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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생각(7) 복음 앞에 드러나는 ‘거룩한 커밍아웃’(?)(막 1:2-8절)

천한필목사(수원)

by 김경호 진실 2017. 4. 20.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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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생각(7)

- 복음 앞에 드러나는 거룩한 커밍아웃’(?)(1:2-8) -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1:2-8)

    

 

 

오늘날 개척 교회 사역을 하는 대다수의 목회자들이 가장 크게 느끼는 것은 아마도 간절함일 것이다. 이것은 뭔가 고상한 의미가 아니다. 사람도 얼마 없는 교회 예배당에 한 사람이라도 더 참석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개척 교회 사역을 하는 목회자들이 느끼는 동병상련의 마음일 것이다.

 

지난 주일보다 한 사람이라도 더 참석하면, 그것만으로도 오늘 하루의 교회 사역은 보람이 되고, 감사가 된다. 왠지 모르게 힘이 난다. 목사이지만 사람이기 때문에 때로는 하나님보다 눈 앞에 보이는 현실에 영향을 받는다.

규모가 큰 교회 예배당의 분위기에서는 일일이 인원을 파악하기 어렵다. 그냥 대중이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인식할 경우가 많다. 그러나 개척 교회는 이 번 주일에 몇 명이 안 왔는지 금새 가늠할 수 있다. 그것은 곧 목회자의 설교에도 반영될 수 있다.

어느 날은 예배 참석율이 그나마 좀 높을 때가 있다. 100, 500명씩 모이는 것이 아니다. 10, 15, 때로는 20명이 넘는 정도를 말하는 것이다. 이 정도의 숫자만 모여도 왠지 모르게 1000명 앞에서 설교하는 목사처럼 자신감이 생긴다. 필자는 이 정도 믿음의 수준인가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예배당에 조금만 사람이 많아지면 나도 모르게 교만 덩어리가 곳곳에 붙어 버린다는 것이다. 고작 20명이나 30명 정도인데 말이다. 나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스러울 때가 있다. 아마 1000명 정도 앞에서 설교하면, 나는 척추병원을 다녀야 할 것 같다. 목 뼈가 부러질 수 있으니 말이다. 개척 교회 목사인 나도 이런 감정이 들 때가 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세례 요한은 어땠을까?

 

마가복음 11절부터 13절까지는 복음이신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준비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1절은 일종의 선언과 같다. 또한 2절부터 13절까지는 크게 보자면, 세 가지 내용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 중에서 2절부터 8절은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세례자 요한의 사역을 기록하고 있다. 9절부터 11절은 창조주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 요간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상황에 대한 내용이다. 12절부터 13절은 성령의 주권적인 인도하심 가운데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겪게 되는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이 중에서 우리는 2절부터 8절을 살펴보고 있다.

그는 구약의 예언(2-3)대로 복음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개막(開幕)되기 전,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오프닝 무대로 등장시킨 인물이다(4-5). 그러나 그는 당시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공감할 만한 문화적 코드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6).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전파할 때,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광야로 몰려들어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5). 인간적인 경영 마케팅을 사용한 것이 아니다. 교통이 편리했던 것도 아니다. 유아시설이 잘 마련되었던 것도 아니다. 넓은 주차장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식당도 없었다. 화장실도 없었다. 모든 게 허술하였고, 미비하였다. ‘불편함그 자체였다. 그런데도 어느새 수많은 사람들이 광야로 모여들었다.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며 그에게 물세례를 받았다(4-5).

 

아마도 유대인들 중 어떤 이들은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는 요한을 바라보면서 그가 혹시 메시야일 수도 있다는 기대감을 가졌을 수도 있다. 물론 대다수는 이스라엘의 영광을 다시금 회복시켜줄 정치적 메시야를 기대하였을 것이다. 그들의 현실적인 강한 욕망은 세례 요한을 자칫 메시야로 만들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세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서 예수님의 정체를 확실히 알아보자고 요청까지 했었다(1:19-25).

 

이런 분위기에서 요한은 마음만 먹으면 신적인 대접을 받을 수도 있었다. 아마도 그는 마치 일약 스타로 떠 오른 것 같은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눈 빛은 거만하게, 언행은 좀 더 권위있게. 지금 상황에서도 이런 행동을 하더라도 누구도 비난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나라 속담 중에 말은 제주도로, 사람은 한양으로라는 말이 있다. 오늘날로 보자면, 사람이 출세를 하려면,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세례 요한도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 기세등등하게 이스라엘의 중심인 예루살렘으로 갈 수 있었다. 그곳에서 로마 정부의 지지를 받으며, 이스라엘 전 지역을 향해 강력한 조직을 구성하고 힘을 과시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요한은 도저히 사람들과 보편적인 공감대를 공유하기 어려운 독특한 삶을 살았다(6).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의 대중적인 기대감에 순순히 호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 분명하게 밝혔다.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1:7).

    

 

요한이 자신의 역할을 솔직하게 밝혔다. 그 이유는 뭘까? 겸손해서일까? 아니다. 요한은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그 길을 예비해야 하는 자신의 역할에 대해 본질적인 차이를 았고 있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1:8).

    

 

요한은 나름의 신앙 고백적 표현을 한 것이다. 이 또한 물론 하나님의 은혜이다.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고, 어떤 위치에 있어야 하는지를 안다는 것 자체가 인간의 능력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은혜 가운데 깨닫게 해주셨다. 그 은혜를 힘입어 요한은 신앙 고백적 표현을 한 것이다. ‘거룩한 커밍아웃을 한 것이다.

하나님은 복음을 이미 시작하셨다. 그 길을 예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요한은 자신을 통해 회개의 세례물세례를 베풀어야 했다.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진짜 역할이라는 것이다.

