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36주차. 기회주의자가 되지 말라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5. 9. 9. 09:35

본문

36주차. 기회주의자가 되지 말라


 

 

25:1-12

베스도가 부임한 지 삼 일 후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할새, 베스도의 호의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기기를 청하니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함이더라. 베스도가 대답하여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류된 것과 자기도 멀지 않아 떠나 갈 것을 말하고, 또 이르되 너희 중 유력한 자들은 나와 함께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만약 옳지 아니한 일이 있거든 고발하라 하니라. 베스도가 그들 가운데 팔 일 혹은 십 일을 지낸 후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고 바울을 데려오라 명하니, 그가 나오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둘러서서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고발하되 능히 증거를 대지 못한지라. 바울이 변명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하니, 베스도가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하느냐. 바울이 이르되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에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줄 수 없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한 대,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이르되 네가 가이사에게 상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하니라


1. 베스도 총독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유대인 역사가인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바울이 가이사랴에서 재판을 받고 있을 동안에 유대사회에 큰 사건이 하나 일어났습니다. 때는 주후 59년 경, 벨릭스 총독 시절에 갈릴리 지방에서 큰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그 폭동의 중심에는 열심당원을 비롯한 급진 독립을 추구하는 과격파들이 있었습니다. 벨릭스 총독은 이 폭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했습니다. 이 진압작전으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벨릭스 총독은 악명을 떨쳤습니다. 그러자 예루살렘의 유대인 지도자들이 로마 당국에 격렬히 항의했습니다. 대제사장을 비롯한 지도자들은 변호사까지 대동하고 가서 총독에게 직접 찾아가 바울을 고발했지만 총독은 무슨 까닭인지 재판을 차일피일 미루면서 고발사건을 처리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예루살렘 사람들은 총독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습니다. 그런 차에 무자비한 폭동진압은 오히려 불만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일이 결국 로마의 가이사 황제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황제는 유대사회를 잘못 통치한 책임을 물어 즉시 벨릭스 총독을 교체하고 그 후임자로 보낸 이가 바로 오늘 등장하는 베스도 총독입니다.


사실 유대지역의 총독으로 임명받는 일이 당사자에겐 결코 좋은 일이 아닙니다. 쉽게 말해 승진발령은 받았는데 부임지가 오지 중의 오지인 것입니다. 특히 유대 지역은 하루도 편한 날이 없는 지역입니다. 그만큼 유대인들은 야훼 유일신 신앙으로 똘똘 뭉친 민족이며 선민의식을 바탕으로 어떤 민족보다 자긍심이 대단합니다. 그래서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는 기피지역입니다. 그래서 로마황제도 이런 지역에는 자기가 신임하고 아끼는 부하는 절대로 보내지 않고 평소 눈에 벗어난 부하를 골라 파송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상관이 되다 보면 많은 부하들을 거느리게 되는데 그 중에는 정말 신임하고 중요한 자리에 앉히어 호흡을 맞추어 열심히 같이 일을 하고 싶은 부하도 있지만 눈엣 가시처럼 껄끄러운 부하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중요한 일을 맡길 수도 없는 그런 부하가 있습니다. 그러다 남들이 다 기피하는 일, 처리하기 매우 곤란한 일이 생기면 그 때 상급자의 머리에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이 누구이냐 하면 바로 처리 곤란한 부하입니다. 아마 베스도도 가이사 황제로부터 그 정도의 부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열심히 해 봤자 이미 눈 밖에 났는데 인정받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맡은 일을 하지 않을 수도 없고 해서 대충 일하고 대충 노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이러한 때에 돈이라도 만지고 싶은 것입니다. 대개 중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뇌물을 많이 받을 것 같지만 통계적으로 보면 남들 분에 쉽게 띄지 않는 한지의 사람들이 더 많은 부정과 뇌물 청탁사건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이는 자신의 신세에 대한 보상으로 돈이라도 벌자는 심리가 작동하는 것으로 봅니다. 전임자인 벨릭스도 그렇고 후임자인 베스도도 다 그런 인물들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인물들이 곳곳에 즐비합니다. 이것이 불변하는 세상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2. 본문 이야기


