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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의 목적은 ‘구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장대선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9. 5. 22.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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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시대를 거치면서 로마가톨릭은 기독교 신앙을 성경과 분리하여 이뤄지는 행위의 종교로 변질시켜 놓았다.


그러나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아 원래의 기독교를 계승하여 형성된 개신교회는, 행위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다시 성경과 그에 근거하는 믿음의 신앙으로 돌려놓았다.

 

하지만 성경의 진리를 어떻게 해서든 매장시키려는 사단의 획책은 개신교 진영 안에 비()진리의 사상들을 퍼뜨림으로서 다시 성경의 진리가 함몰되도록 했는데, 대표적으로 재세례주의(Anababtism) 및 정적주의(Quietism)자들의 등장 가운데서 성경의 진리는 또 다시 쉽게 이해하거나 분간하기 어려운 내용으로 자리하게 되어 버렸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의 역사를 살피는데 있어서는 로마가톨릭에 대한 반대와 더불어, 성경을 사사로이 풀어 오류에 빠짐으로서 진리를 희석시켜 더욱 알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역할을 수행한 종교개혁 진영 내의 오류들을 정확히 견제(牽制)하는 안목이 또한 요구된다.

 

일반적으로 로마가톨릭과 구별되는 개신교회의 신앙의 특성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원리에 따라 분류될 수가 있다. , 오직 성경의 진리를 표준으로 하는 개신교 신앙과 성경 외에 로마가톨릭교회(성경 외의 전통들을 중심으로 하는)를 원천(源泉)으로 하는 종교로서의 차이를 확연히 구별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로마가톨릭 외에 재세례주의나 정적주의 등 종교개혁 진영 내의 오류(誤謬)들과 구별되는 개신교회의 신앙의 특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오직 성경의 원리 외에도 전체 성경(Tota Scriptura)’의 원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사실 정적주의나 재세례주의의 사상들은 종교개혁시대 이전에, 이미 로마가톨릭의 미신적인 종교형태 가운데서부터 그 포자(胞子)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로마가톨릭에 반대하는 종교개혁의 분위기가 조성되지 급격히 싹을 틔우게 되었는데, 정적주의는 기본적으로 성경말씀과 크게 상관이 없는 방식으로 형성된 가벼운 신비주의적 성향이었는데 반해, 재세례주의는 성경말씀을 받되 주로 신약성경만을 중심으로 하는 가운데서 정적주의와 유사한 내적인 감흥(感興)을 추구하는 양상이었다. 그러므로 재세례주의자들은 주로 성경을 문자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것과 아울러, 성령의 내적 조명을 인간중심으로 추구하는 특징을 보였다.

 

그러나 종교개혁을 올바르게 계승한 개신교 진영에서는 전체 성경의 원리에 따라 신구약성경 전체의 맥락을 파악하고 따르는 신앙을 표방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보였다.

 

하지만 종교개혁 진영 안에서 성경 진리의 확실한 초점을 빗겨간 자들은 정적주의자들이나 재세례주의자들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오직 성경의 원리와 함께 전체 성경의 원리를 추구했던 개혁주의자들 가운데서도 차츰 미묘한 선에서 초점이 틀어지기 시작했으니, 대표적이면서도 아주 구별하기 어려운 주제인 구속사(redemptive history)’ 중심의 복음주의적 성경해석이 바로 그것이다.

 

종교개혁 진영 안에서 구속사 중심의 복음주의적 신앙을 형성한 뿌리는 이미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데, 루터의 이신칭의(以信稱義)’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핵심으로 하는 기독론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구속사 중심의 복음주의적 신앙의 중요한 근거를 형성했다.

 

하지만 기독론 중심의 구속사적 조망은 전체 신학의 중요한 요점 가운데 하나이기는 해도, 그것 자체가 전체 성경의 최종적인 요지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의 재인식(再認識)이 요구된다.

