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주차.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본문: 행24:1-27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호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발하니라(1)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그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5-6)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동시에 도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이태가 지난 후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이어받으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24-27)
1. 전체 내용
오늘은 24장 전체를 강해합니다. 전체 내용을 요약하면 바울이 가이사랴에 호송된 지 5일 만에 예루살렘에서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그의 변호사 더둘로 및 몇 몇 장로들이 바울을 총독의 법정에 고소하기 위해 가이사랴에 내려옵니다.(여기서 내려온다는 표현은 지리적으로는 가이사랴가 예루살렘의 북쪽에 위치했지만 지형적으로 예루살렘이 가이사랴에 비해 높은 지역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가는 것을 올라간다고 표현하고 예루살렘에서 지방으로 갈 때엔 모두 내려간다고 했습니다. 우리로 치면 서울 갈 때 서울 올라간다는 표현과 유사합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바울을 정식으로 총독에게 고소합니다.(1-9절) 그리하여 가이사랴 법정이 개정되고 바울은 총독의 명령에 의해 자신을 변호하는 기회를 얻어 연설을 합니다(10-21절). 그러자 벨릭스 총독은 천부장 루시아를 증인으로 채택하여 다음 기회로 재판을 연기한 다음(22절), 백부장에게 명하여 바울을 구류하라고 명령합니다(23절). 그리고 24절부터 27절까지는 벨릭스와 그의 아내가 등장하고 이들이 바울로부터 복음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자 하자 바울은 이 부부에게 복음을 강론합니다. 그러나 벨릭스는 심판에 관한 이야기에 거부감을 가지고 더 이상 좌담을 진행하지 않고 바울에게서 어떤 대가를 바라는 속내를 드러내면서 루시아를 증인으로 하는 약속한 재판은 진행하지 않고 어영부영 2년이라는 세월을 축내다가 자신의 후임자인 베스도 총독에게 인계하는 것으로 24장의 이야기가 종료됩니다.
2. 등장인물들
오늘도 주요한 등장인물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 인물은 대제사장 아나니아입니다. 유대인 역사가인 요세푸스에 의하면 이 사람은 대제사장이 되기 위해 전임 대제사장을 음모와 계략으로 모함하여 살해하고 그 자리에 올랐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리에 오르자마자 성직을 매매하는 등 온갖 뇌물과 청탁으로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앞장 선 인물이라 합니다. 도대체 대제사장의 자리가 무엇이길래 이렇게 까지 하는 겁니까?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 지배를 받는 나라잖아요. 그래서 얼핏 보기에는 지배받는 자리가 좋아 보이지 않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식민지 국가이긴 하지만 로마는 속국에 상당한 자치권을 부여하고 있었습니다. 자기 민족의 문제는 자기 손으로 해결하도록 한 것입니다. 행정권 뿐 아니라 사형을 선고하는 일만 제외하곤 모든 재판권까지 위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하면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수반이자 최고 통치권자입니다. 대제사장 말 한마디면 모든 것이 결정 납니다.
- 타락한 인간은 본능적으로 남을 지배하려 합니다. 지배하는 목적은 내 말을 잘 듣고 따라주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내 맘대로 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죄성입니다. 요즘 사람들이 애완용 동물, 그중에 개를 많이 기른다고 합니다. 이유가 뭘까요? 한 마디로 개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명령대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나운 개가 있다고 합시다. 아무도 그 개를 애완용으로 키우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말을 잘 듣고 내 말대로 따라주고 내 마음에 맞게 행동하면 좋아하고 내 말대로 움직여 주지 않으며 나를 비판하고 반대하면 싫어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태생적으로 모두 독재자입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이 그래서 생겨났을까요?
