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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주차. 환난을 즐거워하라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5. 8. 12.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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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주차. 환난을 즐거워하라


 

 

 

본문: 22:30-23:11

이튿날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고발하는지 진상을 알고자 하여 그 결박을 풀고 명하여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데리고 내려가서 그들 앞에 세우니라.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바울이 이르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바울이 이르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 ~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1. 공회에 선 바울


 

 

 

오늘은 바울이 예루살렘공회, 즉 산헤드린공회에 섰네요. 바울의 삶은 끊임없는 고난이 연속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주로 바울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우리 인생의 환란과 역경에 대해 하나님의 뜻과 은혜를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명색이 강해설교인데 오늘 본문의 배경인 산헤드린공회와 기타 특이사항에 대한 사전 지식을 무시하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먼저, 유대인들의 자치 기구이자 최고의결기관인 산헤드린(sanhedrin)공회에 대해 알아봅니다.

- 원래 이 이름은 히브리어 쉰헤드리온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함께 둘러앉다라는 뜻입니다. 성경적 기원으로는 모세가 임명한 70인 장로회에 그 기원을 둡니다(11:6). 그래서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70명의 회원으로 구성하는데, 주로 바리새인과 제사장계급에 속한 사두개인과, 서기관 및 장로들이 회원이 됩니다. 주로 종교재판을 주관하고 성전의 관리 혹은 치안문제를 다루는데 모든 안건은 만장일치제로 합니다. 안식일과 절기를 제외하곤 공회는 매일 일출 후부터 일몰 전까지 여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재판 시에는 두 명의 증인이 배석했고, 사형에 해당하는 죄는 다음 날 다시 한 번 심의를 거친 뒤 판결하여 억울한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고, 사형이 확정된 죄수에게는 죄를 고백할 수 있는 회개의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한편 각 지방도시에도 공회가 구성되었는데, 각 도시마다 귀족과 제사장과 율법학자들 23명으로 구성하였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공회를 대공회라 하고, 지방은 소공회라 부릅니다.

-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공회의 재판은 완전히 불법적인 것이었습니다. 먼저, 안식일 예비일인 금요일에 소집되어 한 밤 중에 재판이 진행되었습니다. 이는 주간 재판의 원칙에 어긋납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에게는 재심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고 증인도 매수한 사람으로 긴급히 조작하였습니다.

- 이렇게 불법의 길을 걸은 산헤드린공회는 주후 66년 로마에 대한 반란을 주도하다가 70년 티투스 장군이 이끄는 로마 정예군에 의해 완전히 진압되어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불법을 저지르는 개인이나 단체, 국가를 반드시 응징하십니다. 이것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결과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공회 상에서 바울이 어떻게 지혜롭게 처신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 먼저, 대제사장과의 일문일답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바울의 위트가 숨겨져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1절을 보세요. 바울은 공회원들을 형제들이라 부르면서 나는 오늘까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입을 뗍니다. 그러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바로 성전군사에게 명하여 바울의 입을 치라고 합니다. 자초지종을 들어본다거나 심문을 하는 시늉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없습니다. 그저 자기 맘에 들지 않으니까 말도 꺼내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이 정도이면 대제사장의 수준이 엿보입니다.

- 그런데 이런 대제사장의 발언에 대해 바울이 어떻게 응수합니까? 정말 아찔한 발언입니다. 3절을 보면, 대제사장을 회칠한 담이라 부르면서 하나님이 너를 칠 것이다하고 맞받아칩니다. 대제사장에게 이 정도로 대들면 거의 죽어야 합니다.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선 이렇게 응수하지 못합니다. 바울의 이 말에 더 놀란 사람들은 공회원들입니다. 4절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감히 욕하느냐고 힐문합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반응입니다.

