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마가복음 생각(8) 어디까지 내려갈 것인가?(막 1:9-11절)

천한필목사(수원)

by 김경호 진실 2017. 4. 28. 09:20

본문

마가복음 생각(8)

- 어디까지 내려갈 것인가?(1:9-11) -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1:9-11)

신앙 생활을 하다보면, 참으로 감격적인 상황들이 찾아올 때가 있다. 설교를 듣다가, 찬양을 하면서, 기도하다가, 책을 읽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감정이 북받치고, 눈물이 왈칵 쏟아질 때가 있다. 괜히 평상시보다 더 굳은 결심을 하고 싶을 때도 있다. 예수님을 닮고 싶다는 고백도 더 진지하게 하고, 큰 결단도 해 본다.

하지만 내가 처한 현실은 삭막하고, 각박하다. 누군가 나를 조금만 힘들게 하거나 외부적인 어려움을 직면하면, 그런 고상했던 감정들은 싹 사라진다. 내 억울함과 감정에 치우쳐서 나를 변호하기 바쁘다. 예수님을 닮아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너무 힘들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을 닮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모습까지 본받아야 할까?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다(9). 창조주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피조물인 인간에 불과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이다. 세례 받으신 이후 물에서 올라오시자 세 가지의 계시 현상이 나타난다(10-11).

우선 하늘이 갈라졌다(10). 이것은 어떤 의미일까? 복음이신 예수님이 앞으로 선포하실 진리는 인간의 철학과 이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것이다. 하나님의 주체로 이뤄진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성령이 비둘기 같이 강림하는 현상이었다(10).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인간 예수에게 성령이 임하여, 신성의 존재가 되었다는 것인가? 말도 안되는 소리다. 또한 비둘기와 같은 방법으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의미도 아니다. 이러한 해석에서 이단 사이비들이 스물스물 고개를 쳐드는 것이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강림하신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구원 사역을 행하시는 예수님과 늘 함께 하신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의 존재 자체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에게서부터만 비롯된다는 의미이다. 완전한 인간이시지만 인간의 죄된 육체에 갇혀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완전한 하나님으로서 이 땅에 완전한 인간으로 오셔서 구원 사역을 행하신다는 의미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는 현상이었다(11).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이라는 사실을 확증해주는 것이다. 이로써 예수님은 세례 요한으로부터 물 세례를 받기 이전부터, 아니 창조 이전부터 이미 하나님과 동등한 신적 권세를 가지신 분임을 분명히 밝히시는 것이다. 그러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지금 피조물인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던 것이다(9).

인류 역사 가운데 어떠한 왕이나 권세자도 예수님처럼 자기를 비워 내려오신 분은 없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권력자가 겸손한가?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더 중요하게 떠받들지는 못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중심일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 같아도 그것은 곧 자기의 어떠한 목적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으로서 죄인된 인류의 모습과는 차원이 다르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다(1:1). 창조 사역 때 동일하게 동참하신 분이시다(1:2). 그런 분께서 죄인된 인간인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이다(9). 요한이 잘나봤자 인간에 불과하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그런데도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죄인된 인간인 요한에게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으며, 물 속에 잠긴 채 잠잠히 세례를 받으셨다. 이것은 신의 굴욕(?)적 사건이라고 지적할 만하다.

물론 예수님은 유대인들처럼 죄를 자복하는 행위는 하지 않으셨다. 단지 세례만 받으셨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부패한 인간의 대표자로 오셨다는 의미이다. 이로써 모든 의를 이루시려는 것이다(3:15).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 요한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한없이 부족한 존재이다. 아니 죽을 수밖에 없는 저주의 대상에 불과하다. 먼지보다 못할 수도 있는 미개하고 초라한 존재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미천한 인간으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세례 받도록 일하셨다. 오로지 하나님 나라의 큰 일을 위해서 말이다. 우리 인간의 생각과는 차원이 다른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세례 요한에게는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만한 어떤 자격과 기준도 없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다.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사용받는 특별한 비법은 사실상 없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공평하심에 따라 세례 요한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한 것이다. 이것이 자기 분량대로의 의미이다.

아무리 그렇다하더라도 복음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인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인간의 상식으로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더 큰 목적을 위해서 지금의 이 과정을 기꺼이 받아내셨다.

좀 더 넓게 보자면, 예수님이 받으신 물세례는 단순한 세례가 아니라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 를 상징하는 것이다. 단순한 겸손이 아니다. 보이기 위한 쇼가 아니다. 예수님은 실재(實在)이셨다. 실제로 자기를 내려놓으셨다. 죽음의 십자가를 지는데까지 말이다.

