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 위에 있는 모든 성도(하나님의 백성)들은 ‘전투하는 교회’(a Militant Church)의 일원이다. 토마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 1535-1603)는 그의 교리 강론에서 이르기를 “그들은 세계의 모든 지역에서부터 한 그리스도의 영 안에서 함께 모인 사람들인데, 영적인 싸움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왕국의 대적자들에게 대항하고 있는 자들”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처럼 “영적인 싸움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왕국의 대적자들에게 대항하고 있는 자들”로 이뤄진 성도들의 모임인 전투하는 교회에는 “가르침과 다스림을 위하여 항상 직원들(항존직)과 사역자들(목사와 교사)을 주신다.”고 카트라이트는 덧붙여 말한다.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회와 관련하여서 우리들이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종교개혁 이후의 참으로 개혁된 교회들에는 항존직원과 사역자가 새워지지 않은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재세례파의 경우에는 ‘사제’(Sacerdos, Priest)에 대한 반발로 심지어 일체 교회의 직원을 두지 않기까지 했었지만, 참으로 개혁된 개신교회들은 사제주의를 반대했을지라도 결코 교회의 직원들과 사역자들을 두지 않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로마가톨릭에서 사제들의 권위는 ‘교황’(Pope)의 권위에 기반을 둔다. 기본적으로 모든 사제들은 교황에 의해 세워졌다는 점에서 기본적인 권위의 계승이 이뤄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로마가톨릭에 있어서 교황권에 대한 수호는 가히 절대적인 것이다.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로서의 교황의 권위가 부정되는 순간, 로마가톨릭의 모든 직제의 권위가 붕괴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교황주의를 반대하는 개혁자들은 교황이 결코 사도직의 계승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주장했다. 그러므로 카트라이트의 교리 강론에서도 “사도들은 후계자들을 두었는가?”라고 물은 뒤, 곧장 답변하기를 “정확히 말해, 사도들은 사도권의 위엄과 존엄을 지닌 후계자를 단 한 명도 두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 근거로 행 12:3절에서 야고보 사도가 칼로 죽임을 당한 후에 또 다른 사도를 새우지 않았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행 2:26절에서 맛디아가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가 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사도는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 하나”(행 2:21-22)에 국한하며, 특별한 예외로서 사도 바울 외에는 더 이상의 계승자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카트라이트는 사도와 관련한 설명을 그것으로 끝마치지 않고 이르기를 “다른 면에서는, 말씀과 성례, 그리고 열쇠(치리)권을 수행하기 위해 합법적으로 소명된 모든 목사들과 복음의 사역자들은 참으로, 의심할 바 없이 사도들의 후계자들이다.”라고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그처럼 목사들(합법적으로 새워진 목사)과 복음의 사역자들이 사도들의 후계자들인 것은, 그들에게 권위(위엄과 존엄)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가진 복음의 사역에 있어서 (사도들과) 동일한 임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로마가톨릭의 교황주의에 근거한 사제들과 확연히 다르며, 동시에 재세례파의 일체 교회의 직원들을 두지 않는 생각과도 명백히 다른 종교개혁의 직분이 바로 합법적으로 새워지는 목사들과 복음 사역자들인데, 기타 항존직의 경우에도 본질상 그들과 동일한 임무를 계승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참으로 개혁된 교회에는 말씀과 성례, 그리고 열쇠(치리)를 수행하는 합법적인 사역자들로 된 치리기구를 구성하는데, 바로 그들에 의해 지상의 교회들이 전투하는 교회로서의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치리기구 자체로서 전투하는 교회로서의 영적 전투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멜랑크톤(Philip Melanchthon, 1497-1560)이 1521년에 쓴 『신학 총론』(Loci Communes)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주교들은 종이지 주권자나 관원이 아니며, 뿐만 아니라 주교들은 법률 제정권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인간의 말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만 위탁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개혁교회의 치리기구를 주교와 같은 고위성직자 체제에 의해 다스려지는 기구로 생각할 수는 없지만, 그 원리에 있어서는 합당하다. 즉 전투하는 교회의 전투는 치리기구 자체가 아니라 그들에 의해 수종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수행되는 것이 그 본질이다.
이처럼 전투하는 교회로서의 지상의 교회에 중요한 요소가 바로 목사를 비롯한 복음의 사역자들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그들이 수행하는 사역(말씀 사역)에 싸우는 본질이 있는 것이다. 그런 사역자들을 새우지 않는 재세례주의에 바탕을 둔 무교회주의적인 모임들은 결코 전투하는 교회가 되지 못하며, 그런 사역(말씀 사역)을 수행하지 않는 로마가톨릭의 사제들 또한 결코 영적인 전투를 수행하지 못하는 것이다.
장대선목사
“공적인 도둑질”에 관하여 (0) | 2019.05.21 |
---|---|
교회에서 ‘가장 최악으로 보이는 사람’이 ‘가장 본질적인 지체’일 수 있다.| (0) | 2019.05.16 |
‘제4계명’의 존폐(存廢)| (0) | 2019.05.15 |
주일을 거룩하게 함에 관하여 (0) | 2019.05.15 |
헌금, 반드시 예배 중에 드려야(혹은 있어야) 하는가? (0) | 2019.05.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