어떤 분들은 이 상황에 대해서 그냥 그런가보구나하고 쉽게 읽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대충 넘어갈 수가 없었다. 나는 이 구절들(7-8)을 읽으면서 나의 상황으로 가정해 보았다.

 

2009년부터 아무런 자본금도 없고, 인맥도 없이 교회 개척을 준비하였다. 여기까지는 실제 내용이다. 교회 개척 사역을 하면서 참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기쁨도 있었지만 힘든 일들도 많았다. 교회 개척을 그만 두고 싶을 때도 여러 차례 있었다. 가장으로서 경제적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에서 교회 개척 사역은 너무나 벅찬 일이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해보려는 그 강렬한 마음은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만일 앞으로 5년이나 10년 뒤에 필자가 한국 교회에서 유명한 목사가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모여서 주일 예배 참석 숫자가 평균 1천명, 5천명, 아니 1만 명이 되었다고 생각해보자. 더 이상 교회 예배당 건물 때문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어느새 화려하고 웅장한 예배당 건물도 구입한다. 해외까지 선교 사역을 하며, 국내는 물론 해외까지 설교 초청이 쇄도한다. 주일 외에는 거의 외부에서 집회를 인도한다. 물론 가정이다.

그러나 만일 이러한 가정된 상황이 현실화된다면, 과연 내 마음 상태는 어떨까? 여러분 같으면 어떨 거 같은가? 아마도 이 권좌(?)를 쉽게 내려놓기 어려울 것이다.

 

20대 청년 시절, 그리고 신학교 재학 중에 나는 한국 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부류 중 하나였다. 한국 교회 목사님들을 보면서 늘 적대적인 마음을 가졌다. 신대원 시절에 새벽에 일찍 일어나 헬라어로 성경을 보는 것이 새벽기도보다 더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게 옳다고 생각했었다.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열심히 공부하는 게 가장 최우선이라고 생각했었다.

전도사 시절, 눈에서는 레이저광선이 나갈 것처럼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소리를 지르고, 침도 튀겨가면서, 설교 강대상을 주먹으로 쳐보기도 하였다. 졸고 있는 중고등부 학생 앞에서 과일을 손으로 박살내가면서 설교한 적도 있었다. 하늘의 불을 받은 사자처럼 설교하였다. 왠만한 부흥강사가 부럽지 않았다.

 

한 번 설교하면 두 시간 정도는 금새 지나갔다. 설교 원고도 없이 한 시간은 그냥 설교가 가능하였다. 나름 뜨거운 열정을 가졌다고 자부하였다. 내가 옳고, 왠만한 다른 사역자들은 다 틀린 것처럼 보였다. 내가 한국 교회의 기준이고 대안이라고 생각하였다. 대다수의 다른 교회들은 다 문제가 있고, 내가 목회하는 교회만 옳은 것처럼 자신하였다.

그러나 만일 앞에서 가정했던 화려한 상황이 나에게 닥친다면, 아마도 나는 한국 교회의 타락을 가장 앞장서서 주도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나의 역할이 무엇인지 잊어버릴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 눈 앞에 보여지는 현상들 때문에 나는 내가 어떤 위치에 있어야 하며, 어떤 책임과 역할을 감당해야하는지 간과할 것 같다

 

분주하고 바쁜 환경 속에서, 늘 나를 바라보고, 나를 지지해주는 분위기에 흠뻑 취해 있다보면,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착각하기 쉽다. 마치 술에 취한 듯, 자기 만족에 빠질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세례 요한이 밝히는 거룩한 커밍아웃(?)’에 다시 한 번 주목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신자의 겸손이 무엇인지 다시금 되새겨야 한다.

우리는 주님의 종일 뿐이다. 종은 맡겨진 일을 하는 사람이다. 결과는 주인이 책임지는 것이다. 종에게는 무엇이 있어야 할까? 탁월한 능력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재치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순간적인 열정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카리스마 넘치는 매력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그것은 바로 충성이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1-2).

목사는 설교자로서 충성해야 한다. 설교를 통해 자신의 입담을 자랑하거나 한풀이를 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화려한 경력이나 어설픈 지식을 과시해서도 안 된다. 사람들의 반응에만 민감하여 성경이 말하는 내용을 가감해서도 안 된다.

아울러 성도는 설교를 듣는데 집중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 설교를 근거로 말씀에 순종해야 할 것이다. 설교를 들으며 하나님이 무엇을 요구하시고, 자신은 무엇에 순종해야 할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자신의 현실적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하려는 거품 섞인 기대감을 내려놓아야 한다. 듣고 싶은 얘기만 들어서도 안 된다. 내가 기대했던 관심 주제가 아니라고 고개를 숙이지 않아야 한다.

 

졸지 말자. 설교 시간에 성도가 졸기 시작하면 목사는 변질되기 시작한다. 피곤하면 전날에 푹 자야 한다. 보통 주일 공예배는 길어봤자 한 시간 조금 넘는다. 설교 시간은 보통 40분 미만이다. 좀 길게 하더라도 한 시간을 넘는 경우는 드물다. 눈 떠야 한다. 졸리면, 일어나서라도 들어야 한다. 졸음을 참는다고, 죽기야 하겠는가?

 

조는 것을 고민을 하지 말자. 안 졸고 잘 들을 생각부터하자. 목사나 성도나 다 같은 주님의 종이다. 그래서 충성스러워야 한다. 목사는 목사로서, 성도는 성도로서 자기의 역할에 충성스러우면 된다. 우리의 역할은 딱 여기까지이다. 이것이 우리의 한계를 아는 겸손한 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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