예수님을 닮겠다는 것은 바로 여기까지 내려가야 한다. 병고치고, 귀신 내쫓고, 수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받는 모습에만 주목하지 말자.

우리는 흔히 이런 표현을 쓴다.

도대체 이해가 안된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더 이상은 양보할 수 없다’, ‘이것은 내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다등등과 같은 감정을 표현할 때가 있다. 진정 예수를 따른다고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께서 어디까지 내려가셨는지를 주목해야 한다.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찾아와 세례를 받는데까지 내려가셨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이 아니다. 예수님처럼 그렇게 내려가기란 어렵다. 그러나 생각해보고, 고민해보아야 할 모습이기는 하다.

과연 우리는 어디까지 내려갔었나? 앞으로는 어디까지 내려갈 것인가?

그리스도인은 복음 때문에 무시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자들이다. 또한 복음 때문에 상대를 높여주고 인정해주는 것을 거룩한 숙제로 받아들이는 자들이다.

교회 봉사 좀 한 것까지고, 헌금 좀 했다고, 남들보다 조금 양보하고, 고생 좀 했다고 마치 굉장히 많은 것을 내려놓고, 희생했다고 착각하지 말자. 생색내기일 수 있다.

그대의 알량한 자존심마저 내려놓을 때까지 더 내려가야 한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구원받은 삶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이다. 그러나 구원받은 삶에는 나의 순종과 노력이 분명 포함되어야 한다. 물론 주님이 이끄시지만 나의 육체적 수고와 몸부림이 있어야 한다. 구원받은 성도로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분명 나의 땀이 흘러야 한다.

제자 훈련을 단계별로 받는다고 해서 신앙의 과정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집사, 장로 직분을 맡는다고 신앙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이름 있는 목사와 가깝게 지내는 것이 내 신앙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소위 유명한 교회에 다니는 것이 내 신앙을 증명하는 것도 아니다. 나의 수고와 땀을 흘려야 한다. 인내해야 한다. 더 많이 내려놓아야 한다. 더 깊이 내려가야 한다.

제자도는 이론이 아니다. 복음은 실재(實在)이다. 신앙은 현실이다. 창조주로서 피조물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이고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을 기억하자. 복음은 자기 체면, 자기 명예, 자기 과시, 자기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는다.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어지는 과정들을 묵묵히 받아내는 것이다.

여름에는 에어컨 잘 나오고, 겨울에는 히터가 빵빵하게 나오는 예배당에 말끔한 옷차림으로 참석하여 앉아있는 것은 신앙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것은 제자의 삶에 시작도 아니다. 워밍업일 뿐이다. 성경 지식을 채우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자.

내가 어떤 사람인지 한 번 보여줘야 정신차리겠군

내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나를 이 정도로 취급하다니

나한테는 최소 이 정도는 대접해줘야지

나는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야

같이 놀아주니까 나를 같잖게 보는구만

이러한 생각이 아직 당신의 마음 가운데 득실거리고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아주 꼴보기 싫은, 역겨운 사람이다. 주위를 둘러보라. 당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가방에 책만 가득 넣고 다닌다고 공부를 잘하는 게 아니다. 체육관에 들락거린다고 해서 운동을 잘하는 게 아니다. 성경 책만 들고 다닌다고 해서 신앙 생활 하는 것이 아니다. 표면적인 종교 행위를 가진다고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목과 어깨에 힘을 풀어야 한다. 눈에서 서슬퍼런 칼날을 제거해야 한다. 세상 앞에서 그대의 위대함을 증명해보이려고 하지 마라. 내려가라. 더 깊이. 더 많이. 아직 멀었다. 잠잠히 입다물고 내려가라. 복음이신 예수님처럼.

아직도 그대의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고자 하는가? 그대가 옳다는 사실을 반드시 주장해보이고 싶은가? 고함이나 지르고 싶은가? 거들먹 거리고 싶은가? 얼굴에 인상이나 쓰며, 사람들을 제압하고 싶은가? 목에 힘주는 것밖에 모르는가? 나 자신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초라한지 다시금 되새겨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나는 비참한 존재이다.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라면, 나는 한없이 부끄러운 존재이다.

잘 날 것이 없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떨리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우리의 진정한 고민과 질문은 나 자신을 향해야 한다. 과연 어제는 어디까지 내려갔었는지, 과연 오늘은 어디까지 내려가고자 하는지. 내일에 대한 다짐만 하다가 오늘의 현실을 지나쳐서는 안된다. 바로 오늘 지금 더 내려가기 위해서 발버둥을 쳐야 한다.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728x90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