- 그러자 바울의 답변이 기막힙니다. 한 마디로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몰랐다는 것입니다. 물론 액면 그대로는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바울이 자기의 입을 치라고 명령을 내린 사람이 대제사장인 줄 몰랐을까요? 아니면 알고도 모른 척 했을까요? 상식적으로 보면 바울이 대제사장을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먼저 자리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은 좌석의 중앙에 앉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의 동의나 허가 없이 명령을 내리지 못합니다. 굳이 이것이 아니라도 바울은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자라고 수학한 바리새파 중의 바리새파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대제사장을 몰랐을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 그렇다면 이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울의 기지가 빚어낸 하나의 반전드라마입니다. 바울은 이런 기지를 가지고 위선에 빠진 대제사장과 공회원들을 희롱한 것입니다. 그 희롱은 계속 이어집니다. 5절에서 대제사장이라고 소개받고서도 그를 백성의 관리라고 표현합니다. 공회원들은 대제사장을 하나님의 대제사장이라 부르지만 바울은 그를 단지 백성의 관리 즉, ‘로마의 관리쯤으로 호칭합니다. 다시 말해 성경적으로도 모든 그리스도인은 위의 권세를 존중하고 순복해야 합니다. 바울은 그런 차원에서 대제사장을 권세를 가진 관리자의 한 사람으로 치부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몰랐지만 백성의 관리라면 성경에 이른 것처럼 존중하겠다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대제사장하고는 관계치 않습니다. 바로 이어서 바울은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로 양분된 공회의 치명적인 약점을 파고듭니다. 그것은 바로 부활에 대한 상이한 해석과 입장입니다. 그 결과 예상했던 대로 공회는 부활을 놓고 설전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공회는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습니다. 공회의 목적은 바울을 심문하는 것이었는데 바울의 전략에 말려들어 자기들끼리 치고받는 싸움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이보다 더한 촌극이 없을 것입니다.

- 이를 지켜보던 천부장은 아마 어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죄목이 무엇인지 조사하라고 공회를 모집하고 회의를 열었는데 하라는 일은 하지 않고 엉뚱하게 자기들끼리 싸움질이나 하고 있는 광경이 얼마나 추하고 우스워보였겠습니까? 그래서 10절에 보니, 천부장은 다시 군인들로 하여금 바울을 공회에서 빼내어 안토니오 요새로 데리고 갑니다.

- 지난 주간에 기독교 관련 신문들에 실린 주요기사들을 보면서 한국의 교회들이 참 많이 싸우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서로 자기주장을 펼치면서 상대를 향해 거짓말하지 말라고 하고 성명서를 내고 기자회견을 자처하고 고소 고발을 하는 등 삿대질을 하는 모습들이 지상에 그대로 중계되어 있었습니다. 공회원들의 싸우는 모습을 구경하는 천부장과 군사들처럼 지금 한국교회의 싸움질을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도 똑같이 혀를 차며 기막혀 하고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권위나 명예, 이미지 이런 것들이 한 번 실추하면 정말 회복하기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권위와 명예와 능력과 경건함과 거룩함이 손상되지 않도록 늘 각성하고 개어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장하고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며 거룩한 성도의삶을 지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복음 전도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가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그 자체가 복음을 증거하고 전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일상생활에서 거룩해 지십시오. 하나님의 말씀대로 빛의 자녀처럼 살아야 합니다. 자기 삶은 엉망으로 살면서 다른 사람을 감화시키지 못합니다. 복음으로 거듭난 사람은 그에 알맞은 거듭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여전히 세상 사람과 같은 말을 하고 행동을 하고 싸움을 한다면 결코 하나님은 그를 거듭난 사람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2. 바울의 삶


 

 

 

, 다시 바울 이야기로 이어가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나타났듯이 거듭난 이후부터 사도 바울의 삶은 이전의 삶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완전히 다른 삶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에 의해 기획되고 주도되고 인도되고 통치되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삶은 하나님의 복을 받아 복을 누리는 행복한 삶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울을 보면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하루도 편한 날이 없을 정도입니다. 물론 중간 중간에 안디옥교회에서나 두란노서원에서 혹은 고린도교회에서 장기간 체류할 때 즐거운 일, 고난에서 잠시 벗어난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바울의 삶은 지독히도 괴로운 인생길이었습니다.


