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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1) -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복음과 교회’를 변호하는 자이다

천한필목사(수원)

by 김경호 진실 2017. 3. 16. 09:14

본문

01.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복음과 교회를 변호하는 자이다(1:1).


개역 개정

사역(Private translation)

(1)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1] (사도 직분의 최종 출처가) (인간의 철학이나 아이디어나 문화적 관습 및 인기나 지지도를 배경으로 하는 세상의) 사람들로부터 기원된 것도 아니고1 (바울의 대리자격으로 앞세운) 어떤 사람을 통해서 (개인적 차원에서 은밀히) 구해온 것을 받은 것도 아니고2, <오히려> (바울을 대신하여 사도적 권위를 변호해주시고 입증해주시며 보호해주시는 진짜 보호자요 대리자이시며, 변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즉은 자들로부터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 아버지를 통해서3 (바울 자신 또한 하나님이 세워주신) 사도(의 권위를 가진 자) 바울은4

바울은 1절을 통해서 자신에 대해 엄청나게 긴 수식어를 열거하였다. 바울의 다른 서신들과는 조금 차별화되는 첫 인사말이다. 1절을 읽어보자.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1:1)

바울은 갈라디아서 첫 서신에서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두 가지의 부정적인 묘사들하나의 긍정적 묘사로 표현하였다. 사람이라면 기본적인 상식이라는 게 있다. 처음 만나 인사를 할 때도 안부부터 나누는 게 일반적이다. 편지 형식에서도 다르지 않다. 얼마든지 바울도 편지 서두에서 안부 인사로 첫 문장을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신의 사도적 권위부터 먼저 기록하였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뭔가 자신에 대해서 그렇게 길게 설명해야 할 사정이 있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그 이유를 1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선 두 가지 부정적인 묘사들부터 살펴보겠다.

그중에 먼저는 바로 자신의 사도적 권위는 사람들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1). 이것은 어떤 의미일까? 바울 자신의 사도적 권위는 세상 사람들의 어떠한 철학이나 아이디에서 발명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는 세상 사람들의 대중적 인기나 지지도를 근거로 하여 비롯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부정적인 묘사다.

또 다른 부정적 묘사는 자신의 사도적 권위는 바울 자신이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어떤 사람의 인맥을 동원해서 얻은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1). 이것은 어떤 의미일까? 바울은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일부 소수 특권층끼리만 서로 은밀히 거래할 수 있는 방식으로 쟁취하거나 얻어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울이 굳이 이렇게 두 가지 부정적 묘사를 먼저 언급한 이유는 뭘까?

일차적으로 자신은 그런 식으로 사도 직분을 얻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히려는 의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차원에서는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부정하고 모함하며 곡해하려는 사람들의 비난을 반박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던 것이라 여겨진다.

한편, 이번에는 하나의 긍정적인 묘사를 통해서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밝힌다.

그게 무엇인가?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위한 진짜 보호자, 대변자, 변호자는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게 누구라는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사도가 되었다는 것이다(“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1).


누가도 바울의 이러한 긍정적 묘사에 대해서 사도행전을 통해서 변증해주고 있다. 그것이 바로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과 대면한 역사적 사건이다(9:1-22). 물론 이 사건은 바울이 하나님의 사도직분을 가지는 분명한 근거가 된다.

특히, 1절 후반부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 근거를 밝히는 데 있어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에게 나타났다는 역사적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1:1절 후반부)이라는 표현이다.


바울은 단순히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주장하거나 인정받으려는 의도에 머물지 않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복음의 정당성을 강조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바울이 강조하려는 복음의 정당성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포함하는 기독교의 보편적 진리이다(1:16; 1:5).

무엇보다 유대율법주의 사상인 거짓된 복음으로부터 참된 복음을 철저히 보호하고, 계승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거시적(巨視的) 목적을 위해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결하여 저돌적으로 강조하고자 하였다.

1절을 읽으면서 우리는 크게 두 가지 내용을 질문할 수 있다. 그 중에 하나는 교회 공동체가 분열이 생기는 이유 중 가장 근본적인 것은 무엇이냐?’는 것이다. 또 다른 질문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최우선으로 집중해야 할 책임은 무엇이냐?’는 것이다.


우선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 간략히 생각해 보자.

초대교회부터 시작하여 주님의 몸된 교회는 언제나 문제가 있었습니다. 15장을 읽어보면 확인할 수 있듯이 교회의 문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외부적인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내부적인 문제이다.


그렇다면, 외부적인 문제는 무엇인가?

