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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주차. 약삭 빠르게 처신하는 자들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5. 8. 26.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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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주차. 약삭 빠르게 처신하는 자들


 

 

본문: 23:22-35

또 이 아래와 같이 편지하니 일렀으되, 총독 벨릭스 각하께 문안하나이다. 이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잡혀 줄게 된 것을 내가 로마 사람인 줄 알고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였다가,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고발하는지 알고자 하여 그들의 공회로 데리고 내려갔더니, 고발하는 것이 그들의 율법 문제에 관한 것뿐이요 한 가지도 죽이거나 결박할 사유가 없음을 발견하였나이다. 그러나 이 사람을 해하려는 간계가 있다고 누가 내게 알려 주기로 곧 당신께로 보내며 또 고발하는 사람들도 당신 앞에서 그에 대하여 말하라 하였나이다 하였더라”( 25-30)


 

 

1. 천부장 루시아


 

 

오늘 이야기의 두 주인공은 루시아라는 천부장과 벨릭스라는 로마 총독입니다.

 

 

먼저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여기서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합니다)는 돈을 주고 로마시민권을 얻은 사람으로 현재 로마의 예루살렘 주둔군의 책임자입니다. 이 부대는 정예부대가 아니라 일종의 정예부대를 보조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예루살렘의 치안을 담당하거나 반란 등 비상사태 시 사전 예방을 하는 것이 주된 임무입니다. 주둔군은 도합 1천명인데 이들은 보병과 기병, 그리고 창병, 혹은 투창병으로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지금 로마 사람인 바울을 재판 절차도 거치지 않고 매질부터 하려 한 것으로 인해 몹시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습니다. 혹시 바울이 이 사실을 상관에게 보고라도 한다면 그의 신상이 위태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 바울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입장도 완전히 무시할 수 없기에 그는 바울을 유대인 법정에 세우고 그의 혐의가 무엇인지 조사하여 이 일을 잘 처리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유대인 법정은 엉뚱하게도 부활논쟁에 휩싸여 바울을 재판하고자 한 본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자기들끼리 싸움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할 수 없이 루시아는 다시 바울을 요새로 데리고 와야 했습니다.


 

 

성경의 기록은 없지만 좀만 상상력을 동원해 보면 이대의 루시아의 입장이 참 난처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을 죽이라고 떼를 쓰는 유대인들을 보면 쉽게 풀어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로마시민인 바울을 무작정 요새에 구류해 둘 수도 없었습니다. 루시아의 고민은 깊어만 갔습니다. 이런 난처한 상황을 빗대어 우리는 호랑이 꼬리를 잡았다고 표현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잡은 호랑이꼬리를 놓으면 자기가 위험해집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호랑이 꼬리를 붙들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호랑이가 꼬리가 잡혀 있는 동안에는 힘을 쓰지 못하겠지만 잡은 사람의 힘이 빠져 꼬리를 놓치는 순간 상황은 역전됩니다. 지금 루시아의 입장이 그렇습니다. 정말 잠 못 드는 밤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루시아에게 희소식이 들려 왔습니다. 바울을 암살하고자 하는 모의가 있다는 첩보가 드려온 것입니다. 그것도 40여명이 달하는 유대인 암살자들이 회의장에 매복한다는 것은 매우 긴박한 일이었습니다. 순간, 루시아의 머리를 섬광처럼 스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무릎을 치며 탄성을 질렀습니다. “이때다!” 정말 절묘한 타이밍이었습니다. 가장 난처한 때에 절호의 기회가 루시아에게 찾아 온 것입니다.


 

 

생각이 정리되자 루시아는 매우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머리를 싸매고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까 하고 고민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신속하게 모든 일이 처리되고 있습니다.

- 22절부터 보니, 먼저 루시아는 바울의 조카에게 바울 암살모의에 대해 함구할 것을 부탁합니다. 여기에도 루시아의 손익 계산이 깔린 듯합니다. 루시아는 바울을 호송하는 일이 제3자의 신고에 의해 수행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기의 판단과 결정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 23절에 보니 백부장 둘을 불러 군사를 준비하라고 명령합니다. 즉시 부하들에게 바울을 가이사랴로 호송하라고 명령합니다. 숫자적으로 보면 1천명의 주둔군 중에서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군인들을 뽑아서 바울을 호송하도록 했습니다. 보병 200, 기병 70, 창병 200명이면 도합 470명의 군인이 동원됩니다.