베스도가 부임한 지 3일 만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모든 총독들이 그랬듯이 유대의 지도자들과 상견례를 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재임 기간 동안 제일 중요한 업무 중 하나였습니다. 비록 점령군의 대장으로 발령을 받아 왔지만 유대 사회가 힘으로만 제압한다고 잘 통치되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베스도 또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을 잘못 건드리면 전임자처럼 하루아침에 자리가 날아간다는 것을 충분히 목격했습니다.


그런데 산헤드린 공회의 지도자들이 총독을 만난 자리에서 다른 무엇보다 다시 바울을 고소하는 일을 빼놓지 않고 있습니다. 참으로 끈질긴 적대감입니다. 지금 바울은 유대인들의 고소에 의해 2년 동안 가이사랴에 구금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바울을 고소하고 있습니다. 2년 전에는 바울을 죽이기 전까지는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겠다고 결의하던 사람들이 40여명에 달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베스도 총독으로 하여금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호송하게 하고 오는 길에 매복했다가 바울을 암살하기로 계획까지 했습니다. 아마 암살계획을 세운 이들은 2년 전의 바로 그들일 것입니다. 이 적대감이 얼마나 집요하고 끈질긴가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자 베스도가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4-6절입니다. 정리하면, “내가 지금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금되어 있는 것을 안다. 그런데 내가 온 지가 얼마 되지 않아서 사태 파악이 잘 안 된다. 2년이 지난 사건인데도 당신들이 계속 재판을 원하니 예루살렘에서 볼 일을 다 본 후에 나와 함께 가이사랴에 내려가서 정식으로 재판을 열어 죄가 있는 것인지, 있다면 무슨 죄를 지었는지 따져 보자한 것입니다. 제법 현명한 판단이고 결정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때 베스도가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감지했을 것입니다.

아무튼 2년 만에 다시 재판이 열렸습니다. 그런데 2년 전과 마찬가지로 고소자들은 바울에 대한 혐의만 주장했지 죄를 입증할 증거를 제시하지 못합니다. 이에 바울은 다시 한 번 자신의 무죄를 변호합니다. 그 내용은 유대인들이 아무런 증거도 없이 그저 주장만으로 고소한 세 가지 부분에 대한 반박들입니다. 8절에 보니, 바울은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선언합니다.


첫째, 바울은 자신이 율법을 범하지 않았다고 해명합니다. 부활을 증언했지만 그것은 바리새파들도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남의 물건을 도둑질했거나 거짓 증언을 했거나 안식일을 어긴 적도 없습니다. 둘째, 바울은 성전의 거룩성을 범하는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율법에 따라 성전에 들어가 결례를 직접 행할 만큼 예루살렘 성전을 존중했습니다. 그리고 셋째로 바울은 가이사 황제에 대해서도 어떤 죄도 짓지 않았다고 증언합니다. 이것은 변호사 더둘로를 통해 제기된 고소의 내용으로서 바울이 사람들을 선동하여 소요를 일으켰다는 것인데 누가 보아도 억지 주장입니다. 바울의 문제로 인해 어떤 사람도 데모를 하거나 소란을 일으켰다는 보고가 없습니다.


이쯤 되자 베스도의 머릿속이 복잡해졌습니다. 당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도 없었습니다. 고소를 했으면 확실한 증거가 있고 범죄 사실이 입증되어야 하는데 그것도 없이 말싸움만 하는 것입니다. 베스도는 솔직히 부임하자마자 유대인들이 끈질기게 요구하는 문제를 들어주고 환심을 사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자 의도한 것인데 재판을 열어보니 이건 뭐 죄도 없는 사람을 붙잡아 놓고 억지로 죄를 뒤집어씌우고 있는 것입니다. 무죄한 로마시민을 무작정 죄를 물어 처단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베스도가 황당했겠습니까? 웬만하면 적당히 판결을 내리고 곤장 몇 대 쳐 혼을 내 주면 유대인들의 마음이 풀어질 것으로 생각했는데 베스도의 입장이 갑자기 난처해졌습니다.