아무튼 이런 막돼먹은 인간이 오늘 주님의 사도 바울을 고소하기 위해 가이사랴에 온 것입니다. 이름만 들어도 유대인들을 벌벌 떨게 하는 그 대제사장이 일개 바울 한 사람을 로마 총독의 법정에 고소하기 위해 그 먼 곳을 마다않고 달려온 것입니다. 그만큼 대제사장의 입장에서는 바울의 문제가 매우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본문 1절을 보면 아나니아는 상당히 치밀하게 준비를 한 모양입니다. 혼자 오지 않고 예루살렘의 유력한 장로 몇 사람을 대동하고 또 전문변호사까지 동행하였습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우리는 더둘로라는 변호사를 만나게 됩니다. 이 사람은 요즘 말로 치면 국제변호사 쯤 되는 사람입니다. 변호사란 직업은 죄인을 변호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죄인의 죄질이 좋든 나쁘든 개의치 않고 의뢰인의 죄목을 가리고 죄인의 편에 서서 죄를 변호하는 것입니다. 변호사가 되기 위해선 우선 머리가 좋아야 하고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법고시라는 시험에 합격해야 합니다. 이렇게 합격하면 가문의 영광이 되고 출세의 길이 보장된다고 봅니다. 물론 요즘엔 변호사들 수가 너무 많아 자기들끼리 피비린내 나는 경쟁으로 먹고 사는 것도 힘들다고 푸념을 한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가끔 보도를 통해 변호사들이 정말 죄질이 나쁜 사람을 변호하는 모습을 볼 때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제아무리 직업적인 일이라 해도 일을 좀 가려서 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저 좋은 머리와 학식을 좋은 일에 쓰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권력이나 재력가의 편에 서지 않고 약자의 편에 서서 사회정의를 위해 싸워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기대합니다. 물론 이것은 개인적인 양식과 선택의 문제일 것입니다.
- 아무튼 알려진 바에 의하면 더둘로는 상당히 유능한 변호사로서 ‘황금의 입’이라 불리며 사회적 지위를 누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역사가들은 그의 화려한 언어기술은 당대에 당할 자가 없었다고 기록합니다. 3절을 보면 그 근거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벨릭스를 각하라 호칭하면서 당신 덕분으로 유대인들이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다고 한껏 띄웁니다. 마치 북한의 김정은 정권을 절대지존처럼 호칭하며 갖은 아부를 더는 모양새와 흡사합니다. 중요한 것은 제아무리 아부라 해도 자기를 치켜세우는 발언을 싫어하는 인간은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벨릭스는 알다시피 노예출신입니다. 그러므로 벨릭스는 자기 신분에 대해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피해의식은 자신의 과거에 대한 의심증상입니다. 과거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들 중 일부는 아직도 정부의 발표를 신뢰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과거 독재 정부가 거짓말을 많이 하고 국민들을 속인 전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 변호사 더둘로가 왜 명석한 사람이냐 하면 그는 총독의 피해의식이 무엇인지를 잘 간파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지 꿰뚫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을 띄워주면 굉장히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발언은 진짜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치욕적인 발언입니다. 우리로 치면 친일파적인 발언입니다. 더둘로는 지금 한 사람의 입맛을 맞춰주기 위해 유대인들의 민족적 자긍심을 내다 팔고 있는 것입니다. 벨릭스 총독이 얼마나 유대인들을 탄압한 인물인가는 역사가 증명합니다. 그런데 더둘로는 그런 진실을 외면하고 바울을 고소하기 위해 온갖 아첨의 말로 자신의 변호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자존심이고 진실이고 간에 오직 돈 되는 일이라면 다 하는 인물입니다.
- 어느 시대건 오직 물질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즐비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현실에서는 잘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돈이 있으니까 자식들을 호강시키며 키웁니다. 자식들이 원하는 것을 다 들어줍니다. 어떤 중국인 부자는 딸의 생일선물로 섬 하나를 통째로 사 주었다고 외신이 전했습니다. 그런데 역사는 이런 부류들이 항상 멸망했음을 증언합니다. 이런 부모 밑에 자란 자식들이 제대로 인생을 산 경우가 없습니다. 간혹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위대한 부자 가문들이 있었긴 했지만 대부분 비정상적인 인생을 살다가 명멸해 갔습니다. 그래서 ‘3대 부자 없고 3대 가난도 없다’는 속담이 생겨난 것입니다.
