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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생각(6) 더딜 수는 있어도 반드시 완성된다

천한필목사(수원)

by 김경호 진실 2017. 4. 14.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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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생각(6)

- 더딜 수는 있어도 반드시 완성된다(1:1)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1:1)

우주적 패륜 행위를 범한 인간의 죄악에 대해서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격(속성)상 도저히 인간의 죄악을 그냥 덮을 수가 없으시다. 그럼에도 그 인간을 용서해주시기 위한 유일한 대안을 제시하셨다. 그렇다고 이미 발생한 죄악에 대해서 아무렇지 않게 대충 넘어가실 수는 없으셨다. 하나님의 속성이 그러하시다. 결국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대안은 인간의 그 죄악에 대한 형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대신 직접 감당하시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격(속성)상 하나님은 그냥 인간의 죄악을 덮으실 수가 없으시다. 그래서 인간의 죄악을 용서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인간 대신 하나님이 직접 그 죄악에 대한 형벌을 받으시고자 하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창 315절의 약속이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3:15)


이처럼 구원을 의미하는 복음은 창조 이래 인간의 범죄 이후부터 모든 인류에게는 너무나 절실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기준인 완전한 사람이자 완전한 하나님으로서의 참 메시야를 통해 인간을 위한 구원을 성취하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가운데 성취된 구원의 근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이 사실이 인류에게는 가장 큰 소망이고, 유일한 위로라는 것이다. 이것을 요한마가는 복음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구원에 대한 그 근거는 누구에게 있는 것인가? 나 자신의 결단과 의지와 노력인가? 아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좀 더 폭넓은 시각에서 그리스도인이 구원받게 된 근거를 설명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죄가 발생하기도 전인 창세 이전부터 그리스도의 구원을 치밀하게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다는 것이다. 에베소서 1장으로 가보자.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1:4)

이 구절을 보면서 어떤 분들은 일부 이단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창세 전부터 죄가 존재한 것으로 오해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표현은 구원의 근거가 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은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신앙 고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예수를 믿고 난 이후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니 자신이 예수 믿게 된 근거가 자신이 예수를 믿고자 하는 결단이나 의지와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창세 전부터 치밀하게 계획하신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작정의 결과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유대인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유대인이든 아니든 남자든 여자든 어른이든 아이든 똑똑하든 무식하든 부자든 가난하든 성격이 급한 사람이든 조용한 성격이든 한국에 살든, 미국에 살든 아프리카에 살든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가 믿어지게 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창세 전부터 치밀하게 계획된 하나님의 놀라운 작정에 의한 결과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바울만이 아니라 당시의 모든 그리스도인이라면, 아니 앞으로 예수 믿게 될 자들까지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감사로 고백할 수밖에 없고, 위로가 될 수밖에 없는 불변적 진리의 내용인 것이다.

언제 들어도, 수없이 다시 묵상하고, 또 다시 반복하여 얘기해도 늘 가슴 벅찬 감격과 위로의 내용이 아닐 수 없다. 바로 이 내용을 요한 마가가 마가복음을 시작하는 11절에서 아주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다. 왜 그럴까? 마가복음의 수신자로 알려진 로마 이방인 기독교인들은 당시 로마 제국의 강력한 권력 앞에 복음 증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버겁고 힘들었을 것이다.

마가복음의 연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베드로 사도가 순교하기 이전이든, 이후이든 상관없이 초대 교회 역사 속의 상황은 항상 불안정하였다. 신앙생활을 어깨 힘주면서 할 수 있었던 적이 없었다. 마음 놓고 편하게 복음 증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한 현실이었다.


교회 역사를 조금만 살펴보더라도 로마 제국의 문화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은 여러 면에서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다. 물론 원론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작정에 의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 복음 증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큰 은혜이자 특권이다.