복음 때문에 발생하는 세상으로부터의 핍박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소위 신앙의 변절이나 배교, 세상과의 단절 아니면 세상과의 타협과 같은 방식으로 문제가 교회 안에 발생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늘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십자가 없는 영광은 거짓이다라는 역사적 교훈을 잊지 않아야 한다. 자기 십자가의 길을 가는 평생에 걸친 경건의 삶 외에 세상을 향한 기독교의 다른 대안은 전혀 없다.


교회 공동체 가운데 발생하는 또 다른 하나는 내부적인 문제다. 다시 말해 이단 문제와 교회 분열’이. 특히, 이것은 소위 종교적 평화기에 주로 발생한다.


결국 교회 공동체의 모든 문제, 특히 분열과 혼란과 무질서의 근본적인 원인은 어디서부터 비롯되는 것일까?

복음이 변질될 때부터’이. 이것을 사도 바울은 뭐라고 표현하였나?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6절과 7절을 보자.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1:6-7)

복음 자체가 변질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복음이 변질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다른 복음이 교회 가운데 스며들 뿐이다. 문제는 그렇게 은연중에 스며든 다른 복음이 마치 인격이 있는 생물처럼 교회 공동체 안의 수많은 성도들을 감염시키고, 미혹한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교회는 혼란과 무질서로 얼룩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에는 분열까지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복음이 변질된 것이라고 정의하는 것이다.


신학은 왜 하는 것인가? 머리 좋은 사람들이 지식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다. 똑똑한 사람이 되려는 게 목적이 아니다. 신학 교수 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도 아니다. 기독교 신학을 공부하는 궁극적 이유는 이단으로부터 주님의 교회를 보호하기 위함’이. ‘복음의 본질을 잘 계승해가기 위함’이. ‘다른 복음, 즉 변질된 복음을 분별하기 위함’이. 이보다 더 당위성 있는 이유는 없다.

어떤 특정한 소수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은 신학을 공부해야만 하는 것이다. 복음이 변질되어 교회가 분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것은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며,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거룩한 책임이다. 이 사실에 동의한다면, 두 번째 우리가 생각해야 할 주제도 자연스럽게 해결이 된다.

두 번째 질문이 뭔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최우선으로 집중해야 할 책임은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보호하는 것’이. 이 땅에 교회는 몇 개일까? 사도신경의 고백처럼 주님의 몸된 교회는 하나다. 그 하나된 교회에서부터 전 세계의 지역 교회들이 뻗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비롯되는 모든 지역 교회의 설교 강단에서는 복음이 제대로 선포되어야 한다. 만일 복음에서 멀어진 잘못된 내용들을 쏟아낸다면, 그 설교의 빈자리를 다른 교훈들이 차지하고 말 것이다. 그것이 바로 복음이 변질된다는 의미다.


그렇게 되면 결국 주님의 몸된 교회는 분쟁과 분열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서 바른 복음을 바르게 알아야 할 책임이 있다. 바울도 바로 그러한 신앙의 역사적 책임을 감당하고자 했던 것이다. 자신의 개인적 유명세나 안위를 목적으로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변증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날 사이비나 이단들은 자신의 이름을 앞세우고자 한다. 자신을 자칭 메시야로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자칭 그리스도, 자칭 메시야, 이미 재림한 재림주라고 미혹하는 거짓된 가르침에 주의해야 한다. 마태복음 245절을 읽어보자.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24:5)

바울은 자신의 이름을 높이지 않았다. 바울은 자신을 교주로 하여 어떠한 조직도 만들지 않았다. 바울이 끊임없이 전하고 가르쳤던 것은 참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었으며, 하나님 나라의 내용이었다. 바울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보호하고자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강력하게 피력하였을 뿐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을 변호하고, 알리고자 하며, 주장하고 싶은 강한 욕구를 느낄 때가 있을 것이다. 수시로 그럴 것이다. 그 자체를 문제삼을 필요는 없다. 사람은 서로 인정해주고, 인정받을 때 큰 힘을 얻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조금 더 넓게, 조금 더 멀리 내다보자. 나를 알려서 그 다음이 무엇이어야하는가? 나를 설명하고, 나를 주장하여서 그 다음 어떤 유익이 있는가? 그것이 주님의 몸된 교회를 보호하고, 복음의 내용을 잘 보존하여 계승하기 위한 유익으로 이어지고 있는지를 자문해보자는 것이다.