그래서 베스도가 꾀를 냅니다. 9절입니다.

네가 예루살렘의 법정에 서서 다시 내 앞에서 재판을 받겠느냐?”


이 제안은 베스도의 두 가지 고민을 해소합니다. 하나는 기어이 바울을 산헤드린공회의 법정에 세우고 싶어 하는 고소자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제안이 됩니다. 다시 말해 베스도는 지금 두 개의 판 사이에 끼여 있는데 하나는 로마법이고 하나는 유대율법입니다. 지금 바울은 유대 율법으로는 유죄이지만 로마법으로는 무죄입니다. 그런데 베스도 입장에서는 죄인을 다룸에 있어서 유대 율법을 참조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직 로마법에 따라 재판하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의 경우 증거가 없으므로 당연히 무죄 방면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베스도는 오직 로마법으로만 바울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쳐다보고 있습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은 유대인들의 문제는 유대인 손에 맡겨야 하므로 총독은 중간에서 빠지라고 압박을 넣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재판 받을 장소를 결정할 기회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로마 시민인 바울에게 선택권을 주어서 어는 정도 로마법 상의 불법적인 요소를 차단하고자 하는 의도인 것입니다. 누가 베스도에게 왜 죄도 없는 사람을 유대인 법정에 세웠느냐 물으면 바울 스스로 그렇게 결정한 것이라고 우길 참인 것입니다. 베스도의 입장에서는 정말 절묘한 묘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에 바울은 즉시로 10절에서 가이사에게 가서 재판을 받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베스도의 의도를 이미 간파한 것입니다. 베스도가 자신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이런 제안을 한 것으로 눈치를 챈 것입니다. 직접적으로는 로마 시민인 자기에게 예루살렘으로 가라고 명령하지는 못하지만 교묘한 술책으로 나를 예루살렘법정에 세우고자 하는 속내를 읽은 것입니다. 명백한 것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은 목숨을 잃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미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11절에서 누구도 자신을 유대인들에게 내어줄 수 없다고 천명합니다. 그리고 최후통첩을 합니다. 이 선언은 다른 말로 베스도의 법정마저 신뢰할 수 없으니 황제에게 직접 가서 재판을 받겠다는 것입니다. 요즘 말로 치면 하급심에서 상급심으로 재판을 상소한 것입니다. “내가 가이사에게 호소하노라


, 이것으로 가이사랴 법정은 종결됩니다. 이 재판의 결과를 가장 기뻐한 사람은 아마 베스도일 것입니다. 바울 자신이 로마 최고 법정에 자기를 호소함으로서 이제 모든 것은 황제의 손에 맡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누구도 바울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할 권리가 없어졌습니다. 베스도는 이제 바울을 무사히 로마에 보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유대인들의 성화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스도는 이 모든 결정이 하나님의 작정하심과 섭리하심의 결과라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사람들만이 믿고 깨닫는 것입니다. 오직 바울만이 왜 하나님이 자신을 죄수의 신분으로 만들어 로마로 보내는지 알았던 것입니다.


3. 교훈


오늘 이야기를 통해 다음의 교훈을 받기를 원합니다.

첫째, 그리스도인은 늘 세상의 적대감을 받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 오늘 바울을 대적하는 유대인들의 본질을 보세요. 그들의 적의감은 참으로 끈질기고 한 번 표적으로 삼은 것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교묘한 술수와 거짓과 위선으로 포장하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립니다. 2년이나 지난 사건임에도, 이미 1차 재판에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해 벨릭스 총독으로부터 재판 연기 판정을 받은 사건입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실격 판정을 받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불법적으로 바울을 죽일 계략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 세상의 본질은 하나님을 부인하고 대적하는 일입니다. 사탄은 이를 위해 세상을 자기 권세 아래에 두고 지금도 하나님과 하나님나라를 대적하고 방해하고 핍박합니다. 그리고 이 사탄과 세상의 본질은 마지막 심판 때까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눈을 감을 때까지 세상의 적대감에 시달리는 운명을 가진 것입니다. 그야말로 세상은 우리의 원수입니다.

