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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의 목적은 ‘구원’에 있지 않다 - Ⅱ|

장대선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9. 5. 22.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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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에 따른 바른 신앙의 내용이 인간의 구원에 최종적으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며, 어떤 자들을 택하실 뿐 아니라 또 어떤 자들을 유기하심으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영광과 공의(公義)의 작정 가운데에 있음을 분명히 하는 구체적인 신앙은 과연 무엇일까?

 

우선 그것은 인간의 창조목적과 관련한 교리문답의 내용과 연관되어 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것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어떤 것들을 통해 이룰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에게서 기원하는 영광을 다시 하나님께로 돌려 드리는 것이 영광돌림의 기본적인 바탕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그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다시 되돌려 드릴 수가 있는가?

 

그러한 물음에 대한 답을 칼빈의 제네바 교리문답이 명료하게 제시하는데, 칼빈의 제네바 교리문답 제1문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은 뒤에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라고 답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사실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는 말은 모든 것들의 기원에 관한 가장 기초적인 전제를 함축하고 있는 말이다. 따라서 그런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모든 피조물들과 관련한 개념들조차도 그 기원을 하나님에게 두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모든 사실들을 알 수 있는 것은 그 모든 지식들을 제공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데, 그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 바로 계시’(revelation). 그러므로 계시라는 말 자체에는 전적으로 하나님에게서 기원하는 원리가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에 관하여, 혹은 하나님에게서 기원하는 그 어떤 개념들을 이해하려고 할 때에는 기본적으로 계시에 역행하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참된 신앙(혹은 종교)과 반대되는 일반적이고도 자연적인 신앙(자연종교)의 기본적인 바탕은 인간의 추구와 탐구로서, 그런 것은 얼핏 계시를 추구하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우리의 의지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계시에 역행한다.

 

반면에 참된 신앙과 종교는 그 모든 바탕과 출처를 철저히 하나님께 두는 형태로 되어 있는데,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는 말은 지식의 유일한 출처를 하나님께로 두는 가장 기본적인 계시의 원리를 전제해 주는 것이다.

 

물론 인간이 탐구하고 추구하는 지식이라고 하더라도 그 근원은 여전히 하나님이시기에 그런 지식이 하나님과 무관하다고 말할 수는 없으며, 바로 그러한 전제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보자면 인간이 추구하는 지식과 이해 자체도 일종의 계시로서의 의미를 충분히 담을 수 있다.

 

아울러 그러한 계시의 성격을 일컬어 일반계시’(혹은 자연계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1:18-23절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란 바로 그처럼 우리의 의지에서부터 기원하는 모든 지식의 방편들과 지식 그 자체에 대한 명확한 한계를 나타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로마서는 그러한 바탕 가운데서 율법믿음을 언급하는데, 율법의 준행과 믿음 자체가 우리 자신에게서 유래하는 한에서는 모두 일반계시와 마찬가지 맥락에서의 한계 내에서 이뤄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로마서는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3:28)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4:2)고 했으니, 의와 믿음의 원천 또한 일한 것이 없이……의로 여기”(4:6)시는 하나님께만 전적으로 있는 것이다.

 

또한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신적 작정과 그 가운데 있는 창조의 목적, 즉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主權)적인 역사로 말미암는 것이며, 바로 그러한 작정의 내용을 가감(加減) 없이 확신하는 것이야말로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기본이요 최고인 지식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섭리를 포함한 모든 일들의 원인은, 단편적인 한 원인의 체계로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작정 혹은 예정에 대하여 오해하는 많은 경우들처럼 모든 일들은 하나님 안에서 필연의 줄로만 고정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피조물들의 자원하는바 능동적이고도 고의적인 자발성이라는 것에 전혀 결속점이 없는 것처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제2원인 가운데서는 모든 일들이 필연적인 인과율로 엮여져 있지만, 그러한 고정줄은 결코 제1원인 없이 연결될 수 없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시작 뿐 아니라 성취와 완성에 이르는 모든 일들을 시간적 순서나 필연성에 상관이 없이 작정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은 창조와 함께(동시에) 이미 하나님께로 돌려진 것이며, 다만 시간의 역사들 가운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지식은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히 인정하고 확신하는 바로서의 굳건한 지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러한 지식 가운데서 우리들은 영광을 생각할 수 있다. 그 사실을 떠나서 돌리는 모든 영광의 모사(模寫, 하나님에게서 기원하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우리에게서 기원하는 모든 껍데기들)들은, 영광이 아니라 오히려 망령되이 일컫는 죄악에 다름이 아니다.

 

신적 작정 가운데서의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과 그것을 아는 깊은 지식이 결여된 섣부른 실천이란,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는커녕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우상으로 바꾸”(3:23)는 종교적 폐역이며,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11:36)라고 한 사도 바울의 선포는 영영히 서리라 하라고 한 이사야 선지자의 선포와 동일한 울림을 이루고 있기에, 우리로서는 그 모든 사실을 성경계시 가운데서 분명하게 깨닫는 그 자체로 하나님께 되돌리는 영광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는 약 1:5절 말씀은 우리에게 어떤 행위(구하는 것)를 촉구하는 말씀이기 이전에, 그 자체로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두고 있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끝은, 우리들의 헌신이나 수고의 촉구가 아니라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22:20)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확신하는 가운데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21)이라는 말씀으로 끝나고 있다. 그 앞에서 우리의 헌신이나 수고는 마땅히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17:10)이라는 고백으로 마무리될 뿐이다.



장대선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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