세상을 살다보면, 섭섭하고 억울한 상황을 많이 겪게 됩니다. 그때마다 매번 세상의 논리와 세상의 해결방식을 따라 자신의 답답함과 억울함을 하소연하겠는가? 자신의 입장을 늘 주장하며, 자신의 상황을 주위 사람들이 동정해주고, 이해해주기만을 고집할 것인가?

그리스도인은 복음 때문에 무시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자이다. 그리스도인은 나 자신을 변호하는 자가 아니라 주님의 몸된 교회를 보호하고 섬기는 자이다. 구원받은 성도로서 복음과 교회를 보호하는데 힘쓰는 것보다 더 큰 책임은 없다. 이 사실을 결단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1. [우크 아프 안쓰(드/뜨)로폰(ouvk avpV avnqrw,pwn)/우 아포 안쓰(드/뜨)로포스(ouv avpo, a;nqrwpoj)] 부정어. 전치사 소유격. 명사 남성 복수 소유격.
    본절(1절)의 ‘우크 아프 안쓰(드/뜨)로폰(ouvk avpV avnqrw,pwn)’는 직역하자면, ‘사람들로부터도 아니다’입니다.
    문맥의 논리 구조상 전치사 ‘아포’(avpo,)는 ‘바울이 사도 직분을 얻게 된 출처와 기원이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반영하는 표현이라고 여겨집니다. 만일 사람들의 철학과 아이디어와 문화나 사람들의 인기와 지지도에서 출발하여 계승된 것이라면, 사도의 권위는 인간의 권위보다 못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바울은 자신이 가진 사도적 권위는 그러한 세상 사람들로부터 시작한 일종의 발명품 같은 것이 아니라고 선언합니다(롬 1:7절; 고전 11:23절; 고후 3:18절; 딤후 1:2절; 요일 1:5절).
    그러므로 본절(1절)의 ‘우크 아프 안쓰(드/뜨)로폰(ouvk avpV avnqrw,pwn)’에서 ‘안쓰(드/뜨)로폰(avnqrw,pwn)’은 ‘인간의 철학이나 아이디어나 문화적 관습 및 인기나 지지도를 배경으로 하는 세상의 사람들’로 번역할 수 있지 않을까 여겨집니다(롬 5:12; 히 9:27절; 계 8:11절).
  2. [우데 디 안쓰(드/뜨)로푸(ouvde. diV avnqrw,pou)/우데 디아 안쓰(드/뜨)로포스(ouvde, dia, a;nqrwpoj)] 부정접속사. 전치사 소유격. 명사 남성 복수 소유격.
    본절(1절)의 ‘우데 디 안쓰(드/뜨)로푸(ouvde. diV avnqrw,pou)’는 직역하면 ‘(뿐만 아니라)사람을 통해서도 아니다’입니다. 문맥의 논리 구조상 전치사 ‘디아’(dia,)는 바울이 자신의 친분을 통해서든 자신이 알고 있는 어떤 사람의 인맥을 통해서든 일부 소수 특권층만 은밀히 거래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자신의 사도직분을 쟁취하거 얻어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반영하는 표현이라고 여겨집니다(요 1:17절; 행 2:22절; 행 10:36절; 갈 3:19절; 히 3:16절; 벧전 5:12절).
  3. [알라 디아 예수 크리스투 카이 쎄(데/떼)우 파트로스 투 에게이란토스 아우톤 에크 네크론(avlla. dia. VIhsou/ Cristou/ kai. qeou/ patro.j tou/ evgei,rantoj auvto.n evk nekrw/n)/알라 디아 예수스 크리스토스 카이 쎄(데/떼)오스 파테르 호 에게이로 아우토스 에크 네크로스(avlla, dia, VIhsou/j Cristo,j kai. qeo,j path,r o` evgei,rw auvto,j evk nekro,j)] 접속사. 전치사 소유격. 명사 남성 단수 소유격. 명사 남성 단수 소유격. 접속사. 명사 남성 단수 소유격. 명사 남성 단수 소유격. 정관사 남성 단수 소유격. 동사 분사 부정과거 능동태 남성 단수 소유격. 인칭대명사(3인칭) 남성 단수 목적격. 전치사 소유격. 형용사 남성 복수 소유격.
    여기서 바울은 ‘자신이 사도가 될 수 있었던 근거는 인맥을 통해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4. [파울로스(Pau/loj)/파울로스(Pau/loj)] 명사 남성 단수 주격.
    본절(1절)의 ‘파울로스(Pau/loj)’는 한글 성경과 달리 본절 맨 앞에 위치하므로써 ‘주격’이며, ‘강조적 의미’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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