- 그러나 놀랍게도 주님은 이런 원수를 용서하고 먼저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악행을 저지르는 저들이 스스로 자신의 악행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단지 하나님, 예수님을 말하는 자가 싫습니다. 교회 오라고 하면 눈에 핏대를 올립니다. 부모 자식 간에도 다른 것은 다 용납되고 봐 줄 수 있음에도 예수 믿는 일에는 절대로 양보가 없고 인정함이 없습니다. 왜냐구요? 여기에 하나님의 신적 비밀이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으면 예수고 뭐고 느껴지지도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설교를 듣고 교회 생활을 해도 가슴에 와 닿지가 않는 것입니다.

- 지금 가슴이 먹먹하십니까? 그렇다면 즉시 기도하세요. 하나님, 이 척박한 땅에도 은혜의 단비를 내려달라고 기도하세요. 성령님께 나의 기도를 도와 달라고, 나의 기도를 하나님께 상달시켜 달라고 기도하세요.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의 가슴에 전율이 나타날 것입니다. 갑자기 나의 죄가 떠오르고 회개의 마음이 들 것입니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릴 것입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손길이 느껴질 것입니다. 고개를 들어 목사님의 설교를 바라보니 그 말씀이 꿀맛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그런 은혜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망합니다. 이 맛을 느낀 사람이 거듭난 사람입니다. 회심한 사람입니다. 칭의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된 하나님나라의 영원한 백성이 된 것입니다.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도록 인침을 받은 사람입니다. 할렐루야,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께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둘째, 오늘 이야기를 통해 그리스도인은 기회주의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 바울은 가이사랴에서 얼마든지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벨릭스 총독은 바울에게서 약간의 뇌물을 받고 풀어줄 심산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부당한 요구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당장 내 한 몸 편하기 위해 불법에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부당한 일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 주님은 우리에게 분명한 태도를 가지라고 충고했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 곧은 길을 걸어갔습니다. 2:27에서 모세는 헤스본 시혼 왕에게 사자를 보내어 내가 큰 길로만 가고 자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겠다고 통지했습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모세처럼 대도를 걸어야 합니다. 큰 길은 하나님이 마련하신 진리의 길이요, 빛의 길이요,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길입니다. 이 길을 당당하게 걸어야 합니다. 눈치 보거나 뒤 돌아보지 말고 푯대를 향하여 달음박질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빌 3:13-14의 말씀을 봉독해 봅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 이런 일이 간단한 것 같지만 실상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섞여 살면서 이 대원칙을 지키고 살기가 녹녹치 않습니다. 수많은 유혹들이 우리를 가로막고 우리로 하여금 뒤돌아보게 하고 자꾸 좌우를 살피게 합니다. 원칙을 지키고 살면 고지식하다고 힐난하고, 뇌물 청탁하고 불법임에도 적당히 눈 감아 주는 곳에서 나는 그러지 않겠다고 하면 그 순간 너 때문에 될 일도 안 된다고 지적받으며 왕따가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언제나 왕따의 편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의 간점에서 보면 왕따였습니다.

- 인류 최초의 왕따는 노아입니다. 산꼭대기에서 120년 동안 배를 만들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고 비웃고 조롱하고 놀려댔겠습니까? 맘씨 좋은 어떤 사람은 정말 진지하게 노아에게 다가와서 이 사람아 제발 정신 차리시게. 어쩌다 자네같이 좋은 사람이 이렇게 되었나하며 진심어린 충고를 했을 것입니다.

- 예레미야는 어떻습니까? 그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이렇게 술회했습니다.

