그네의 삶을 겪는다. 사울이 죽까지 이런 생활을 하다가 사울이 죽자 마침내 왕이 된다. 성령으로 세움을 받은 자가 악령을 받은 자에 의해서 이런 고난을 겪었다. 이것 역시 그리스도 사역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도 악령에 사로잡힌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당했으며, 이방의 갈릴리를 자기 사역의 터번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예루살렘은 완악했다. 마치 귀신이 든 사울이 완악했던 것 같이 완악했고, 또 사울이 그의 군대를 이끌로 다윗을 추적했던 것과 같이 예루살렘 제사장 세력은 그리스도를 추적했다.

 왕이 됨과 약속
다윗이 왕이 된 후 주위의 모든 원수들을 무찌르고 평안을 얻어 백향목 궁에 거하게 되자, 비로소 여호와의 궤가 휘장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의 궤를 위하여 집을 지을 마음을 먹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는 선지자 나단을 통하여 대략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첫째, 출애굽 이후부터 지금까지 여호와는 장막에서 거하셨지만, 자기를 위하여 백향목 집 즉 성전을 지으라고 말한 적이 없다고 하셨다(삼하7:5-7). 이 성전은 다윗이 죽은 후에 그를 이어 왕이 될 다윗의 씨가 세우도록 하겠다고 하셨다(삼하7:13). 역대기에 의하면 다윗이 성전을 세우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것은 다윗은 무인으로서 피를 많이 흘린 여호와의 전쟁을 수행한 사람이기 때문에 평화가 확립된 것을 상징하는 인물로서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셨다(대상28:3).


둘째, 대신에 다윗의 씨 솔로몬은 평화를 상징하는 인물로서 합당하기 때문에 그가 평화를 상징하는 성전을 짓도록 하겠다고 말씀하셨다(대상28:6). 성전은 영구적인 건물로서 영구적인 평화의 시대가 열렸음을 상징하는 건물이었다(대하6:1). 반면에 장막은 여행과 전쟁으로 이리 저리 옮겨 다님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셋째, 솔로몬이 성전을 짓도록 하겠다는 것은 솔로몬을 통하여 다윗의 영원한 왕가를 세워주시겠다는 약속이다(삼하7:11,13,대하28:5-6). 그러므로 성전은 영원한 다윗 왕조의 상징이다. 진짜 여호와의 집 곧 성전은 곧 다윗 왕조라고 할 수 있다(대하6:5-6). 그리고 출애굽의 종점 역시 다윗 왕조에서 안착된다(대하6:5-6,삼하7:23-24).


넷째, 이렇게 성전 곧 영원한 다윗 왕가를 짓는 자로서 솔로몬을 하나님의 아들로 삼는다고 하셨다(삼하7:13-14). 곧 솔로몬을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시는 이유는 그가 성전 곧 영원한 다윗 왕조를 지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성전을 완공해야 할 사명을 가진 자이다(대상28:6).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하나님의 성전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타당하다(요2:19-21).          
다섯째, 솔로몬이 범죄할 때 솔로몬을 징계는 해도 그에게 은총을 빼앗지는 않을 것이며, 다윗 왕가를 영원하게 하겠다고 하셨다(삼하7:14-16). 이것은 솔로몬이 아니라 다윗 왕가를 영원하게 만들 솔로몬보다 위대한 왕을 다윗 자손에서 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이다. 솔로몬은 인간이라 죄를 지을 수밖에 없음을 이미 알고 계셨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인간임을 인정하셨다. 하지만 그의 왕좌를 영원하게 하시겠다는 것은 그의 왕좌를 영원하게 만들 후손을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그리고 이 후손은 솔로몬의 실패와 대조되는 실패하지 않는 온전한 후손이라는 사실이 암시된다. 따라서 그의 후손인 왕은 인간의 불완전함을 극복할 수 있는 왕임을 암시 받는다. 그는 아마도 신적인 왕일 것임을 암시 받는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다(마1:1).