 

 

 

우리라면 만약 하나님이 가라고 해서 가고 말하라고 해서 말을 했는데 돌아오는 것은 반대자들의 삿대질이요 주먹질이요 돌팔매질이요 매질이요 감옥이 갇히는 일이요 돌에 맞아 죽는 일이라면 요나처럼 고래 뱃속이라도 도망하여 숨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이나 말을 하지 않고 묵묵히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합니다. 오늘도 바울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인도함을 받아 예루살렘에 와 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은 제2의 고향이자 정신적인 중심터입니다. 이곳에서 자라고 이곳에서 배우고 익히어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바리새파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모든 유대인들은 바울을 혐오하고 죽이려고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이렇게 고향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나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따돌림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


 

 

 

, 이럴 때 바울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아마 인간적으로 바울도 한 밤중에 낙담이 들고 신세를 한탄하며 탄식했을 것입니다. 제아무리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도라 해도 바울도 인간입니다. 인간은 괴로우면 본능적으로 아파합니다. 그것이 정상입니다. 바울도 아팠을 것입니다. 그래서 울부짖고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렇게 통회하는 자를 가까이 하십니다. 다윗 왕은 괴로울 때 하나님께 나아와 통곡했습니다. 시편 1권 중 몇 구절을 통해 은혜받기를 원합니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셀라)”(3:4)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5:2)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이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13:1)

여호와여 의의 호소를 들으소서 나의 울부짖음에 주의하소서 거짓되지 않은 입술에서 나오는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17: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지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22:1)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22:6)

여호와여 내가 고통 중에 있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근심 때문에 눈과 영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31:9)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34:18)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40:1)


 

 

 

그러므로 인간은 인간일 뿐입니다. 인간은 성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지막 나팔소리와 함께 주님이 재림하실 때 모든 성도들이 홀연히 단 번에 변하는 그 순간에 이루어질 뿐입니다. 카톨릭교회는 많은 사람들을 성자로 추대하고 추앙합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좋은 일 같지만 다 부질없는 인본주의적 발상들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죄인의 굴레를 벗고 주님에 의해 의인으로 불리우고 있지만(칭의), 지금도 여전히 죄악의 삶을 살아가는 죄인입니다. 아직도 주님이 바라시는 본래의 형상과 모양을 회복하지 못한 그저 진행형의 존재들입니다. 성자는 주님 한 분뿐이십니다. 우리 가운데 성자는 없습니다. 인간들이 제아무리 성자를 만들어 추앙한다고 해도 하나님에 의한 성자가 아니고선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성자라고, 혹은 괜찮은 사람이라고, 혹은 꽤 똑똑하고 능력 있고 남보다 자기가 하면 잘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옳고 남은 틀렸다고 쉽게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평화와 화목을 깨트리는 것입니다. 늘 자기를 겸손의 자리로 끌고 내려와야 합니다. 겸손의 자리는 가장 밑바닥에 있습니다. 가장 낮은 자리가 겸손의 자리입니다. 우리 소망은 하늘에 두지만 우리 발바닥은 땅에 붙어 있습니다. 땅에 붙어 있는 한 땅의 삶을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가장 열심히 사는 사람은 최고로 겸손한 삶을 살게 됩니다. 겸손한 사람은 늘 감사합니다. 그래서 열심과 겸손과 감사는 하나로 통하여 있습니다. 게으른 사람이 교만하고 불평하는 법입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늘 소리 없이,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게 겸허한 사람을 삽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최선을 다 하는 사람은 단 번에 한꺼번에 일시에 무엇을 이루겠다고 시도하지 않습니다. 꾸준히, 지속적으로, 참을성을 다해 맡은 일에 충성합니다.


 

 

 

3. 하나님의 위로


 

 

 

한 밤중에 바울도 괴로워했습니다. 그래서 기도했습니다. 물론 그런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이 밤늦도록 자지 않았다면 그가 무엇을 했다고 유추해야 합니까? 도둑이라면 도둑질을 했을 것이고, 게임중독자라면 게임을 했을 것이지만 바울은 사도이니 말씀을 읽거나 기도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11절을 보니, 하나님이 다시 바울에게 나타났는데 바울 곁에 서서 이르셨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기도에 응답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괴로움을 들으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나타나신 것 까지는 좋았는데 오늘 하나님은 전혀 다른 말씀을 전하시는 것입니다.

담대하라!”(θαρσει, take courage!)


