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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과 부활절을 구별하자

박길현목사(대구)

by 김경호 진실 2018. 4. 3.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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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과 부활절을 구별하자(행2:22-36).


사람들은 어떤 일에 의미를 부여하기를 잘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자기 자신들이 그 어떤 일에 의미를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기념일이다. 개인적인 기념일이라면 대표적으로 생일을 들 수 있다. 요즈음 아이들은 존중을 받고 자라야 한다고 생각하고 아이 때부터 그 부모들이 생일을 크게 기념해주어서 그런지, 생일이 되면 자기들끼리라도 선물을 주고 받고 작은 잔치를 하는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이런 모습이 내게는 좀 기이하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생일을 거의 기억하지 않고 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기념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도 아무렇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러니 요즘 아이들의 자기 생일 기념이 좀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기념일이란 이렇게 해서 생겨난다. 그것이 많은 사람이 기념할만하다고 생각한다면 많은 사람이 거기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국가적 민족적으로 기념할만하다면 국가적 혹은 민족적인 기념일이 될 것이다. 온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라면 세계적인 기념일이 될 것이다. 부활절도 이렇게 해서 형성된 기념일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온 세계적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고 축하하기 때문에 부활일은 세계적인 기념일이 되었다. 그리고 이것을 사람들이 반복해서 기념하는 날을 삼았으니 이 날이 절일이 되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자신의 부활에 대하여서는 제자들에게 말했었지만 부활절을 지키라고 한 적은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부활한 직후의 1세기 교회는 부활절을 기념한 흔적이 전혀 없다. 이 기간 동안은 아마도 주일에 즐겁게 모여 예배하는 것으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되새기고 자신들 역시 부활하신 주님이 영으로 통치하는 나라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으로 충족했던 것 같다.


부활절 논쟁은 2세기 즉 주후 100년을 넘어서 시작되어서 8세기까지 계속되었다. 하지만 100년 이후 언제부터 부활절을 기념일로서 지키기 시작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2세기 어느 때부터인지 교회의 일부에서는 부활절을 기념일로 지키기 시작했는데, 그리스도 부활 절 날짜에 대하여 교회들 사이에 의견이 있었다. 동방의 교회에 속하는 일부 사람들은(Quartodecimani로 알려져 있는 집단) 부활절을 니산월 14일에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렇게 했다. 이날은 유대인의 유월절이다. 그들이 이러한 주장을 한 것은 이 주간 언제라도 부활절을 지켜도 된다는 의미에서라고 한다. 즉 이 견해는 절기의 초점을 유월절 양의 희생 즉 십자가의 죽으심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십자가를 기념하면서 부활은 어느 날 기념해도 좋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와는 달리 로마의 교회는 항상 주일날을 부활절로 지켰다. 로마의 교회는 십자가 사건보다는 부활 사건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부활을 의미하는 주의 날에 부활을 기념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논쟁의 중심은 십자가에 달림인가, 아니면 부활인가에 대한 견해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유월절 절기와 연결 짓는 것을 보면 동방 교회의 일부 사람들은 유대적인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유대교적인 절기를 지켜야 할 것인가 기독교적인 절기를 지켜야 할 것인가의 논쟁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이 논쟁에서 시간이 갈수록 갈등은 심각해졌다. 2세기 말경에는 로마 교회의 주교 빅토르1세는 로마 교회의 부활절을 동방 교회에도 강요하려고 하다가 실패했다. 그러자 그는 쿠아르토데키마니주의자들(동방 교회 일부 사람들)을 이단이라고 비난하기에 이르렀다.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그보다 한 세기가 훨씬 더 지나 325년에 열린 니케야 공의회에서 논쟁은 일단락되었다. 즉 춘분 후 보름(망월)이 지난 첫 주일을 부활일로 지켜야 한다고 공포했다. 동시에 니산월 14일에는 결코 부활절로 지키지 말도록 공포했다. 그러나 이것도 결국 해결책이 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각 집단이 사용하는 달력이 다름으로 인하여 결국 부활절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로마 교회는 춘분을 3월 25일로 고정시켰던 반면,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춘분을 3월 21일로 정하였다. 하지만 각 지역 교회들에서는 여전히 다른 날짜들과 다른 계산 방식들이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서방 전통을 따르는 교회에서는 로마 교회의 결정을 따르게 되었고, 동방 지역에서는 동방 교회의 결정을 따르게 되었다. 그래서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로마 교회)의 전통을 따르는 교회들 사이에는 아직도 다른 날을 부활절로 지키고 있다.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하여 절기 날짜의 차이가 때로는 최대 5주일이나 차이가 날 때도 있다고 한다.