여섯째, 다윗은 말년에 이 다윗의 자손을 내다보면서, 그 나라의 융성과 승리를 예언하고 죽었다(삼하22:51-23:7). 이 나라는 열방까지도 굴복할 것임이 예견된다. 그에게 입 맞춤이 열방의 지혜다(시2:7-12).  이 다윗의 자손이 곧 메시야 왕 예수 그리스도다. 다윗은 자기의 자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를 믿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출애굽도 다윗의 자손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에서 완성된다. 여기서 온전한 평화에 이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조상들에게 주셨던 언약이 완성되도록 하셨다.  


따라서 이 후에 성경이 이 메시야 왕과 그의 통치를 기다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이 메시야 왕의 오심이 왕과 나라, 성전과 제사장, 선지자와 약속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특별한 날과 관련이 지워지는 것은 당연하다(사9:1-7,11:1-10,렘31:22,31-34,33:14-22, 다니엘의 인자와 그의 나라, 에스겔의 생명의 강물이 흐르는 새 땅과 새 성전, 스가랴의 미래 성전 곧 순금 등대와 두 감람나무, 말라기의 여호와의 사자가 오시는 날, 등).    

다윗 왕국의 통치 원리와 왕직의 사역이 계시 됨.
다윗 왕국의 통치 원리는 솔로몬이 왕됨으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탈취하여 임신하게 하고 그것을 숨기기 위하여 신실했던 충복 우리야를 사지에 내어서 원수의 살에 맞아 죽게 만들었다.  나단의 책망을 받은 다윗은 자기 죄를 자복하였다. 그러자 하나님도 다윗을 용서하셨다.
하지만 이 사건은 다윗의 대적으로 하여금 다윗을 대적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되었고, 또 다윗이 밧세바에게 낳은 아들이 죽는 결과를 가져 왔다(삼하12:13-14). 즉 이 사건은 다윗의 대적이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하나님이 용서하신 다윗을 대적하는 자가 다윗의 대적이니, 그는 또한 하나님의 용서를 인정할 수 없는 자임을 뜻한다. 따라서 다윗을 용납하지 못하여 다윗을 대적한 자들은 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었다. 압살롬, 시므이, 요압, 아히도벨, 솔로몬의 왕됨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암논 같은 이가 대표적인 다윗의 대적 곧 하나님의 대적이었다. 인간의 죄를 인하여 하나님의 용서를 대적하는 원수를 드러내는 사건이 다윗의 범죄 사건이었다.


그리고 밧세가 낳은 아들이 죽는 사건은 원수에게는 하나님이 죄에 대하여 심판하심을 보여 주었지만(삼하12:14), 다윗에게는 다윗 대신에 그의 아들이 죽는다는 것을 계시하는 사건이었다(삼하12:19-23; 다윗 자신이 죽어야 하는데 아이가 죽었다는 다윗의 아픈 탄식이 담겨 있다. 특히 23절의 의미를 잘 생각해 보라. 한국식으로 이 구절 속에 들어 있는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오히려 유익하다). 다윗의 이름 없는 아들은 다윗 대신에 죽은 희생자요 대속자였다. 이러한 사실을 다윗은 아이의 죽음에서 깨달았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에 다윗이 밧세바에게서 아들을 낳고 솔로몬이라고 불렀다. 다윗은 아들 솔로몬을 자신과 여호와와의 관계 회복의 상징으로 여겼음이 틀림 없다. 즉 자신의 속죄함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음을 상징하는 인물이 솔로몬이라는 이해를 다윗은 가지고 이런 이름을 명명했었다. 다윗의 이런 이해를 여호와께서도 확증해 주셨다. 나단 선지자를 보내셔서 솔로몬을 '여디디야'(hy"d>ydIy>)라고 부르셨기 때문이다(삼하12:24-25). 이 이름은 '여호와께 사랑을 입은 자'(beloved of Yah)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BDB). 여호와께서도 솔로몬을 사랑하신다는 확증이다. 여호와께서 솔로몬을 사랑하시는 이유는 개인에 대한 사랑보다는 다윗이 속죄함을 입고 여호와의 사랑을 회복했음을 상징하는 인물로서 솔로몬을 사랑하셨다는 뜻이 분명하다. 이런 의미에서 솔로몬은 평화의 사람 곧 다윗과 하나님과의 화평을 시위하는 인물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의미의 인물이 솔로몬이라는 것을 명명으로 확인하셨다. 고로 하나님이 솔로몬을 사랑하셨다는 것은 다윗을 사랑하신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이러한 솔로몬이 다윗을 이어서 왕이 되었다는 것은 선택된 자에 대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용서와 사랑과 그것들로 인한 화평(화목)이 이스라엘 왕의 통치원리라는 것을 증거한다. 그러므로 솔로몬을 위시한 이스라엘 왕은 이것을 가지고 통치하여야 한다.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셨던 바 '율법서의 등사본을 평생에 옆에 두고 읽으라'고 하신 말씀(신17:18-19)과 도 상통한다. 왜냐하면 율법서의 말씀들은 결국 내려오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표현들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용서 받은 다윗과 이 사실의 상징인 솔로몬의 통치를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의 통치를 거부하는 것이 된다. 솔로몬이 왕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은총의 통치를 강조하기 위해서 솔로몬은 왕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솔로몬을 사랑하신 것도 결국 이 이유와 연결되어 있다.


