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33주차. 죽일만큼 밉습니까?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5. 8. 20. 07:52

본문

33주차. 죽일만큼 밉습니까?


 

 

 

날이 새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 하겠다 하고(12),~ 바울의 생질이 그들이 매복하여 있다 함을 듣고 와서 영내로 들어가 바울에게 알린지라. 바울이 한 백부장을 청하여 이르되 이 청년을 천부장에게로 인도하라 그에게 무슨 할 말이 있다 하니, 천부장에게로 데리고 가서 이르되 죄수 바울이 나를 불러 이 청년이 당신께 할 말이 있다 하여 데리고 가기를 청하더이다 하매, 천부장이 그의 손을 잡고 물러가서 조용히 묻되 내게 할 말이 무엇이냐, 대답하되 유대인들이 공모하기를 그들이 바울에 대하여 더 자세한 것을 묻기 위함이라 하고 내일 그를 데리고 공회로 내려오기를 당신께 청하자 하였으니, 당신은 그들의 청함을 따르지 마옵소서 그들 중에서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기로 맹세한 자 사십 여명이 그를 죽이려고 숨어서 다 준비하고 당신의 허락만 기다리나이다 하니,(16-21)


 

 

 

1. 암살모의


 

 

 

지난주에는 예루살렘에서 배척당하고 핍박받는 바울의 심정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직접 겪지 않으면 남의 아픔과 슬픔을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동병상련이라는 말이 있듯이 주님으로 인해 핍박을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바울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릇 그리스도인이란 동병상련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란 이름 하나로 인해 세상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고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주목 받는 다는 것은 편한 입장이 아닙니다. 조금만 실수하고 잘못을 범해도 그 대가는 보통 사람들에 비해 혹독하게 치룹니다. 언제든지 저들은 교회를 향해 돌을 던질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왜냐구요? 그것은 성경이 증언하는 바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여 하나님을 부인하고 진리를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기 싫어하고 그리스도인들이 잘난 체 하는 것을 꼴도 보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저들은 본능적으로 복음의 진리를 배척하고 매도하는 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자기 머리 위에 쌓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 저들을 우리는 불쌍히 여기고 복음을 전하고 기도하고 사랑해 주어야 합니다.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고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야 합니다. 나를 핍박하는 자를 당장이라도 미워하고 내치고 싶더라도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자비와 긍휼과 오래 참으심과 용서하심을 증언하고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라고 간청해야 합니다.


 

 

 

솔직히 이것은 우리를 힘들게 하고 슬프게 하는 일입니다. 정말 좋은 관계 속에서 지내고 싶고 진리를 선물하고 싶은 데 한사코 그것만은 받을 수 없다고 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한숨이 나오고 절망감이 밀려 들 것입니다. 바울을 보세요. 긴 선교 여행을 마치고 자신이 자라고 배우고 뛰놀았던 예루살렘에 돌아왔습니다. 야고보를 비롯한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선교 보고를 하고 구제헌금을 전달하고 나실인처럼 약속한 결례를 치루고 다시 로마와 서바나로 선교를 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전에서 바울은 유대인 동족들에게 붙잡혀 온갖 모욕과 저주와 폭행을 당합니다. 발에 짓밟히고 돌에 맞아 죽음 직전에 겨우 천부장과 로마군인들에 의해 구출되었지만 여전히 그의 몸은 로마군에게 억류된 신세입니다. 공회를 통해 바울은 자신의 입장을 다시 변호하려 했지만 대제사장 아나니아의 제지로 성사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시 바울은 천부장의 손에 의해 안토니오 요새로 돌아와 구류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오늘도 다시 슬픈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유대인들은 분명히 성전에 있던 바울을 잡았을 때 바울을 죽이고자 시도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교묘하게도 군중심리를 이용한 살인시도였습니다. 누가 한 번 죽여라하고 고함을 치면 우르르 몰려가 너도나도 발길질을 하고 돌을 던지는 것입니다. 군중은 죄책감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때 천부장을 보내어 바울을 구출하십니다. 유대인들은 할 수 없이 바울을 로마군의 손에 넘겨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강경파들, 특히 부활을 전하는 바울에 대해 적개심을 가진 사두개파들이 들끓었습니다. 그들 중 40여 명에 달하는 자들이 작당을 하고 이렇게 맹세합니다. 12절을 보세요.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고 선언합니다. 나아가 14절에서 자신들의 확고한 뜻을 보증받기 위해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가서 다시 맹세를 합니다.

