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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생각(5) 성경적인 죄 vs 하나님의 거룩성(막 1:1절)

천한필목사(수원)

by 김경호 진실 2017. 4. 7.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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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생각(5)

- 성경적인 죄 vs 하나님의 거룩성(1:1)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1:1)

1절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단어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인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인가?

어떤 이들은 복음이 먼저 눈에 들어올 것이다. 물론 이 구절에서 중요하지 않은 내용은 없다. 더 나아가 성경 어디를 봐도 다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중요한 내용들이다. 다만 헬라어 사본 성경에 따라 이 구절을 읽을 때, 가장 먼저 나오는 단어는 시작이라는 것이다. ‘무엇에 대한 시작이냐면, “복음의 시작이다.

여기서 “~라는 소유격을 잠시만 주목해보자.

아무런 생각 없이 눈으로만 읽으면, “복음의 시작에서 “~는 단순히 소유격일 뿐이다. 그러나 요한 마가가 1절에서 선포하고 있는 복음의 시작단순한 소유격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문법적인 표현을 사용하자면, ‘주격적 소유격의 의미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 복음이 주체라는 것이다. ‘그 복음이 주체가 되어 발생한 시작이라는 것이다.

시작을 발생케 한 주체는 인간의 어떠한 철학이나 이념이 아니다. 오로지 복음그 자체이다. ‘시작의 마무리’, 완료’(완성)도 바로 복음인 것이다.

그 복음이란 과연 무엇일까? 신앙생활을 꽤 오래했다는 이들도 복음이 뭐냐는 질문을 받으면, 순간 당황할 수 있다. 과연 여러분은 복음을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복음을 들어보았는가? 복음을 알고 있는가?

요한마가는 복음이 뭔지에 대해서 아주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곧 복음이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는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밝힌다. 그런데 그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주체가 되는 시작이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 요한마가가 1절에서 아주 웅장하게 선언하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거듭난 성도라면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당당히 고백하며 선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면 안된다. 여기서 멈추면, 그냥 복음에 대한 개념과 지식에 머무를 수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시작이라는 단어이다. 드디어 새로운 시작이 펼쳐진다는 것이다. 사람이 열정을 가지고서 치밀하게 계획하고 야심차게 준비한 시작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어떠한 인간도 생각해내지 못했고, 시도하지 못했던 시작이라는 것이다. 그 시작이 바로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주체가 되시는 구원 역사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천지 창조를 시작하셨고, 완성하시는 분이시다. 마찬가지로 복음이신 예수님께서는 구원 역사를 주도적으로 시작하시고, 완성케 하시는 분이시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이자 기독교의 역사의 근간이다. 교회가 존재하는 가치와 이유이다.

복음이 뭐냐고 설명할 때, 물론 어떤 분들은 성경이 복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당연히 66권 성경이 복음이다. 그런데 요한 마가는 굳이 1절에서 복음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표현하였다. 왜 그런 것일까? 이것은 복음이 구원과 관련되었기 때문이다.

복음 곧 예수님이렇게도 말할 수 있지만 복음은 곧 예수님을 통한 구원이라는 공식(?)으로 이해하는 게 훨씬 명확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과연 성경이 기록되기 전에는 복음이 있었을까, 없었을까?

순간 멈칫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간을 통해 분명히 정리해야 한다. 복음은 성경이 기록되기 전부터 있었다. 무슨 의미인가? ‘복음 곧 예수님이라고 생각하면,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시니까 성경이 기록되기 전부터가 아니라 아예 창조 전부터 복음은 존재했겠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지금 필자가 설명하려는 것은 복음은 곧 예수님을 통한 구원이다라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여러분은 필자가 복음을 수시로 언급할 때마다 복음 곧 구원이렇게 이해하면 된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복음은 천지 창조 이전부터 존재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창조 이후 성경이 기록되기 이전부터존재하였다고 말할 수는 있다. 여기까지 들으면 어떤 이들은 뭔가 혼란스럽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잘 따라오고 있는 것이다. 물론 신자의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선택은 타락 전이든 타락 후이든 창세 전 영원 가운데서 이뤄지는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주권 영역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전제하에서 차분히 생각해보자. ‘구원을 의미하는 복음이 생기게 된 배경이 무엇인가? 천지 창조 이전부터 구원을 의미하는 복음이 필요하였을까? 아니다. 그럼 어떤 이유 때문에 구원을 의미하는 복음이 필요하게 된 것일까? 천지 창조 이후 발생한 인간의 죄때문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의 란 무엇일까?

35절을 읽어보자.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3:5)

이 구절은 누가 얘기하는 내용인가?

사단이 뱀을 통해 하와를 유혹하기 위해서 밑밥으로 던지는 속임수다. 사단은 피조물인 인간도 하나님, 즉 어떤 하나님이냐면 언제나 변함없이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옳은지를 판단하시고, 무엇이 틀린 것이고, 무엇이 악인 것인지를 완벽하게 100% 판단하실 수 있는 유일하신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고 거짓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는 가장 큰 진노의 원인이며, 성경에서 말하는 죄악이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거룩이 뭘까? 쉽게 말하자면 구별이다. 과연 무엇에서부터의 구별일까? ‘로부터? 아니다. 하나님은 창세전부터 영원으로 존재하셨으며, 거룩하신 분이셨다. 창조 이후 인류의 범죄 이전에도 여전히 거룩하셨다. 이것은 성경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이다.

그렇다면, 창조 이후 하나님은 무엇에서부터 구별되시는 분이신가?

창세 이후 존재하는 모든 피조 대상으로부터 구별되시는 분이시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 어떠한 대상과도 동등하게 취급받으시는 그 자체를 아주 역겨워하시며, 자존심 상해하시고, 도저히 용납하실 수 없는 속성을 가지신 분이다. 그러한 속성을 가리켜 하나님의 거룩성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것은 성삼위 하나님만의 특징이자 성향이다.

어떤 사람은 소리에 민감하다. 어떤 사람은 유독 천천히 식사한다. 어떤 사람은 불이 켜 있으면 잠을 못잔다. 어떤 사람은 시끄러워도 잠을 잘 잔다. 어떤 사람은 햇빛을 싫어한다. 누구는 잘 울고, 어떤 사람은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어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어떤 사람은 비 오는 것을 좋아한다. 어떤 사람은 조용한 분위기를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양파를 못 먹는다. 어떤 사람은 표정에 민감하다. 어떤 사람은 언어에 민감하고, 누군가는 유난히 생각이 많다. 어떤 사람은 말이 먼저 앞선다. 어떤 사람은 말이 없다. 이처럼 사람은 저마다의 성향이 있다.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그 사람만의 특징이자 성격이라고 이해한다.

그걸 가지고 저 사람은 왜 저러냐?’ 이렇게 따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냥 저 사람은 저렇구나’, ‘저런 모습이 저 사람의 성격이고 성향이구나이렇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는 하나님은 거룩한 속성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구나라고 받아들이면 된다. 거룩성이 곧 하나님의 성격이고 속성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이 반영된 인간조차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그 생각과 욕심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은 진노하실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속성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창조주 하나님만의 고유영역인 판단 주권을 피조물인 인간이 동등하게 소유하려는 그 욕심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곧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월권행위라고 할 수 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피조물인 인간의 우주적 패륜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이러한 죄악에 대해서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도저히 용납하실 수도, 이해하실 수도 없으시다. 결과적으로 범죄한 아담 이후의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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