솔로몬에게 은총(ds,x,)을 빼앗지 않겠다고 하신 것도 솔로몬이 이런 은총의 대상이라는 뜻일 것이다(삼하7:15). 솔로몬이 이런 대상라면 다윗 왕가의 자손들도 역시 은총의 대상이라는 것을 암시해 준다(므낫세를 생각해 보라). 다윗 왕직은 은총을 보여 주는 자리이며, 그것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자리이다. 백성을 그 은총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자리이다. 따라서 다윗 왕직의 통치원리는 바로 하나님의 내려오심으로 구속되는 자비(!Wnx')를 원리(모세언약의 표현)로 하며, 선택된 자에 대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용서와 사랑 곧 은총을 보여주는 자리요, 또 백성으로 하여금 그것을 향해서 나아가도록 이끄는 자리라고 할 수 있다(출34:6 참조; 여기에 '자비' '은총'이라는 말이 한꺼번에 나온다. 그리고 이후에 구약성경에서 이 구절에 밝혀진 하나님의 성품은 끊이지 않고 반복된다. 특히 다윗 이름으로 된 시편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다윗언약의 가장 중요한 면모라고 생각 된다. 그리고 이 면모는 그리스도에게 가장 온전하게 드러난다(요3:16, 롬5:12-21 등).
단 이런 은총에 참여하는 자는 모두가 다윗처럼 '내가 죄를 범하였습니다'(삼하12:13, 사6:5, 마18:15-20, 롬7:24, 딤전1:15)라고 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죄인 됨을 모르는 자는 하나님의 은총을 모르는 자이다.


그리고 위와 같은 왕이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 백성의 죄 용서 받음을 위해서 기도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열왕기 8장에서 솔로몬이 행한 선전 봉헌 기도가 바로 이 사실을 보여준다. 솔로몬은 왕으로서 기도하였지만, 그 역시 다윗이 보여주었던 면모 즉 제사장과 선지자의 면모를 보여준다. 이스라엘의 현재와 미래를 내다보면서 죄 용서를 기도했고, 심지어 이방인들의 죄 용서까지도 기도했음을 보여 준다. 물론 솔로몬이 한 기도가 삼직의 성격을 통합한 특별한 왕이 영구적으로 해야 하는 직무라고 할 수 있느냐를 질문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성전을 짓고 봉헌하는 자리에서 한 단회적인 기도하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솔로몬 성전을 짓는 것이 다윗왕조를 확립하는 것과 같은 의미라는 점을 생각 이런 솔로몬이 한 이 기도는 왕조의 통치자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영구적인 도고의 내용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다윗 왕조의 왕들은 이런 기도를 하는 것을 통치의 근간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면모를 다윗의 자손 열왕들은 실패했고, 온전히 하지 못했었지만, 마지막 다윗이 자손 그리스도는 자기 사역에서 이 일을 온전히 이루셨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스도의 기도는 자신을 온전히 바쳐서 거룩하게 하는 것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그의 거룩함으로 그의 백성들도 거룩하게 하셨다(요17:15-19,롬6:7,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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