나는 내 모든 백성에게 조롱거리 곧 종일토록 그들의 노래거리가 되었도다”(3;14)

- 웬만한 사람이면 사람들이 계속 다가와서 조언하고 충고하면 어느새 마음에 작은 의심이 생겨하나님의 명령과 뜻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됩니다. 정말 내가 하는 이 일이 맞는 일인가? 하고 머뭇거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초지일관했습니다. 모세도 초지일관했고, 여호수아도 앞을 보고 달렸고, 바울도 주님이 세우신 푯대를 향해 달음박질 했습니다.

- 지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회주의자가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당장 나에게 유리한 쪽을 택합니다. 주님께 나를 번제로 드리려는 그리스도인을 찾기가 힘듭니다. 교회에 나와도 주님에 대한 헌신보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교회를 등지고 맙니다. 언제나 빈손으로 와서 많은 주님의 선물을 받아 가려고만 합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기보다 설교에 대한 판정을 하고 앉아 있습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길을 바꾸고, 편리하고 나를 흡족하게 하는 방편을 택합니다. 유익이 된다면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고 삽니다. 적당히 술도 마시고 남들이 다 하는 일에 티 나지 않게 적당히 버무리고 삽니다.

- 우리 속담에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하는데 이 속담이야 말로 가장 비기독교적인 속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유교는 인간의 관계를 중요시합니다. 인간의 질서를 중시합니다. 그래서 조상과 부모와 어른을 우선시 합니다. 부부간에도 유별을 두고, 어른과 아이에게 순서를 둡니다. 남자와 여자는 7세부터 동석을 금합니다. 이것이 유교의 정신입니다. 한국사회는 이 질서의 틀에 갇힌 사회입니다. 그래서 앞에 나서지 않으려 하고, 튀는 행동을 삼가고, 어른에게 항의하거나 잘못된 일을 고발하는 일들이 반사회적인 행동으로 치부되어 눈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회사의 직원들이 부장님을 모시고 식사를 하는데 부장님이 설렁탕 하니까 전 직원이 이하동문하더랍니다. 이것이 한국사회의 일사분란한 질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 이런 거대한 질서의 틀을 깨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세상은 마치 철옹성처럼 견고합니다. 한국사회를 기독교적 사회로 개혁하는 일은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런 부당한 구조를 혁파하는 개혁세력임을 명시해야 합니다. 잘못된 것을 두고 귀찮아서, 혹은 남들 입에 오르내릴까봐 못 본 척하고 점잔을 빼는 것은 전혀 기독교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불의를 뿌리 뽑는 하나님의 칼을 든 영적 군사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거룩과 진실함으로 세워진 나라입니다.

- 좀 당당하시길 바랍니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하고 옳은 것은 옳다 하며 바른 말을 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나아가 그리스도인은 외롭게 투쟁하는 사람들의 편이 되어야 합니다. 옳은 것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을 위해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 억울하게 어떤 일을 당하여 눈물과 한숨으로 일생을 보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서울시청 앞에 가보시면 거의 일 년 동안 생계를 파하고 종비 박스로 만든 피켓을 들고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들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한 아주머니는 구청의 편파적인 행정 대문에 졸지에 모든 재산을 다 잃었다며 땅 바닥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불신자였지만 저는 그분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 다음에 시청 앞에서 동성애 반대를 위한 예배가 있어 찾아갔는데 놀랍게도 그 아주머니가 뒷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시대의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힘들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고하여 목에 힘을 주고 삽니다. 아무도 복음의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똑똑하고 자기가 자기의 선생이 되어 살아가는 시절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쉼 없이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다른 그 어느 때 보다도 진실하게 전해야 합니다. 모범된 삶을 살면서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정말 가난한 자, 낮은 자, 억울한 자, 애통하는 자, 버림받고 소외받은 자, 병든 자, 마음이 아픈 자, 희망을 잃어버린 자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그들을 위로하는 믿음의 군사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진심으로, 정말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728x90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