- 여기에 24절에 보면 혹시 모를 유대인들의 기습공격에 대비키 위해 짐승까지 준비시킵니다. 아마 잘 훈련된 전투견일 것입니다.

 

 

이 정도면 로마역사상 가장 거대한 죄수호송부대가 꾸려진 셈이 됩니다. 루시아가 바울 한 사람을 호송하기 위해 이렇게 까지 많은 군인들을 동원하고 규모를 방대하게 꾸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 그것은 바울을 가이사랴로 이송하기 위해선 이 문제가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예루살렘사회에서 매우 중대한 문제임을 인식시키기 위함입니다. 비록 바울이 로마제국을 대상으로 반역을 괴하거나 정치적으로 요주의 인물은 아니지만 종교적으로 유대인들의 심기를 거슬릴 만큼 바울이라는 사람이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있는 어떤 교파의 우두머리라는 것을 암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 액면적으로 보면 로마시민에 대한 정식 재판권은 총독에게 있었으므로 바울을 가이사랴의 총독부로 이송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여기에 바울에 대한 살해 의도가 발각되었으므로 루시아의 조치는 즉각적이고 자신의 직무를 충실히 처리한 것입니다. 만약 바울이 열광적인 유대인들의 손에 암살당한다면 루시아는 로마시민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 책임을 져야 하고, 자칫 일 일을 계기로 폭동이 일어날지 모르는 일입니다.

- 그러나 좀 더 정치적인 계산을 해 본다면 루시아는 지금 골치 아픈 바울을 얼른 총독에게 이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 위급한 상황을 핑계로 루시아는 이제 바울 문제를 가이사랴에 있는 총독에게 떠넘기기로 한 것입니다.

 

 

여기에 루시아는 총독에게 상세한 내용을 적은 편지를 동봉합니다. 아마 이런 편지는 당시 사회에서 통용되던 편지양식이거나 군대에서의 일종의 보고서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당시사회의 편지의 특징은 늘 문안인사를 먼저 하는 것입니다. 26절에서 루시아는 총독에게 깍듯이 문안인사를 전합니다. 문안인사 시에 중요한 것은 호칭입니다. 루시아는 총독을 각하’(most exellent)라고 호칭합니다. 이 명칭은 당시 기사계급이나 속주의 통치자에게 붙여진 최고 존칭으로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기사는 로마제국에서 노련한 정치가들인 원로원(senator) 다음 가는 서열에 위치했습니다. 다음으로 루시아는 사건의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합니다. 한 마디로 유대인들의 율법문제로 그들에게 잡혀 죽게 될 로마사람을 구출하여 총독에게 보낸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자기 업적을 총독에게 보고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편지에서 루시아는 자신의 실책이나 과오를 언급하지 않고 잇다는 것입니다. 로마 사람인 바울을 재판도 열지 않고 매질을 가하려했던 사실은 일체 숨기고 있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이 어찌 100% 정직할 수 있습니까? 어떤 이는 자랑스럽게 자기는 거짓말 할 줄 모른다고 시치미를 떼기도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과연 만천하에 드러나도 부끄럽지 않을 위인이 이 세상에 존재할까요? 인간이 얼마나 추악하고 부패한 존재인지는 이미 성경이 낱낱이 고발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2. 호송작전


 

 

31절부터 실제로 한 밤중에 바울을 호송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호위부대는 바울을 데리고 밤 9시쯤 출발합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무렵에 안디바드리(Antipatris)에 도착합니다. 거리상으로는 예루살렘에서 약 35마일(56km)에 해당합니다. 여건으로 보아 상당히 보병들이 강행군 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 고장은 예루살렘 구릉의 끝에 위치합니다. 현재의 라스 엘- 아인이라는 곳으로 이 도시는 헤롯 대왕이 물 좋고 산 좋은 카파르 사바의 평원에 세운 휴양도시로 그 아버지 안티파터의 이름을 따 불렀습니다.