그러나 신앙의 현실은 얼마든지 버겁고 힘들 수 있다. 같이 신앙 생활하던 성도 중 한 사람이 어느 날 로마 제국에 끌려가서 혹독하게 고문을 당했거나 처참하게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생각해 보자. 인간적으로 너무나 자연스럽게 위축될 수 있고, 두려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시간들이 너무 오래 지속되다보면 함께 신앙 생활하는 공동체 내부 안에서도 생각지 못한 갈등이 발생할 수 있다. 계속 이렇게 복음을 끝까지 붙잡고 가야만 할지아니면 복음보다 내 생명이 더 중요하니 적당하게 세상 문화 속에 타협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지 않을까등등 여러 고민과 혼란과 회의감이 생길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요한 마가는 마가복음의 저자로 쓰임받고 있다. 사실 그 자신 또한 과거 바울과의 1차 선교 여행 때 찌질한(?) 모습을 보였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놀라운 작정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성된 이 복음은 여전히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참된 위로이자 소망일 수밖에 없다고 선언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이 복음은 인간이 시작하고 계획한 것이 아니라 창세전부터 이미 계획하신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사랑의 작정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은헤의 결과가 바로 나에게까지 주어졌다는 것이다.

아무에게나 주어질 수 없는 이 복음의 위로가 바로 나에게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것도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사랑의 작정과 계획에 의해서 말이다. 그만큼 이 복음은 참으로 신비롭고 놀라운 권세이자 특권이며 세상 끝까지 붙잡고 가기에 충분한 절대적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요한마가는 1절의 웅장한 선언을 통해 로마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 다시금 상시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복음은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거룩한 소망이자 위로가 된다. 물론 우리가 살아가는 신앙의 현실은 직접적인 순교의 위험이 없을 뿐이지 여러모로 답답하고 막연하다. 뭔가 손에 잡히는 것이 없을 때가 많다. 기도한다고 곧바로 이뤄지지 않을 때도 많다. 성경을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더라도 먹고 살아가는 경제적 현실에 그리 큰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오히려 신앙생활을 바르고 제대로 하려고 할 때, 더 힘들고 번거로울 때가 많다. 다른 사람들을 원망하며, 환경을 탓하고 싶을 수도 있다. 그저 모든 것을 체념한 체 적당히 세상 문화에 편승하며 지내고 싶을 수도 있다. 더 이상 복음이 얼마나 가치 있고, 벅찬 것인지에 시간과 마음을 집중하고 싶지 않을 수 있다. 엘리야처럼 그냥 나만의 동굴에 갇혀서 잠수타고 싶을 수도 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렇게 하고 싶으시면 그렇게 해봐라. 하루가 걸릴 수도 있고, 한 달, 두 달, 아니 반년 1년이 넘도록 방황하고 고민할 수도 있다.

그런데 한 가지만 기억하자. 내가 내 생각과 내 결정과 내 의지로 예수를 믿기로 작정한 것이 아니라 창세 전부터 이미 치밀하게 계획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작정과 열심에 의해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복음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하나님의 작정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우리에게 믿음을 일으키시고, 시작케 하신 분도, 우리의 믿음을 결국 온전케 하실 분도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12:2). 이 말은 결국 우리의 구원을 완성케하시고, 우리의 신앙을 이끌어가시는 분도 성삼위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거친 바람과 폭풍으로 인해 복음의 가치를 붙잡고 살아가는 것이 힘들어 잠시 쉴 수 있고, 흔들리고 방황하며 고민할 수 있다. 쓰러질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게 하신 그 복음을 시작하시고, 일으키셨듯이 우리가 누리는 그 복음, 때로는 내려놓고 싶은 그 복음을 결국에는 완성케하실 것이다.

그래서 신자는 이 복음을 포기할 수는 없다. 여전히 위로와 소망이 된다. 그 복음에 의해서 거듭난 신자는 하나님 나라의 그 크신 일하심에 동참하는 거룩한 도구이다. 결국 하나님이 완성케 하실 복음의 역동성을 보게 될 것이다. 지금은 세상이 커보여서 잠시 비틀거리는 하나님의 사람, 당신을 통해서 말이다. 분명 복음이 지겨울 때가 있다. 그러나 여전히 벅찬 감격과 위로가 되는 이 복음을 신자는 포기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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