이상에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부활을 절기로 만든 것이 주님이 아니라 후대의 인간들이라는 사실이다. 폴리갑이라는 사람은 부활절의 기원을 사도 요한에게서 찾았고, 유세비우스라는 사람은 2세기 초 로마 교회 주교였던 키스투스(Xystus)에게서 부활절의 기원을 찾았다. 하지만 그 기원이 어디서 누구에게서 시작되었든지 절기로서의 부활절은 사람에게서 시작된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은 좋은 의도를 가지고 부활을 기념하고자 했던 사람에게서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의 출생일도 기념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려고 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이 사람의 뜻이 선하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진리에 부합한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점에서 왜 그리스도께서 죽으심과는 달리 부활을 기념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던 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가장 큰 이유는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죽고 끝나는 사건이 아니라 그 후에 계속이 있는 사건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 본문이 전체적으로 이것을 보여주고 있다. 즉 그리스도는 부활하신 후에 영원히 살아 계셔서 주와 그리스도로서 다스리고 계신다. 그리고 부활하신 그의 몸을 성령으로 사는 몸이라고 했다. 죽음도 없고, 죽일 수도 상해할 수도 없고, 약하지도 약해지지도 않으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일하실 수 있는 성령의 몸이라고 했다. 타락 전의 아담의 몸이나 삼손의 힘센 몸은 이런 그리스도의 부활의 몸을 암시해주는 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리스도의 부활의 몸은 아담이나 삼손이 맛보기로 약간 암시해 주었던 몸의 실체요 완성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이런 몸을 가지고 살아계셔서 주와 그리스도로 다스리고 계신다. 온 세상의 주권과 왕권이 그에게 있다. 그는 온 세상의 영원한 주인이요 영원한 왕이시다. 부활을 기념하라고 하지 않은 것은 이런 연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주님이 부활하셔서 다스리는데 부활사건을 떼어서 기념하는 것이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살아계셔서 다스리는 분 앞에서 온 세상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주와 왕으로 경배하며 섬겨야 하는 것이 온 세상이 해야 할 일이다. 달리 말하면 항상 이런 자세로 온 세상은 그 앞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경배란 항상 예배드린다고 하면서 모여서 있으라는 말이 아니라 경외와 찬양의 마음으로 그 앞에서 사는 것이다. 이것이 부활하여 살아계신 주님 앞에서 피조물이 취해야 할 모습이다. 이렇게 하라고 주님은 부활하셔서 사람들을 불러 일깨우시고 자기가 다스리는 나라에 참여하도록 하셨다. 곧 성령으로 부활시켜서 부활의 삶에 참여하게 하시려고 부르신 것이다. 신약 성경은 누누이 이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아는 자의 부활의 삶이다. 그리고 이것이 부활에 대하여 가르쳤지만 부활을 기념할 것에 대하여는 가르치지 않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부활은 새로운 세상 곧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를 의미하는 것이지 기념일로 삼고 절기로 만들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교회의 주일 예배는 바로 이 부활에 참여하고 있음을 되새기며 감사하고 즐거워하는 행사이다. 적어도 기독교회는 한 주일에 한번은 ‘부활’을 되새며 그 삶을 다짐하는 셈이다. 이것이 곧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한 모습이다.  