 

 

이런 도시 이름 하나에서도 유대인들의 서글픈 현실을 읽을 수 있습니다. 알다시피 헤롯가문은 이두매지역 출신들입니다. 이두매는 원래 야곱과 쌍둥이 형제인 에서의 후손인 에돔사람들의 땅을 헬라식으로 일컫는 이름입니다. 에돔사람들은 세일산에 거주했는데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자 북쪽의 나바티아 사람들이 쳐들어옵니다. 그러자 사해 서쪽에 위치한 지금의 이두매지역으로 밀려 내려와 정착한 것입니다. 지리적으로는 브엘세바에서 벧술까지로 예루살렘과는 불과 24km 정도의 거리에 위치합니다. 이후 이두매는 오랫동안 이스라엘에 복속되어 조공을 바치는 등 신하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전 63년에 로마의 폼페이 장군이 이 지역을 점령한 이후 유대와 이두매지역의 통치를 이두매 출신의 안티파터 총독에게 위임했는데 안티파터의 아들이 그 유명한 헤롯대왕입니다. 이것이 헤롯가문의 시작입니다. 이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종처럼 부리던 사람을 왕으로 모시고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헤롯은 부지런히 유대 땅에 헬라식 도시들을 건설했습니다. 바울을 데리고 가고자 하는 가이사랴도 그런 도시입니다. 이곳엔 헤롯대왕의 제 2의 궁전을 건설한 도시입니다. 여름철에는 가이사랴에 와서 마음껏 휴양하고 정사를 돌보던 곳이 가이사랴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한 마디로 유대인의 자존심을 깡그리 부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한 거룩한 땅에서 유대인의 흔적을 지우겠다는 의미입니다. 유대인들은 이제 그들의 종이 되어 그들이 새로 건설한 신도시들을 바라보며 신세한탄을 해야 했습니다.


 

 

이 때의 유대역사를 바라보면 일제시대에 살았던 우리 민족의 슬픈 역사와 어쩌면 저리도 같을까 하고 놀라게 됩니다. 이렇게 국가의 주권을 뺏기면 민족 전체가 종이 됩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서서 애국운동을 해야 합니까? 나라가 없으면 신앙도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자유를 구가하고 누리기 위해서라도 애국해야 합니다. 국가의 위정자들을 위해 쉼 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지역의 국회의원을 비롯한 선량들이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후원해야 합니다.


 

 

, 밤새 뛰고 달리고 한 끝에 군사들은 드디어 안디바드리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마병 70명만 남고 다른 군인들은 다시 돌아갑니다. 다시 말하지만 안디바드리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인들의 영향력이 더 이상 미치지 못하는 도시입니다. 이 도시에는 유대인들보다 헬라인들을 비롯한 이방인들이 더 많이 거주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가이사랴까지는 27마일(44km)에 불과합니다. 또 이 여정은 대부분 이방인들이 거주하는 곳을 지나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많은 군사가 필요치 않은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바울은 약 100km의 거리를 죄수의 신분이 되어 가이사랴로 호송되었습니다. 이후 바울은 여기서 2년간 총독관저에 감금된 채 세월을 보냅니다. ‘내가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고 꿈꾸며 하나님에게 간구했던 바울은 하나님이 예고한대로 실제로 결박을 당하고야 말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조금도 주눅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미 하나님과 형제들 앞에서 자신의 굳은 신앙고백을 한 바 있습니다. 다시 한 번 그 때의 신앙고백을 경청해 보겠습니다. 2023-24절을 통해 다시 은혜를 받겠습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3. 벨릭스 총독


 

 

다음으로 우리는 벨릭스 총독에 대해 약간의 사전지식이 필요합니다. 주후 52년부터 59년 사이에 유대 총독이었던 그의 본명은 안토니우스 벨릭스인데 원래 그의 조상은 노예 출신입니다. 그런 그가 기사계급에 오르게 된 것은 순전히 그의 형 팔라스 덕분입니다. 팔라스는 그라우디오 황제의 어머니인 안토니아의 종이었는데 그녀의 호의로 자유민이 되었고 그녀의 이름을 따서 안토니우스라는 씨족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벨릭스는 총독이 되기 전에는 사마리아의 쿠마누스 장군 수하에 있었는데 당시 전 유대지역에 반란이 증가하자 유대총독으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반란자들과 자객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유대인들을 탄압하여 악명을 떨쳤습니다. 로마의 역사가인 타키투스는 그는 노예의 심성을 가지고 왕 노릇을 했다고 기록했습니다. 한편,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여자들로부터는 인기가 있었든지 세 명의 부인을 얻었는데 그녀들 모두 왕족이요 공주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첫째부인이 클레오파트라의 손녀였다고 전해집니다.