 

18세기 신학자들 이후로 대부분의 개신교의 신앙 가운데서는 기독론(christology)적인 구속(혹은 구원)사 중심의 신앙이 개신교의 핵심진리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개신교 역사 가운데서도 특별히 개혁신앙 혹은 정통주의 신앙의 핵심은 그것과는 분명한 심도의 차이를 지닌 채로 계승되다가 17세기에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회의를 통해 도출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7)에서 확고하고도 분명하게 그 입장이 정리되어 공적으로 선포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배경을 지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중보자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은 제8장에서야 비로소 언급되며, 7장에서 하나님의 언약이 다뤄질 뿐 아니라 심지어 창조 자체도 제4장에서 다뤄지는 내용으로서 그 이전에 제3장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 다뤄지고, 심지어 그조차도 제2장의 하나님과 삼위일체에 관한 고백 다음에야 다뤄져 있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통해 확고히 정립된 개혁신앙의 틀은 근본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근거하여 서술되는 형식이며, 그러한 모든 주제들의 원천적 근거가 바로 제1장에서 다루는 성경에 대한 신앙에 있으니, 그러한 전체 신앙의 틀이 바로 오직 성경전체 성경이라는 원리에 따른 성경관()에 정립되어 있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틀이 의미하는 바를 가장 직접적으로 다루어 주는 것은 다름 아닌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과 소교리문답이다.

 

특히 소교리문답은 제1문에서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에 대한 질문에 답변하기를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그러한 질문과 답변은 한마디로 오직 성경과 전체 성경의 원리에 근거한 신앙에 있어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은 인간의 구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있다는 것이다.

 

또한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의 그러한 원리는 웨스트민스터 회의에서 비로소 완성된 독특한 것이 아니라 이미 종교개혁의 원리 가운데 있었던 것인데, 그것이 바로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이라는 종교개혁의 구호다.

 

따라서 오직 성경의 원리와 전체 성경의 원리 가운데서 파악되는 중요한 성경의 원리이자 요지(要旨)가 바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신앙의 취지로서 굳건하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창조의 최종적인 목적은 인간의 구원에 있는 것이 아니며, 이를 넘어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데에 최종적이고도 궁극적인 목적이 있는 것이다.

 

구속사 중심의 복음주의적인 신학과 이를 배경으로 하는 언약신학(covenant theology)은 분명 유효하고 중요한 신학적 개념들이지만, 그것 자체로 최종적인 신앙의 지점이 아니라 더 나아가야 할(beyond) 신앙의 확보점이다. 바로 그러한 나아감 가운데 하나님의 신적 작정의 내용인 예정(predestination)’이 거의 최종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신적 작정의 신학 가운데서는, 인간의 구원과 피조물들의 회복은 수단일지언정 결코 목적이 아니다.

 

최근에 한국의 개신교 신학에 꽤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칭의(justification)’성화(sanctification)’에 관한 대립각, 법정적 칭의(forensic justification)’에 반대하는 유보(留保)’, 혹은 종말론적(eschatological) 칭의의 개념도, 사실은 구원의 역사만을 강조하는 성경해석과 설교로 인한 오해 가운데서 대두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전체 성경의 요지로서의 신적 작정에 근거하는 칭의의 의미를 온전하게 이해하는 신학과 신앙이 뿌리내린 상황이었다면, 그런 비판(유보적 혹은 종말론적 칭의 개념의 필요성을 제기하는)은 전혀 어필(appeal)하기 어려웠을 것(물론 더 많은 원인들이 있지만)이다.

 

결국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에 따른 바른 신앙의 내용은 인간의 구원에 최종적으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자들을 택하실 뿐 아니라 또 어떤 자들을 유기하심으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영광과 공의(公義)의 작정 가운데에 있음을 분명히 고백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확고한 위치는, 유보적 혹은 종말론적 칭의라는 해괴한 개념들이 유행하는 오늘의 시대에도 명확하고도 분명한 신앙의 반석(petra)인 것이다.


장대선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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