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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빈(淸貧)’을 버리는 현대의 신앙

장대선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9. 5. 22.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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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자본주의의 시작이 칼빈주의에서 유래한다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자본주의(capitalism)와 개신교신앙(Protestantism)을 밀접한 관계 가운데서 정의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역사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결코 배제할 수 없는 기초를 이루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자본주의사회는 재화의 사적 소유권을 사회 구성원의 양도 불가능한 기본권으로 인정하는 사회 구성체를 말하는 것으로, 이는 재세례주의(Anababtism)의 일부 분파들을 비롯한 기독교열광주의자들의 원시공산사회(2:43-47)’의 추구에 반대하여 개인의 재산권을 보장했던 칼빈의 재세례파에 대한 논박에서 그 기본적인 원리를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그처럼 자본주의의 기본적인 원리를 제공한 개신교 신앙에서는 기본적으로 부지런함과 검소한 삶을 통한 개인의 재산권을 보장하는 것으로, 현대의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것과 같은 절대적 이윤의 추구와는 전혀 다르다. 그러므로 칼빈주의적 개신교 신앙에서 불로소득(不勞所得)’이란 결코 긍정적인 재산권의 보장영역이 아니며, 오히려 각자의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 가운데서 열심히 일하는 신앙의 자세가 강조될 뿐이다.

 

무엇보다 행 2:43-47절의, 흔히 말하는 원시공산사회(혹은 공동체)는 개인의 재산권을 전혀 보장하지 않고 몰수하는 의미의 공동체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행 5:4절의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찬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라고 한 아나니아에 대한 베드로 사도의 책망에서 파악해 볼 수 있는데, 바로 그러한 개인의 재산권보장을 바탕으로 각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의 재물만을 나누어 주었던 것이다.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4:35)”이라는 말은 자족(自足)의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지, 불로소득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닌 것이다.

 

그런데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에서 유의하여야 할 것은, 그들의 범죄가 하나님께 거짓말을 한 것(5:4)이었다는 점이다. 얼핏 자신들이 소유한 부동산을 모두 매각하여 상당부분(일부분)을 헌금한 아나니아의 행동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땅 값 가운데 얼마를 감추고서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 앞에 마치 전 재산을 내어 놓은 것처럼 거짓말을 했던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당시에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4:32)”었던 것은 행 2:46절에서 말한바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한 것이었는데, ‘순전한 마음(ἀϕελτητι καρδίας)’이란 순수하고 진실한 마음 뿐 아니라 성실하고 검소하며 소박한 마음을 일컫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원시공산사회의 모습은 마르크스주의와 같이 강제적이거나 현대 자본주의의 기부(donation)행위처럼 자기만족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함께 나누기 위하여 열심히 일하고 땀 흘리는 가운데서 이뤄진 소박하고 진실 된 행위였다.

 

반면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행위는 전혀 소박하지도 않으며 또한 전혀 검소한 것도 아니었으며, 무엇보다 전혀 진실 된 행위가 아니었다. 한마디로 그들의 기부는 거짓 된 기부요 거짓말로 하는 기부였던 것이다.

 

사실 부()의 추구에는 거의 항상 거짓이 수반되기 마련이다. 잠언 30장은 아굴의 것으로, 특별히 8절에서 이르기를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라고 했는데, 그에 앞서 이른 말이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이며, 5-6절로 보건데 그것은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된 헛된 것과 거짓말을 멀리 하옵소서라는 말이다.

 

아울러 5절에서 말한 하나님의 말씀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 3절에서 언급한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과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가난과 부의 극단 가운데서 하는 헛된 것과 거짓말이란, 9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하나님 따윈 알 바 아니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제 팔 계명을 어김이 바로 이를 명하신 하나님을 욕되게 함이기에)할까 두려워함이다. 한마디로 가난(지나친 가난)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인식과 지식보다는 당장의 궁핍에만 전념하도록 함으로 거짓말을 하게(부인하게)하며, (지나친 부의 추구)는 눈앞의 부에 눈이 멀어서 하나님께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게 한다는 점에서 헛된 것이다.

 

이 같은 성경 말씀 가운데서 우리들은 자족(적당량에 추구하여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 자체로 만족하는)하는 삶, 청빈(淸貧)의 삶을 이해할 수 있으니 그런 바탕에서 칼빈주의적인 자본주의의 기초는 근면(勤勉)과 성실(誠實)만이 아니라 검소(儉素) 또한 포함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들의 신앙은 이미 부정적자본주의(mammonism)’에 물들어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의 일꾼인 목사(가르치는 자)들조차 가난을 두려워함으로써 이미 그 마음이 가난에 처해 있거나, 재물에 현혹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이익의 도구로 삼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거짓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름으로 말씀 자체를 이익의 도구로 만들어 버리는 경우가 허다한 실정이다. 행실로는 하나님의 말씀과 정반대로 행하면서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로 이미 신자들에게 암묵적인 거짓말로써 받아들여지며, 암묵적인 거짓말을 조장하기 때문이다.

 

거두절미하고, 오늘날 가난하고 이름 없는 목사가 전하는 진리에 관심을 보이는 신자가 얼마나 되는가?

 

기름진 얼굴에 유명세가 더해진 목사들(비록 그에 걸 맞는 비리(非理)들이 있을지라도)에게 관심을 보일지언정, 유행이 한참 지난 드레스코드에 빈티 나는 모습의 목사에게는 그저 에티켓 선의 영혼 없는 존중의 시늉만 보이는 것이 대부분이다. 심지어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서 전한다고 해도 말이다.

 

그러나 아굴은 지금도 잠언 30장에서 이르기를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5)”고 말하면서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6)”라고 말할 뿐, (가난)로나 우()로나 치우치기를 원하지 않는다. 경건을 이익의 도구로 생각하는(딤전 6:5) 자들이 도처에 넘쳐날수록, 그러한 말씀이 더욱 분명하게 진리로 드러나 있는 것이다.




장대선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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