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26주차. <사마리아여행> 참된 회개와 중생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9. 7. 5. 09:57

본문

26주차. <사마리아여행> 참된 회개와 중생



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같이 망하리라“(13:1~5)



1. 불행한 일의 원인



사람들은 불행한 일을 어떤 죄의 결과라고 쉽게 단정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욥기 같은 곳을 보면 이런 생각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하나같이 죄에 대해 이렇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1) 데만 사람 엘리바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4:7)

2) 수아 사람 빌닷의 말입니다.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시므로”(8:20)

3) 나아마 사람 소발의 말입니다.

지혜의 오묘함으로 네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의 지식이 광대하심이라 하나님께서 너로 하여금 너의 죄를 잊게 하여 주셨음을 알라”(11:6)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런 인식을 가졌습니다.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9:2)



이에 예수님은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9:3)고 대답하셨습니다.



2. 열심당원의 관심



여행 중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사람들 앞에서 일장 훈계를 하고 있습니다. 그때 두어 사람이 헐레벌떡 달려와서는 총독 빌라도가 행한 일을 예수님께 알리고 있습니다. 이 일이 정확이 어떤 사건이었는지는 기록이 없으므로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로마 치하에서 유대인들의 독립투쟁은 곳곳에서 일어났습니다. 특히 다른 지역 사람들보다 갈릴리 사람들의 독립운동은 매우 과격하고 열심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주전 63년부터 팔레스타인은 로마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율법에 충실하고 하나님께 열정적으로 헌신하던 셀롯인들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뭉치기 시작햇습니다. 이들이 만든 독립운동단체가 우리가 말하는 열심당혹은 셀롯당’, 다른 말로 제로테당이라 말합니다. 주후 6년에 갈릴리 사람 유다의 지도 하에 이방민족인 로마인들을 하나님의 거룩한 땅에서 몰아내기 위한 무장투쟁이 본격화되었습니다. 이들은 바리새파 내에서도 매우 극단적이고 호전적인 분파였습니다. 그들은 역사상 두 인물을 자신들의 멘토로 삼았습니다. 하나는 아론의 손자였던 비느하스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청년 하나가 미디안의 한 여인을 데리고 오자 손에 창을 들고 청년의 막사에 들어가 두 남녀를 찔러 죽였습니다. 이에 이스라엘에 돌던 염병이 그쳤다고 성경은 보도합니다.(25:6-8)(106:28-31). 다른 한 사람의 멘토는 만군의 여호와를 위해 열심히 특심이었던 엘리야 선지자였습니다. 특히 열심당원들은 엘리야 선지자자 바알의 선지자와의 대결을 승리한 역사적 사실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열심당원들의 열심은 여호와만 주권자로 삼는 신정정치가 이상향이었습니다. 이를 반대하는 모든 세력과는 교류하거나 타협하거나 거래하지 않았습니다. 필요하다면 폭력투쟁은 물론이고 살인과 방화, 자살 테러도 불사했습니다(오늘날 IS의 자살 테러의 기원이 어디인지 알 수 있느 대목입니다). 결국 이들은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이 완전히 함락되면서 마사다 요새로 집단 피신했고 745월에 최후 항전을 끝으로 역사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이러한 갈릴 사람들의 극단적인 행동에 대해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의 평판은 좋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나다나엘 같은 주의 제자도 갈릴리의 나사렛 같은 곳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반문할 정도였습니다(1:46). 그만큼 갈릴리와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우월의식과 편견은 깊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사건에 대해선 정확한 기록은 없습니다. 다만 시기적으로 주후 30년 전후엔 열심당원들의 독립운동이 정점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여러 요인이 있지만 열심당원들은 은근히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을 두고 로마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이룰 절호의 기회를 맞이했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시몬 같은 열심당원 한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로 편입된 것을 보아도 열심당원들이 예수를 앞세워 무엇을 쟁취하고자 한 것인지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 사람의 과격한 갈릴리인이 성전에서 예배 도중에 로마 병사들에게 살해를 당했고 이때 그의 피가 제물에 섞인 사건이 발생한 것으로 봅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께 알린 두어 사람도 열심당원인지 모릅니다. 그들의 관심은 이 흉악한 성전모독을 범한 빌라도 총독에 대해 예수님의 생각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예수가 군중들을 선동하여 빌라도 총독관저로 달려가지 않을까 기대했는지 모릅니다.