 

 

 

 

이것은 암살모의에 대해 유대사회의 최고의결기관인 산헤드린공회가 공식적으로 승인을 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이는 안중근 의사와 윤봉길 의사 등의 암살을 승인한 상해 임시정부와 같은 입장입니다. 저들도 그런 심정으로 하나님을 모욕한 바울을 죽이는 것이 의로운 일이라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아마 바리새파가 거론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번 작당에는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바리새파는 앞선 공회에서 부활에 대해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바울을 굳이 죽일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의 입장에서는 끝도 없는 핍박이요 위험한 상황의 연속입니다. 이런 환경에 처하면 제아무리 바울이라 해도 절망감이 밀려들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절망감이야 말로 그리스도인이 다시 회복하는 신호탄이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왜냐구요? 절망감보다 한 사람을 기도의 지리로 이끄는 힘은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이 수월하게 풀리고 안전하고 행복한 환경이 지속되면 사람은 기도를 놓칩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낙담하게 하고 힘이 들고 괴로운 이런 환경 속에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때가 기도할 때요, 그때가 바로 하나님의 응답이 있는 절묘한 때입니다. 바울도 그랬습니다. 한 밤중에 바울은 낙담과 절망으로 통곡하며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런 바울을 하나님이 모르쇠로 일관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나타나시었습니다. 그리고 담대하라고 위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보혜사이십니다. 보혜사는 우리의 위로자요 대언자요 우리를 가르치시는 교사이십니다

 

 

 

 

자주 강조하지만 모든 일은 하나님의 작정하심과 예정하심과 허용하심에 따라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고 합니다. 욥의 고난도 하나님이 허용하신 것입니다. 반대로 제아무리 누구를 죽이고자 해도 하나님이 허락지 않으시면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못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풀무불에서도 살아났습니다. 바울을 죽이고자 작당을 했지만 그 음모는 바울의 생질(조카)이라는 사람에 의해 들통이 납니다. 일설에는 바울의 누이가 있었는데 그 아들이 예루살렘에 유학을 와서 자랐다고 전해집니다. 아쉽게도 바울의 가족에 대해선 그 이상의 정보가 없습니다. 아마 바울은 이 청년의 외삼촌이 될 것입니다.


 

 

 

바울의 조카가 어떻게 이렇게 귀한 정보를 입수했는지에 대해서도 모릅니다. 가장 쉬운 추측은 암살을 모의한 40여 명 중 아는 사람을 통해서 정보를 입수했을 가능성입니다. 아니면 우연히 작당하는 자리에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바울을 암살하고자 하는 그들의 모의는 이렇게 자신들이 모르는 사이에 기밀이 누설되어 천부장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일을 우연한 일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섭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개입하신 정황임을 쉽게 눈치 챕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의 눈에는 자연인들이 볼 수 없는 일들이 보입니다. 현미경을 들고서도 보이지 않는 것들이 신앙의 눈에는 포착됩니다. 이렇게 신비한 일을 보는 눈을 일러 매직아이라 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이 눈이 장착되어지길 기대합니다

 

 

 

 