- 인간에게 가장 위대한 보물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하나님만 가지면 모든 것을 다 갖는 것입니다. 더 이상 가지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 위에 계시고 모든 존재 안에 계시고 모든 존재와 함께 계시는 모든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내 안에 영접한다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것은 모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오시는 분을 우리는 성령님이라 부릅니다. 이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회심하고 중생하고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위 안에 영원히 나와 함께 내주하시면서 나와 동행하고 나라는 존재가 완전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하도록 도와주시고 나의 모든 형편을 다 아시고 살피시고 돌보시고 환난과 곤란과 고통으로부터 지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우리가 무엇을 더 가져야 하고 무엇을 더 바라야 합니까? 가장 값비싼 보물을 가진 사람은 또 다른 보물이 필요치 않습니다. 오직 내가 가진 보물을 가지지 못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일만이 남은 것입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복음을 나누어 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받은 영원하고 무한하며 가장 귀하고 아름답고 값비싼 복음의 은혜와 보물을 다른 이에게 나누어 주는 사람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더둘로처럼 돈을 보고, 명예를 추구하고, 권력에 아부하고, 자신의 부귀와 영달을 위해 살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다음으로 24절에 보니, 우리의 눈에 들어오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벨릭스의 아내인 드루실라라는 여자입니다. 놀랍게도 로마 총독의 아내가 유대인 여자입니다. 이 여자에 대해 좀 알고 가야 합니다. 마태복음서를 읽을 때 제일 잔혹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유대인의 왕이 태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두 살 이하의 아기들을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한 인물입니다. 이 정도면 거의 악마입니다. 우리는 그를 헤롯 대왕이라 부릅니다. 아버지 안티파터에 이어 로마 원로원에 줄을 대고 유대인의 왕이 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아들이 헤롯 1세이고, 헤롯 1세는 3남매를 두었는데 드루실라는 바로 헤롯 1세의 막내 딸입니다. 그녀의 미모는 역사에 기록될 정도로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원래 시리아의 왕족에게 시집을 갔는데 벨릭스가 홀딱 반해 그녀를 돈을 주고 사 왔다고 전해집니다. 벨릭스는 권력과 돈으로 미모를 샀고 드루실라는 미모를 팔아 권력과 돈을 움켜 쥔 것입니다.
3. 벨릭스의 속셈
결론적으로 오늘 본문에서 가이사랴 법정은 확실한 매듭을 짓지 못하고 흐지부지 끝나고 맙니다. 벨릭스가 양쪽 의견을 들어보니 자기도 잘 아는 번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22절을 보니,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 했는데 이로 미루어 벨릭스는 바울을 재판하기 위해 나름대로 정보를 수집하고 유대인들이 다투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도에 대해 기초적인 지식을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벨릭스는 천부장 루시아를 증인으로 채택하는 것으로 이번 재판을 종료하고 다음으로 미룹니다. 물론 다음 재판은 열리지 않습니다. 차일피일 미루면서 다음 후임자에게 인계하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그렇다고 벨릭스가 바울을 풀어주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재판도 열지 않고 바울도 풀어주지 않은 벨릭스의 처사가 매우 궁금합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일가요? 오늘 본문 17절을 보세요. 비울은 자기를 변호하는 말에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여러 해 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속담대로 그 종요한 증언 중에 벨릭스의 귀에 꽂힌 말은 오직 바울의 손에 돈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어느 정도의 규모냐 하면 유대민족을 구제할 만큼 많은 돈이었다는 것입니다. 벨릭스는 바로 이 점에 군침을 흘린 것입니다. 그래서 26절에 보면 벨릭스는 바울에게 돈을 좀 얻어낼까 하고 바울을 자유케 하고 틈만 나면 불러 대담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이런 벨릭스의 심리를 이용하여 바울로 하여금 그와 그 부인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역사하십니다. 벨릭스는 언제 바울이 돈을 주며 잘 봐 달라고 부탁할까 하고 기대했지만 바울은 처음부터 그럴 의향이 아예 없었습니다. 바울은 틈만 나면 두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특히 25절에 보면 ‘의와 절제와 심판’에 대해 강론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바울은 이미 벨릭스의 속내를 잘 간파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의는 회개할 것을 요청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영접하면 비록 죄인이지만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절제는 벨릭스로 하여금 욕심을 멈추라고 강권한 것입니다.