3. 하나님의 나라



그러나 예수님은 열심당원들의 기대와는 달리 이 사건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고 계십니다. 여기에 한 가지 사건을 추가하여 이 사건들이 가지는 의미를 종합하여 해석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예로 든 추가된 사건은 바로 실로암 연못에서 성전으로 끌어들이는 수로와 관련된 일입니다. 기혼 샘에서 흘러나온 물은 모두 실로암 연못으로 모여듭니다. 성전 제사를 드리려고 모인 사람들은 모두 이 연못 주변에 나아와 쉬거나 기도하고 대화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옆에 빌라도 총독은 망대를 지어 사람들을 감시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공사 중에 이 망대가 붕괴되었고 18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이 사건을 거론한 것입니다.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나 성경주석가인 핸드릭슨의 주석에도 이 사건이 언급됩니다. 특히 요세푸스는 망대 공사비는 빌라도가 성전금고에서 불법적으로 탈취한 자금이며 이 공사에 가담한 노동자들은 불의한 삯을 받은 죄 값으로 죽었다고 말합니다.



아무튼 갈릴리 사람들의 죽음과 실로암 망대의 사건으로 죽은 사람들에 대한 사람들의 기본적인 인식이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 자신의 죄값을 치룬 것이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제 사람들의 관심은 하루바삐 로마제국을 몰아내고 독립을 쟁취하는 일이 최우선적인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마 사람들은 이 말을 전해 들은 예수님이 비느하스나 엘리야처럼 분개하고 나를 따르라고 소리칠 것으로 기대했을지 모릅니다. 이때까지도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온 인류의 구원자가 아니라 유대를 독립시켜줄 민족의 영웅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들을 죄의 사슬에서 해방시키어 영생을 주고 천국 백성이 되게 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천국 구원의 복음을 전해주기 위해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의 자격으로 오신 것입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알리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지상의 나라가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이스라엘만이 하나님의 나라는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언약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건설되는 영원 천국입니다.



4. 회개하라



그런데 이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선결되어야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강조하시는 회개입니다. ‘회개는 히브리어로 나함이고 헬라어로는 메타노에오인데 둘 다 지나간 일을 돌이켜 보다’ ‘마음을 바꾸다’ ‘잘못을 빌다’ ‘하나님께로 향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회개는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태도가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데 있습니다. 그레서 예수님은 사람의 모든 삶이 변화되는 것으로 회개를 설명하였습니다. 그것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설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회개한 자들의 나라입니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은 한결같이 회개를 요청했습니다.

1)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이 얼마나 회개를 원하시는가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2) 심지어 요나 선지자는 이방족속인 니느웨 백성들에게 회개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사라진다고 알렸습니다.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3:8, 10)

3) 세례 요한도 예수님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하고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3:8-9)



기독교는 분명히 구원의 종교입니다. 만약 우리가 믿은 끝에 구원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입니다. 이 구원의 길을 만드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 구원을 받느냐 하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이 문제는 가장 첨예한 대립을 일으키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논쟁이 아니라 무엇이 성경적이냐를 따져야 합니다. 특별히 신학적인 논점에 있어서 유념해야 할 것은 무엇이든지 한 가지 관점에서 바라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입장과 인간의 입장을 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관점은 때로는 대립하고 부딪치고 모순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이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사람이 나기 이전부터 이미 누가 하나님의 자녀인지, 누가 구원받을 하나님의 택함받은 백성인지, 누가 버림받을 마귀의 자녀인지 모두 예정해 두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혹은 주권적 선택이라 부릅니다. 이 선택의 이면에는 반드시 버림받은 자가 생기므로 이것을 유기라고 하는데 칼빈은 이 선택과 유기를 이중예정이라 부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따로 있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자녀만이 구원을 받고 예수님은 이 자녀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대속사역을 행하셨으며 그 구속의 효력도 하나님의 자녀에게만 실효적으로 적용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동시에 인간적인 입장도 중요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물론 이 구원받는 믿음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입니다(2:8). 문제는 하나님이 주신 믿음으로 사람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자신이 죄인임을 인지하고 하나님에게 회개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사 지난날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회개한 자가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회개가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양방향에서의 구원의 일은 신기하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비한 연합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입장에선 구원은 값없이 주시는 은혜이지만 인간 입장에선 구원을 얻기 위해선 먼저 회개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의 일은 상호 반대되는 두 가지 일이 동시에 진행됩니다. 구원의 은혜는 그저 받는다고 하면서 한편으로 구원을 받기 위해 회개하라고 합니다. 겉으로 보면 이것은 모순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어느 한 쪽만 강조하다 보면 모순의 그물 안에 걸려 넘어지고 맙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영원전에 택하신 당신의 백성들을 때에 맞추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부르시고 믿음을 주시고 회개를 통해 거듭나게 하시고 의롭다 하시고 양자로 삼아 성화되어 영생으로 이끌어주십니다. 이 모든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과 예정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아무리 예정되고 택함을 입어 구원을 그저 받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녀는 자녀로서 해야 할 일을 게을리하거나 소홀히 하면 안 됩니다. 구원을 받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구원받은 백성답게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철저히 회개하고 세상이 추구하는 모든 세속적인 것들로부터 철저히 자신을 분리시키고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최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구원을 그저 받은 것에 대한 우리의 책무요 선택입니다.