 

 

 

그러고선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솔직히 이 말씀은 위로라기보다 앞으로 해야 할 일, 앞으로 바울이 겪어야 할 일에 대해 미리 고지하시는 말씀입니다. 물론 용기를 내라하신 것도 위로입니다. 그러나 우리 상식으로는 하나님이 나타나시어 네 수고를 내가 알고 있다든지 마음 아파하지 말라든지 아니면 앞으로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라든지 하면 더 좋았을 덴데 그런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은 괴로워하는 바울에게 지금도 괴롭지만 앞으로도 괴로울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이것은 좀 냉정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님의 섭리가 내재되어 있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굉장히 낙담해 있고 의기소침해 있습니다. 자기 생각에는 예루살렘의 일이 순조롭지 못한 것을 보니 로마도 못 가고 여기서 중단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바로 이 때 하나님이 나타나시어 예루살렘에서 겪는 일이 실패도 아니고 이것 때문에 로마에 가지 못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분명히 약속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복음을 전할 것이라는 이 약속을 지금 낙담해 있는 바울에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도에 대해 깊이 있는 이해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 수준으로 하나님을 이해합니다. 자기 인생에 개입하신 하나님을 잘못 이해하는 일들이 허다합니다. 당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십니까? 만약 하나님이 바울에게 하신 것처럼 인생의 행로를 모질고 험난하게 이끄신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실 것입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 왜 나의 인생을 이런 길로 끌고 가십니까?’하고 하나님을 불평하지는 않을까요?


 

 

 

4. 환난을 즐거워하라


 

 

 

대체적으로 우리 신앙의 문제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발생합니다. 하나님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인간의 문제로 고통과 환난이 찾아듭니다. 그리고 환난이 오면 그것을 피하고자 몸부림을 칩니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당연한 반응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늘 모든 것의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수준에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환난이 오면 그것을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니라”(5:3-4)


 

 

 

환난을 즐거워하라구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방식입니다. 과연 환난을 즐거워할 사람이 있습니까? 그럼에도 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환난 뒤에 숨은 엄청난 보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환난이 그냥 환난으로 끝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열심히 공부를 했는데 목표를 이루지 못한다면 허망할 것입니다. 고생만 잔뜩 한 결과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러신 분이 아니십니다. 환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 있습니다.


 

 

 

첫째로 환난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을 절실하게 느끼도록 하시고 주님을 찾게 만드십니다. 사람은 편안하고 여유가 있을 때엔 주님을 찾지 않습니다. 그렇게 예수 믿으라고 복음을 전했음에도 귓등으로도 듣지 않던 죽을병에 걸린 뒤엔 살려달라고 매달립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뜨거움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꼭 일이 눈앞에 닥쳐야 서두르는 게으름뱅이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주님은 그들에게 환난을 허락하시고 그들이 주님을 찾도록 만드십니다. 그러므로 환난은 구원을 위한 좋은 은혜의 방편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구원보다 더 좋은 은혜가 어디 있습니까? 구원을 위해서라면 지옥 문 앞에라도 갔다 오라면 갔다 와야 합니다. 구원이 제일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환난은 자기 자신을 바로 아는 첩경입니다. 사람은 자기 혼자 있으면 절대로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또 편안한 상황에 있으면 자기가 좋은 사람이라고 착각을 하기 쉽습니다. 신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신앙이 괜찮다고 생각하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남의 부족한 점이나 허물이 보일 때엔 혀를 차고 안타까워합니다. 자기는 말씀을 많이 읽고 많이 암송하고 교회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말씀을 암송한다고 교회생활을 열심히만 한다고 해서 좋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알고 있고 외우고 있는 말씀들이 현실에 부딪혔을 때 그것이 실제로 현실 속에서 실현되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말로는 은혜를 말하면서 실제로는 말씀대로 살지 못한다면 그 신앙은 환난 속에 연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난은 자기를 살리고 자기를 성숙하게 만드는 첩경입니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환난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바로 이 환난이 바울을 위대한 사도로 살게 한 원동력이 되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닥친 환난을 오히려 슬퍼할 것이 아니라 즐거워할 줄 아는 성숙한 성도들이 되어야겠습니다. 하나님에 의한 고난은 반드시 유익함으로 되돌아 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고난을 슬퍼하지 말고 기뻐하시길 바랍니다. 육신을 좀 괴롭고 힘들다 해도 고난을 통과한 영혼은 아름다운 열매로 맺어집니다. 이 열매를 하나님이 수확하십니다. 자나 깨나 하나님의 영광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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