2. 살인죄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대충 이 정도입니다. 그러나 정작 오늘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은 살인죄에 관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살인하고자 계획을 세웠습니다. 암살은 살인행위입니다. 요즘 영화 암살이 인기라고 합니다. 아마 일제시대 때 간악한 무리에 대한 의로운 응징이 관객들의 호응을 얻는 모양입니다. 암살은 당사자 모르게 살인을 계획하고 죽이는 것을 말합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암살사건들이 즐비합니다. 우리나라의 김구 선생이나 박정희 대통령, 인도의 간디, 미국의 링컨과 케네디 대통령 등이 암살로 죽었습니다. 이런 암살은 범죄행위입니다. 반면에 의로운 암살도 있습니다. 일제시대 때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습니다. 윤봉길 의사도 상하이 일본군 대장인 시라카와를 폭탄으로 즉사시켰습니다. 세상은 이것을 의로운 행동으로 평가합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안중근 의사라고 호칭하고 그를 기립니다. 반면에 아직도 의견이 분분한 암살사건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박정희 시해사건 같은 경우는 아직도 찬반양론으로 갈려져 있습니다. 국가원수를 암살한 중범죄로 보는 경우도 있지만 김재규를 의인으로 평가하는 진영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암살은 모두 살인죄에 해당합니까?’라고 묻는다면 일단, ‘하고 답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렇게 규정하고 있으니까요. 성경은 모든 살인행위에 대해 일단 범죄로 규정합니다. 심지어 자살의 경우에도 살인죄목으로 다룹니다. 한 마디로 피를 흘린 것에 대해 하나님은 용납하지 않는 절대적인 지침을 가지고 계십니다. 모든 생명에 대한 주권은 오직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살인에 대해 성경의 단어는 특정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로는 라차흐라 하고, 헬라어로는 포뉴오라 합니다. 이것은 특정하게 의도된 계획적인 살해이든 아니든 모든 종류의 살인을 가리킵니다. 물론 성경에는 살인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이 있습니다. 영어성경은 그것들을 다른 단어로 표현해 두고있습니다. 예를 들어, 35장의 살인은 murderer, 4:42이나 수20:3의 것은 manslayer, 20:5의 것은 slayer, 62:3에서는 /산산이 부수다라는 의미의 shatter, 22:13의 것은 slain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살인은 불법적인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사람의 생명을 취하지 말라는 기본적인 명령이 확고하게 계시되어 있습니다.

내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이 이는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라”(9:5-6)

살인하지 말라”(20:13, 5:17)


만약 두 사람 사이에 적대감정이 생겼을 때 숨어서 기다렸다가 살해했거나 고의적으로 쳐서 살해한 경우엔 그 살인자는 반드시 죽음으로 형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사람을 쳐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나”(21:12)

만일 미워하는 까닭에 밀쳐 죽이거나 기회를 엿보아 무엇을 던져 죽이거나, 악의를 가지고 손으로 쳐 죽이면 그 친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니 이는 살인하였음이라 피를 보복하는 자는 살인자를 만나면 죽일 것이니라”(35:20-21)


 

 

 

심지어 사람을 살해할 만큼 사나운 소를 둔 경우는 그 주인이 소를 죽이거나 속죄금을 지불함으로 보상해야 했습니다.

소가 본래 받는 버릇이 있고 그 임자는 그로 말미암아 경고를 받았으되 단속하지 아니하여 남녀를 막론하고 받아 죽이면 그 소는 돌로 쳐 죽일 것이고 임자도 죽일 것이며, 만일 그에게 속죄금을 부과하면 무릇 그 명령한 것을 생명의 대가로 낼 것이요”(21:29-30) 

 

 

 

 

다만 살인에 대해 예외조항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연적인 살인과 정당한 살인의 경우는 구별합니다. 만약 부지중에 사람을 죽였을 경우 그 살인자는 피르 보수하는 자로부터 도망하여 도피성으로 피할 수 있었습니다.(21:13, 35:9-15, 19:1-10). 그리고 살인이 자기 방어를 위한 것이었다면, 예를 들어 밤에 도둑이 들어 가족을 위협하여 죽이려고 한 경우, 그 도둑을 살해한 경우엔 살인죄로 보지 않았습니다. 또 전쟁에서의 살인행위 역시 피의 보수를 받지 않았습니다.