그러면 부활절을 없애버리는 것이 나을까?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어떤 교회가 성경의 근본적인 의도에 충실하기 위해서 부활절을 없애버리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하고 그렇게 해도 그것을 잘 못 되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며, 또 그렇게 한다고 해서 주의 말씀을 어긴다거나 이단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의 말씀이 죄라거나 이단이라고 규정하지 않는 것을 인간적인 전통에 합류하지 않는다고 해서 정죄한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율법주의요 현대판 유대인들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궁극적인 행동지침은 성경과 그것을 따르는 신자의 양심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 따라서 이것은 장로교 가르침의 가장 중요한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신앙 양심상 성경의 바른 취지를 따르기 위해 취한 행동에 대하여 어떤 다른 사람도 그것을 강요하거나 정죄할 수 없다는 것을 이 신앙고백서는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일은 판단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에 맡기고 조용히 기다려야 할 문제이다. 또 어떤 이들은 ‘만약 부활절을 없앤다면 전도의 기회를 놓치지 않겠는가? 그래서 기독교가 약화되지 않겠는가?’라고 우려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자가 세상에서 부활을 믿는 신앙으로 살아간다면 그 자체가 이미 전도하는 일이 될 것이다. 전도는 교회가 기독교의 본질에 충실 하는 것에 있지, 일시적인 시위행사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편 그냥 그대로 두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도 하다. 교회 대내외적으로 유익한 점이 있다면 그대로 두고 부활을 기념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교회 내적으로는 적어도 부활이 구체적인 날짜와 시간 속에서 있었던 구체적인 사건이었다는 것을 일깨우는 데 유익하다고 할 수 있고, 또 교회 밖으로는 기독교의 다른 점을 세상에 선포하는 일을 하는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이런 유의 유익한 점을 생각할 때에 부활절을 두고 지키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이 전통을 소중하게 여길 필요도 있다. 하지만 부활절이 절기화 되고, 행사화 되고, 그것을 기회로 특별 헌금을 모으는 하나의 기회로 생각되도록 하는 것은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것보다는 예를 들면 10가정의 성도가 가난한 한 가정을 돌보도록 하고, 또 이런 일을 초교파적으로 또는 초국가적 민족적으로 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부활 삶에 참여하는 길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것이야 말로 온 세상의 교회가 한 가족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부활과 부활 참여의 삶은 교회에 본질에 속한 것이지만, 부활절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부활은 진리에 속한 것이지만, 부활절은 교회의 전통에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전통은 진리 문제처럼 절대시할 것은 아니다. 전통은 바뀔 수도 있다.


이제 두 가지만 말하고 이 강론을 끝맺겠다. 첫째, 그리스도의 부활체의 본질에 관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육체의 소생이 아니었다. 이 세상 육체의 소생이라면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살린 사람들 즉 나인성과 과부의 아들이나 나사로 같은 사람들을 부활한 사람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죄와 죽음을 이기시는 분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죽음에서 다시 살려내었던 사람들이다. 이것을 부활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격이 전혀 다르다. 이들은 이 세상 몸으로 죽었다가 그리스도의 능력에 의해서 이 세상 몸으로 다시 살림을 받았었던 사람들이다. 그러다가 그들은 결국 죽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체는 이와는 전혀 다른 영원한 생명체이다. 즉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세상 육신과는 전혀 다른 저 세상의 존재로 살아나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부활로서 저 세상의 몸을 입고 살아나심으로 이 세상을 탈출해버렸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엑소더스 즉 일종의 출애굽이다. 이 세상의 한계를 벗어나버린 사건이다. 이것을 증명해주는 것이 부활한 그리스도의 출현이다. 부활한 그리스도가 무덤을 빠져 나온 것이나, 엠마오의 도상에서 제자들이 잘 알아보지 못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가 또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것이나, 그날 저녁에 제자들이 모인 방에 홀연히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고 떡을 잡수신 사건들은 다 그의 부활이 이 세상의 한계를 벗어난 것임을 보여주는 사건들이다. 이런 부활은 그리스도가 처음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를 부활의 첫 열매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몸은 어떻게 이 육신과 다를까?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몸은 하늘의 실질로 이루어진 몸이라고 할 수 있다. 출애굽기 24장에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장로들이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니 그 발아래가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고 했다. 여기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는 말씀은 순수하기가 하늘의 실질 같았다는 말이다. 하늘의 실질이란 이 세상에는 있을 수 없는 것 즉 하늘에만 속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가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하나님께만 있을 수 있는 것을 뜻한다. 하늘은 곧 하나님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이와 같이 하나님께만 있는 실질로 부활하셨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그의 부활을 성령으로 부활한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성령의 몸이라고 말한 것과 같은 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 자신이 먼저 이런 몸으로 부활하심으로 자기 백성들에게도 이러한 부활의 몸을 입혀 주실 것을 사도는 말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고 사도는 말한다. 따라서 이런 몸은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해할 수도 죽일 수도 없다. 그리스도는 이러한 하늘 몸 즉 성령의 몸으로 부활하셨다. 그러므로 그는 영원히 계시며 어디에나 계시는 몸을 가지게 되었다.