돈 욕심을 자꾸 부리면 돈으로 망하는 법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특히 돈에 대해 거듭나야 합니다. 저는 돈은 사랑의 도구라고 강조한 바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입니다. 바울도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복되다고 했습니다. 돈은 가난한 이웃을 위해 나누라고 나에게 주어 맡기시는 것입니다. 물론 주신 돈으로 우리는 각자 필요한 생계비와 생활비와 자식 양육비 등을 충당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 우리 소득의 십일조와 각종 예물을 드려야 합니다. 그것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들어 십일조 가지고 이런 저런 의견을 피력하여 마치 십일조가 자유적인 문제인 것처럼 호도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분명히 성경은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며 만약 십일조 가지고 장난하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라 선포하셨습니다. 인간은 항상 어떤 원칙이라도 자시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려는 타락한 본성이 남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오, 하나님의 계명은 절대 불변이요,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딴소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돈 문제 가지고 딴 짓 하면 안 됩니다. 응당 써야 할 때 쓰지 않고, 응당 내야 할 때 내지 않고, 내 짐을 다른 사람에게 지우는 것은 아직 물질문제에 있어서 거듭나지 않았다는 반증입니다. 당연히 써야 할 돈을 두고 아깝다고 생각되면 회개해야 합니다. 정확하게 계산하고 받을 건 받고 줄 건 주고, 은혜로 할 것은 은혜로 하고 해야 합니다. 주님은 한 호리의 빚을 남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권면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돈 문제가 그만큼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4. 결론
은근히 속으로 돈을 바라고 바울을 불러 이야기를 나누었던 벨릭스는 바울의 이야기를 듣고 크게 당황합니다. 그리고 크게 두려워합니다. 어느 인간인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은 하나님 앞에 굴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무서운 존재라는 것을 잘 압니다. 이 두려움이 사라지면 권위는 꺾이고 맙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무능력해지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당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을 보니 하나님을 무서워해야 할 이유가 하나도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그리스도인들 하면 그래도 신비스럽고, 뭔가 나와는 다른 모습들이 보여 함부로 대하기가 어려웠는데, 지금은 그런 경건함이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리저리 살펴보아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똑같은 것입니다. 존경은커녕 사회적 물의도 그리스도인들이 더 많이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우습게 보는 것입니다. 옛날 같으면 목회자더러 세금을 내라고 말도 꺼내지 못했습니다. 목사님을 잘못 대하면 혹시 하나님의 진노를 사지 않을까 두려워했습니다. 벨릭스가 두려워했던 것처럼 세상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의 참된 경건함 앞에서 두려움을 갖는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크게 회개해야 합니다. 믿음대로 살지 못하고, 순종도 없이 경건한 삶을 살지 못함을 애통하고 통곡해야 합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입니다. 이 땅에 사는 목적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가는 곳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사는 방식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군림하고 목에 힘주고 권세와 명예를 누리기 위해 부름 받은 존재가 아니라 낮은 자와 약한 자와 버림받은 자와 소외받은 자에게 다가가서 그들을 섬기라고 부름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자기들이 먼저 잘 살아야 한다며 발버둥칩니다. 내가 복 받고 내 자식이 잘 되고, 내 가족이 먼저라고 한다면 그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 중의 죄인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자들입니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만이 살아있을 뿐입니다. 내가 죽었는데 어지 나를 주장할 수 있습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 35주차.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아리엘 개혁교회) |작성자 아리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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