도둑이 뚫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를 쳐 죽이면 피 흘린 죄가 없으나”(22:2)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내게 행한 일 곧 이스라엘의 두 사령관 넬의 아들 아브넬과 예델의 아들 아마사에게 행한 일을 네가 알거니와 그가 그들을 죽여 태명시대에 전쟁의 피를 흘리고 전쟁의 피를 자기의 허리에 띤 디와 발에 신은 신에 묻혔으니”(왕상2:5)


 

 

 

한편, 매우 특별하게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행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은 살인행위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 때 백성이 모압여자들과 음행을 하고 그 이방여자들을 따라 바알브올에게 절을 하는 등 우상숭배의 죄를 범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령하여 백성의 수령들을 목매어 죽이게 하고, 바알브올에게 가담한 모든 자들을 죽이라 하여 아론의 손자인 비느하스가 막사에서 음행을 하던 시므리와 미디안 여인을 창으로 찔러 죽였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비느하스의 행위에 대해 이렇게 칭찬하십니다.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 노를 돌이켜서 내 질투심으로 그들을 소멸하지 않게 하였도다”(25:11)


 

 

 

다시 말해 비느하스의 의로운 한 행위로 말미암아 모든 백성이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 비느하스의 행위는 살인이 아니라 이스라에을 위한 속죄의 행위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점을 분명히 밝히시고 계십니다. 25: 13절을 보세요.

그와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의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라

 

 

 

 

3. 예수님의 가르침


 

 

 

그렇다면 신약시대에서는 살인죄에 대해 어떻게 말합니까? 모세 오경의 규례들은 많은 경우 수정되고 융통성을 가지게 됩니다. 일종의 동해보복법은 예수님에 의해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는 사람들, 개인이든 정부이든, 사이에서의 보수 자체를 폐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 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5:38-39)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12:17-19)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12:20-21)


 

 

 

그렇다고 예수님이 살인죄를 가벼이 여긴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복음의 시대에 와서 더욱 수준을 높입니다. 구약의 살인죄는 행위죄에 국한하였지만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구원의 축복을 누리고 사는 신약이후의 백성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보다 그 마음에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주님으로부터 판단을 받도록 조치된 것입니다. 주님은 이제 살인죄에 대해 한층 격을 높여 우리의 내면의 죄를 다루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누구를 죽인 것도 살인이지만 그 행위 이전의 마음을 주님은 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남을 미워하는 것이 살인이라고 규정하신 것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5:22)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3:15)


 

 

 

4. 결론


 

 

 

오늘 우리는 바울을 암살하고자 하는 유대인들의 음모를 듣고 살인죄가 얼마나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고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는 일인가를 살펴보았습니다. 나아가 주님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 모두가 우리 속에 살인의식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 마디로 언제든지 우리는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살인예비자들입니다. 이런 것을 미필적 살인이라 합니다. 행동으로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이미 마음속에 그 사람을 미워했고, 그 미움은 이미 살인죄를 범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정말로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들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나와 다른 점을 높이 평가하고 다른 지체의 귀함과 중요성을 평가절하하지 말아야 합니다. 서로 존중하고 아기고 정성으로 보살피며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워주고 필요를 채워주고 서로의 짐을 나누어지도록 노력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특별히 자기 생명을 사랑해야 합니다. 자살은 자기 생명을 자기가 살인하는 행위입니다. 어떤 이유와 명분과 변명과 합목적적인 동기라도 자살은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한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 자기 것이 아니 것을 마음대로 사용했다면 그 사람은 도둑으로 취급받을 것입니다. 생명은 내 것이 아닙니다. 나의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취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자살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생명도둑입니다. 생명보다 귀한 것은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의 생명사랑이 더욱 꽃피워지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728x90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