둘째, 이러한 부활은 이 세상 사람들이 인정할 수 없는 사건이다. 이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세계를 믿지도 않으며 받아들이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런 부활을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있을 수 없는 어리석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옛날부터 있었다. 제자들이 그 시체를 훔쳐가고 부활 소문을 퍼뜨렸다고 하는 사람들이 부활 직후부터 있었다. 또 어떤 이들은 예수가 기절하였다가 깨어났다고도 했고, 또는 여자들이 예수가 묻혔던 곳이 아니라 엉뚱한 무덤에 찾아갔다고 하기도 했다. 그리고 합리주의가 뿌리는 내리고 과학적인 사고방식이 지배를 하게 되자, 믿음 없이 신학을 연구한 사람들은 부활을 후대 신자들이 만든 신화라고 생각 했다. 그래서 부활을 당시 비과학적이고 미개했던 시대 사람들의 종교심을 표현해 놓은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사실상 부활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지금도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운동을 하고 있다. 이들은 소위 말해 이성을 모든 판단의 근거로 삼는다. 이들의 하나님은 그들의 이성인 셈이다. 이성과 논리로 맞지 않는 것을 그들은 인정할 수 없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것 또한 그들의 믿음이다.


이들이 이렇게 되는 것은 유일하신 주재이신 하나님을 인정할 수 없거나, 인정한다고 해도 그 하나님은 이 세상에 개입할 수 없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하나님은 저 하늘에 가만히 앉아서 세상의 일에 일체 개입할 수 없는 하나님이다. 이런 신관을 이신론이라고 하기도 한다. 이론적으로 추론해서 인정할 수 있어서 인정은 하지만 실제적으로 주재하시며 다스리시는 하나님으로 믿지 않는다. 이성 내에 있는 하나님이요 신앙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과 논리의 한계 속에 매이는 분이 아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에 잡히지 않는 하나님이다. 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신 하나님이다. 이러한 하나님을 믿으므로 또한 삼위일체를 믿고, 아들 하나님이 땅에 오심과 하늘 존재로서 부활하심도 믿는다. 그리고 그런 분이 지금은 하나님 아버지의 대권을 가지고 온 세상을 다스리시며, 마침내 온 세상을 심판하시고 또 구원하실 것을 믿는다. 이 세상을 심판하여 없애도, 저 세상을 제공하심으로 심판과 구원을 이루실 것이다. 과학이 이와 유사한 인류 구원을 추구하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하나님만이 저 세상을 주심으로 인간과 세상을 구원하실 것이다. 부활은 이 사실을 보장하는 결정적인 대 사건이다. 세상은 이것을 모르지만 교회는 이것을 알고 있다.

 

 

 

대구 언약교회 박길현 목사

http://covenant.kimc.net/cgi-bin/general/read.cgi?board=latest&y_number=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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