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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지혜’의 특수한 성격> 송영찬목사

송영찬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7. 8. 5.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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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지혜’의 특수한 성격>

잠언이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특수한 상황에서 그들에게 실천적 지혜를 주기 위해 주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독특한 의미의 지혜를 그 주제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잠언은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모략을 얻을 것이라”(잠 1:5)고 밝힌 것에서 잠언이 다름 아닌 지혜 있는 자들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히브리어 본문에 근거해 이 구절은 “지혜로운 자는 들어 교훈을 더하라 그리하여 명철한 자가 지침을 얻도록 하라”(밤 1:5)고 번역되는데, 앞의 4절에 비추어 볼 때 경험이 없고 유혹을 받기 쉬운 미숙한 사람들에게 삶의 지침을 주기 위한 것으로 옳고 바른 규범으로 지혜를 배우고 청종하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렇다면 이 말은 지혜 있는 자가 더 지혜를 가지게 되고 지혜 없는 자는 더 어리석은 자가 된다는 뜻을 포함하게 된다.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잠언 기자는 지혜 있는 자들은 더 지혜를 얻음으로써 “잠언과 비유와 지혜 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을 깨달으리라”(잠 1:6)고 강조하고 있다.


잠언을 비유와 오묘한 말로 대신하고 있다는 것은 마샬(잠언)의 특성을 암시한다. 즉 지혜를 얻게 하기 위함인 잠언은 마치 문이 열린 틈새로 감추어져 있는 무엇을 보는 것과 같다. 때문에 지혜의 개방성에도 불구하고 지혜는 아무에게나 접근이 가능하도록 열려 있는 대상이 아니다. 인간의 지적 능력으로 얻어지거나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혜는 사람의 지적 능력 앞에서 불투명한 존재이다. 오히려 지혜는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열어 보여주시지 않고서는 지혜를 얻을 수 없다. 따라서 지혜는 지혜 있는 자에게 열려진다. 미련한 자, 우매한 자에게 있어 지혜는 감춰져 있는 비밀과 같다.


여기에 잠언의 특성이 나타난다. 잠언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백성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이들 지혜 있는 자들이 더욱 지혜를 얻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반대로 어리석은 자들은 지혜를 배척하기 때문에 지혜로부터 더 멀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잠 2:6)라는 말씀처럼 ‘지혜’란 오직 여호와로부터 나온다. 따라서 지혜를 얻기 위해선 하나님께서 지혜를 보여주셔야 한다. 이것은 ‘지혜’가 계시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며 동시에 지혜의 특수한 성격을 보여주기도 한다.


잠언 기자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 1:7)고 선포하고 있는 것은 잠언이 하나님의 계시로서 그 백성을 위한 것이며 상대적으로 미련한 자, 즉 하나님 경외를 포기한 자들에게는 지식 곧 ‘지혜와 훈계’가 감춰져 있다는 선언적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는 자에게는 계속해서 지혜가 공급되지만 어리석은 자는 지혜를 배척하다가 망하고 말 것이라는 경고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는 명제는 지식의 목적이 여호와를 경외함에 있음을 의미한다(7절). 지식의 옳고 그름의 척도가 곧 여호와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떠나서는 지식에 대한 그 어떤 논의나 논쟁을 거부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주의 창조주이시고 우주의 통치자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통치자께서 세우신 질서에 근거해 있는 지식만이 유일한 판단의 척도가 된다. 피조물인 인간은 이 질서에 순종해야 하며 그 질서를 제정하신 인격적 존재인 하나님을 인정하고 순종해야 하는 것이 지식의 첫 번째 원리이다.


잠언은 지혜(????)와 어리석음(????)을 대조하면서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취해야 할 바른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여호와 경외’가 지식의 출발점이 된다. 반면에 어리석은 자는 ‘여호와 경외’를 떠나 생각할 수 없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한다. 잠언에서 지혜와 어리석음을 대조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인간의 이성은 인간 존재의 근본이지만 한편으로는 사람을 지혜롭게 하기도 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사람을 어리석게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여호와 경외를 토대로 하는 이성의 활동은 지혜(호크마)를 추구하지만 하나님을 배척하는 이성 활동은 어리석음(???? : 아르마)을 추구할 뿐이다(잠 1:10-19).


이 말은 하나님 경외를 통해서만 지혜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동시에 하나님 경외가 없다면 지혜로의 접근도 없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우리 주께서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마 13:12)고 하신 말씀의 의도와 일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관심은 지혜로부터 멀어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훤화하는 길 머리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가로되”(잠 1:20-21)라는 묘사처럼 지혜는 모든 사람들에게 발견되기 위해 소리를 내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이 닫혀 “내가 부를지라도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펼지라도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잠 1:24-25) 한다고 지혜가 책망하고 있다. 그 결과는 재앙이 임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26-28절) 사람들은 지혜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않는다. 이것이 부패한 인간의 심성이다(롬 1:18-32 참고).


특별히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며 나의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잠 1:23)는 말씀 속에는 ‘지혜’가 의인화되어 등장하고 있다. “나의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며 나의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는 선언은 절대적인 신적 선언이다. 이 점에서 ‘지혜’의 존재가 신적 권위자임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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