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에 대해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하고 고백했을 때에는 그냥 초월한 한 인물이라는 의미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쓴 것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그 말은 고백으로서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두 가지 조건을 확호하게 표시해서 ‘메시야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할 때에는 벌써 제자들은 예수님을 신화(神化)해서 생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로서는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그가 신이면 구주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결국은 신이 구주니까 그렇습니다. 다른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항상 그 분기점은 ‘그가 신이냐 아니냐? 초연한 그분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이론적인 터 위에 서 있는 바울을 개변시키려면 예수님이 신이신 것을 실증하면 되는 것입니다.
과연 다메섹 노상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으로서의 예수님, 이미 죽어서 없어진 분이 아니고 살아 계신 분이요 부활해서 땅 위에서 보았다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 분, 영광의 찬란한 능력을 가진 분, 그리고 저항할 수 없는 큰 힘으로 지배하고 계신 분인 것을 생각할 수 있는 간단한 조건을 그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랬을 때에 명석하고 문제를 아주 깊이 뚫고 생각할 수 있는 바울 선생에게 다른 것들은 전부 따라오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바울 선생은 다메섹 노상에서 초연한 예수님을 본 것입니다. 누구든지 바울 선생과 같은 그런 사색과 논리를 할 수 있다면, 그만큼 깊은 사색은 못 하더라도 그런 논리의 선 위에 서 있는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결국 기독교를 핍박하는 이유는 예수가 신이라고 하는 것 때문인데 만일 예수가 신이라면 핍박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하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고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려고 할 때에는 첫째로 그리스도의 초연성(超然性)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길가에 서서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구주이신 것을 전하려고 할 때에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일이 모든 사람의 죄악에 충분한 속전이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려면 그의 초연성을 이야기하지 않고는 안 됩니다. 그런데 그의 초연성을 ‘예수님은 어떤 분이시다’ 하고 기독론부터 이야기해서는 보통 사람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당신을 위해서 대신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지고 당신이 받을 지옥 형벌을 대신 받고 그런고로 당신을 속죄해 주신 분이다’ 하고 이야기해야 복음의 제시가 되는 것이고 그것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전도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그것을 알아듣기 어렵다고 해서 ‘수양 삼아서라도 믿어 보시오’ 해 가지고 전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이 죄인인 것과 그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영원한 진노와 형벌로서 그에게 임하신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보인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주로서의 충만성을 이야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 선생은 여기 폭도들에게 그러한 사실에 접촉할 수 있도록 자기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반기독자였던 자기가 당장에 뒤집어서 기독교인이 될 수 있었느냐 하면, 반기독자 된 근거의 최저에 있으면서 그것을 지지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은 ‘그리스도는 인간이다. 야훼만이 신이다’ 하는 것인데 그것이 무너지고 ‘그리스도가 곧 그 야훼 신이다’ 하는 데로 도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최초에는 적어도 ‘그리스도가 신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는 것을 아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김홍전, “하나님 나라와 예수를 증거하더라”, 132-134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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