 

 

아무튼 벨릭스 총독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군사들로부터 뜻밖에 죄수를 인계 받습니다. 모든 총독들이 그랬듯이 유대인문제라고 하면 고개를 흔들 만큼 귀찮아했습니다. 세상에 제일 귀찮은 일이 종교적인 문제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이라고 합니다. 판사들도 종교재판을 배정받으면 우선 상을 찌푸린다고 합니다. 잘해야 본전도 못 찾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벨릭스 총독도 귀찮은 듯이 바울을 쳐다보더니 이렇게 묻습니다. 34절입니다.

어느 영지 사람이냐?”

 

 

무슨 죄목인지, 바울이 어떤 사람인지가 궁금한 것이 아니라 이 죄수의 일이 내 관할의 문제인지 아닌지 부터 따지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내가 맡아 처리하기 싫다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바울이 자기 관할이 아니라면 얼른 다른 관할로 더 넘기려는 수작입니다. 만약 바울이 수리아나 아나톨리아 왕국의 출신이라면 그 영지의 통치자에게 바울을 보낼 심산입니다. 그러나 벨릭스의 기대와는 달리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 출신의 로마시민입니다. 이방인도 아니고 신분상으로는 분명히 로마시민입니다. 그러자 벨릭스는 마지못해 이렇게 바울문제를 처리합니다. 35절에 보니, 바울을 고소자들이 올 때까지 헤롯 궁에 가두라고 했습니다. 헤롯 궁은 지금은 프라이토리움이라 부르는 총독의 관저로 사용하고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 지금 말로 죄를 확정 받지 않은 미결수들을 구류하는 임시감옥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4. 교훈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바울은 가이사랴로 호송되었습니다. 가이사랴는 항구도시입니다. 바울은 아마 속으로 직감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항구도시로 나를 보낸 것은 반드시 로마로 가는 배를 이곳에서 타게 하실 것을 예감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 하나님의 섭리를 이제 어느 정도 예측하고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른 사도입니다. 물론 사도라고 해서 하나님의 신비한 수준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아는 것은 아니지만 바울이 이곳에서 다른 언급을 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미 바울은 모든 마음의 결심을 마친 상태로 보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묵묵하게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모든 일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당장 현실은 내게 불리하게 전개될지라도 이 한경 자체가 하나님에 의해 조종되고 통치된다는 것을 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확실히 인지하는 수준에 이르면 원망과 불평과 억울한 마음이 사라집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우린 그저 감사할 일만 남게 됩니다.

 

 

반면에 세상 사람들은 얼마나 약삭빠른가요? 약삭빠른 사람의 판단과 결정은 매우 치밀합니다. 루시아를 보세요. 그 짧은 시간에 이 사건이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예루살렘사회를 흔들기에 충분할 만큼 긴급한 사태임을 강조하기 위해 그가 기획한 호송작전을 보세요. 얼마나 신속정확하고 철저합니까? 벨릭스 총독은 어떻습니까? 그는 한사코 바울소송사건을 맡지 않기 위해 잔꾀를 부립니다. 관할을 따지고 나중에는 헤롯 아그립바 왕을 불러 그에게 바울을 떠넘기려고 합니다. 사람은 유, 불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자기를 보호하려는 반응은 매우 신속하고 고단수입니다. 이것은 생존보호본능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십자가의 정신을 이야기해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정신은 한 마디로 이 생존보호본능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십자가에 자기를 못 박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자기부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자신을 위한 모든 유익한 일을 십자가에 못 박고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사람이 거듭난 사람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자기 생명을 위해 존재하고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고 일합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것은 천지가 개벽하는 사건입니다.

 

 

내가 정말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정말 회심하고 중생하여 이제 남은 생애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수 있는 인간인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여기에 다음의 세 가지 질문을 던지기를 원합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해 살고 일하고 존재하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꿈꾸는가?’

나의 유익이 아니라 다른 지체들의 유익을 위해 사는 사람인가?’


 

 

이 질문 앞에 참된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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