4. 결어



그리스도인은 회개를 통해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회개하고 거듭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특히 회개를 했다는 것은 이전의 삶과 결별하고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첫째 가치관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가치관이 곧 세계관을 형성합니다. 이 세계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세계이며 하나님 나라의 것임을 확연하게 알고 믿고 깨닫게 된 것입니다.

둘째, 가치관이 달라지니 눈이 달라졌습니다. 그동안 보이지 않던 영적 세계에 눈이 뜨이자 십자가가 보이고 교회가 보이고 성도들이 보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갑자기 온 주위가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거듭난 상태입니다.

셋째, 눈이 달려졌으니 마음도 달라졌습니다. 슬프고 우울하고 암울한 마음의 구름이 사라지고 맑고 쾌청한 마음의 하늘이 나타났습니다. 생기가 돌고 기운이 나고 희망을 노래하게 된 것입니다. 무엇보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게 됩니다. 기도하게 됩니다. 찬송하게 됩니다.

넷째, 맑은 마음은 곧 밝고 환한 얼굴을 창조합니다. 어둡고 굳었던 얼굴이 해처럼 밝게 빛나게 됩니다. 저주받은 얼굴에서 은혜받은 얼굴로 변하게 됩니다. 주위 사람이 무슨 좋은 일이 있냐?’고 물을 정도가 됩니다.

다섯째, 얼굴이 밝으니 말이 달라집니다. 미소 짓는 얼굴에서 욕설이 나올 수 없듯이 맑은 마음과 밝은 미소로 고운 말씨를 씁니다. 겸손한 언어가 나타납니다. 입에서 감사라는 말이 늘 함께 묻어 나옵니다. 그리스도인은 말이 다른 사람입니다. 말이 차갑고 냉랭하고 사무적이고 무 자르듯이 단정적이고 지시와 명령으로 일관하고 지적질하고 비난하고 뒷담화하고 위치와 형편에 따라 말을 바꾸고 약속을 어기는 일을 밥 먹듯이 한다면 그는 아직 거듭난 사람이 아닙니다.

여섯째, 말이 달라지니 행동도 달라집니다. 말에 따라 행동이 결정됩니다. 말한대로 몸이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조폭은 조폭이 쓰는 언어가 따로 있습니다. 욕설을 하면 욕설에 어울리는 행동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감사를 잊어버리면 불평의 말과 행동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말과 행동을 하나도 잊지 아니하시고 반드시 보응하십니다. 말 한 마디 조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일곱째, 이제 지난 모든 것들이 달라졌으니 내일의 꿈이 달라집니다. 꿈이 달라진다는 것은 삶의 목표와 방식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 거듭난 삶을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일을 보고 저주하고 탓하고 책임을 전가하는 일은 능숙하게 하면서 정작 그 일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오늘 주님이 가르친 대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고 자연스럽게 죄 값을 치루었다고 쉽게 단정하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이 바로 거듭나지 못한 생각들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거듭나지 못했다는 것은 진실한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세원 놓으신 자연 질서는 세상 사람이든 그리스도인이든 동일하게 작용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불행한 일을 당해 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이 그런 불행을 당할 때 우리가 취해야 할 올바른 태도는 무엇입니까? 이것이 오늘 말씀이 주는 세 가지 교훈입니다.



첫째,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3:10-12)



둘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형제를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의 모습을 통하여 도리어 자신의 죄를 깨달으며 그 죄를 회개하는 겸손한 자세입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7:1-3)



셋째,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서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사랑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랑이 아닌 마음과 행동과 동거와 협력과 교제는 모두 위선이며 죄악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서 사랑하는 척 하는 것은 하나님을 조롱하고 모욕하는 일입니다. 진실한 사랑의 마음을 다라고 기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루보터 아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7-8)



주님의 은혜가 여러분 생애에 넘쳐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728x90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