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칼빈주의적인 개신교회들의 독특성

장대선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9. 6. 14. 09:18

본문

종교개혁의 대표적 심벌이 된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신학 사상은 흔히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로 대표되는데, 칼빈(John Calvin,1509-1564)은 이를 더욱 구체적으로 진전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cognitio Dei)의 강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신칭의로 대표되는 루터의 종교개혁은 잘 아는 바와 같이 로마가톨릭 체제를 어느 정도로 용인하는 가운데서 이뤄졌는데, 대표적으로 성찬에 있어 공재설(Consubstaniatio)’이라는 중도적 입장을 취하여 로마가톨릭의 화체설(Transsubstantiatio)에서 근본적으로 분리되지 않았다.

 

그러한 루터의 신학적 입장은 사실 그가 95개조의 테제를 비텐베르크 교회에 붙일 때에 전혀 종교개혁 취지 가운데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 그리고 이후로 농민전쟁(Bauernkrieg, 1524~1525)에 대한 루터의 반대 등에서 그 한계가 드러났다.

 

기본적으로 루터가 말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신앙은 로마가톨릭 신앙의 부조리한 양상들이나 형식주의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라기보다, 근본적인 신앙의 양상에 대한 약간의 변화 정도에 만족하려는 입장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칼빈에게서 볼 수 있는 신앙의 개혁은 루터와 같은 양상의 변화 정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로마가톨릭의 신앙을 거슬러 더욱 근원적인 신앙의 바탕으로 개혁하는 취지 가운데서 근본적으로 다른 위상을 취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추구한 칼빈의 신학은 그 가운데서 예정(predestination)’에 근거하는 독특하고 비가시적인 본질을 추구하는 신앙을 양산하게 됐는데, 성례론에 있어서 로마가톨릭과 루터파와 같은 가시적 본질(substance)에 대한 이해와 추구를 배제하면서도 쯔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의 견해처럼 단순히 기념(Gemeinschatsmahl)으로서가 아니라 영적 임재(praesentia spiritualis sive virtualis)를 확립한 것이다.

 

이러한 칼빈의 신학 체계 가운데서 성례(성찬)에 사용되는 떡과 음료는 분명 현실의 떡과 음료로 있으면서도,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를 나타내는 가시적 은혜의 수단으로도 분병하게 그 기능과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한 칼빈 신학의 독특성은 신앙의 전 체계를 이루어 가시적 교회론에도 적용되는데, 칼빈에 의해 개혁된 신학에 있어서의 교회는 로마가톨릭이나 루터파와 같이 가시적이고 예전적인 교회론을 배제하면서도, 재세례파의 경우처럼 전혀 비가시적 신앙의 요소만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가시적 신앙의 요소(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근거하여 가시적인 교회를 독특하게 세워 나간다.

 


그러나 사실 거의 대부분의 현대 신앙에 있어서, 교회를 이루는 것은 철저히 가시적이다. 그러므로 그런 가시적 교회들이 성례전(sacrament)을 중심으로 하건, 교제와 프로그램들을 중심으로 하건 간에 중요한 것이 바로 형식이며, 그런 형식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예배당(건물)’이 불가분하게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irony)하게도 그러한 현대교회들 대부분이 의식하고 추구하는 신앙의 양태는 오히려 감정적이거나 신비적인 것들이다.

 

예컨대 G12와 셀교회(Cell Churches), 두날개, 알파 컨퍼런스 등 거의 모든 현대적 교회 프로그램들이 가시적 교회의 성장만을 지향하면서도, 정작 그것을 통해 추구하는 신학의 방향은 신비주의인 것이다.

 

또한 그러한 신비주의 신학에 대한 보장이 근거하는 것이 바로 성장 일변도의 가시적 교회, 그 가운데서도 예배당(건물)의 확장에 있다는 점에서 칼빈의 개혁된 신앙과 전혀 다른 면에서의 독특성을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현대적인 교회들이 보여주는 신앙의 양상들은 어쩌면 가시적 신앙체계와 비가시적 신앙을 잘 조합하여 로마가톨릭을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약간의 변화를 꾀한 루터파적 입장이라 하겠다.

 

그러한 루터파와 달리, 근본적인 본 바탕을 지향하여 거슬러 오른 종교개혁의 바탕이 지금도 여전히 독특하게 체계를 이뤄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한 독특성 가운데 있는 개혁된(reformed) 가시적 교회는 전혀 건물과 회중의 규모와 같은 것에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신비주의처럼 막연하고도 개인적인 영()을 추구하는 것도 아닌, 성경에 근거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입각하여 더욱 분명하게(풍성하게) 드러나기도 하고 조금 빈약하게 드러나기도 하는 그런 독특한 교회를 추구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풍성함이 없이는 전혀 교회가 가시적으로 성립하거나 드러날 수조차 없는 것이, 칼빈을 통해 개혁된 교회들의 독특한 성격이다.

 

바로 그처럼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근거하는 개혁된 교회들의 예배당이 지니는 독특한 건축상의 자유로움과 형식상의 절제미가 사라진 분위기 가운데서 예배당(禮拜堂)’ 혹은 교회당(敎會堂)’이라는 말이 사라지고, 어느새 교회라는 말만 덩그러니 남아 건물과 회중을 넘어서지 못하는 교회론의 한계를 여실히 나타내 보이고 있다.



장대선목사

http://cafe.daum.net/largoviva/WoXQ/22


728x90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