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주차. <사마리아여행> 열매 없는 삶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포도원 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눅13:6-9)
비유의 신학
‘비유’(Parable)를 뜻하는 헬라어 ‘파라볼레’는 원래 ‘대조한다’는 뜻입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 무엇이 진자이고 가짜인가를 대비하기 위해 사용하는 문학적 수사법을 말합니다. 이 비유의 수사학을 가장 잘 사용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특히 주님의 비유는 가공적이거나 추상적인 대상을 가지고 사용하지 않고 항상 평범한 사람들이나 물건들, 또는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친숙한 사건들을 직유나 은유적 기법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대한 학문적 연구의 역사는 그리 오래지 않습니다. 비유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1899년 윌리허라는 사람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윌리허의 연구가 있기 전에는 비유를 제각각 해석했는데 주로 풍유적 해석(알레고리)에 치중했습니다. 그러나 윌리허는 예수님의 비유를 연구한 끝에 ‘하나의 비유에서 하나의 교훈을 유출해야 한다’는 원리를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나치게 모든 비유를 도덕적인 교훈으로만 해석하는 한계를 지녔습니다.
비유를 해석함에 있어서 가장 큰 관건은 비유 해석의 원리나 규칙을 어떻게 설정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버나드 램은 비유는 조망적(perspective), 문화적, 주석적, 교리적인 원리 안에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조망적이라 함은 기독론과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해석되어져야 한다는 것이고, 문화적이라 함은 당시 배경을 간파해야 한다는 것이고, 주석적이라 함은 가르치고자 하신 중심 진리 한 가지를 결정하고 예수님이 직접 해석해 주신 해석을 기준으로 문맥 속에서 비유의 의미를 확립하는 것이며, 교리적이라 함은 어떤 교리를 말씀하시는 가를 비교연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에 비해 A.B 브루스라는 학자는 사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비유를 크게 세 분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하나는 교훈적인 것이고 다음은 복음적인 것이고 마지막 세 번째로는 예언과 심판에 관한 것입니다. 교훈적인 비유는 다시 하나님 나라의 교훈 8개, 헌신과 상급이 비유 4개, 기도 2개, 이웃사랑(선한 사마리아인) 1개, 겸손 2개, 세상적인 부에 대한 비유 3개 등 20개로 세분하고, 복음적인 비유는 잃어버린 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비유 3개와 구원받은 자의 감사를 가르치는 비유 1개가 있고, 예언과 심판의 경우에는 열 처녀 비유와 무자비한 종으로 유명한 8개의 비유 하여 도합 32개의 비유가 망라되었습니다.
(참고적으로 비유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들은 조지 레드의 <신약신학>(1978)과 C.H 도드의 <왕국비유, The parable of kingdom)(1936), 헌터의 <비유해석, Intertreting the parable>(1960) 등을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2. 무화과나무 비유
오늘은 무화과나무 비유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예수님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저주하시자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린 사건(마21:19-20, 막11:12-14, 20-21)을 연상시킵니다. 이렇게 비유에 무화과나무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그만큼 이스라엘 지역에 무화과나무가 많이 심겨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과 무화과나무는 참 친숙한 그림입니다. 대체 무화과나무가 어떤 나무이길래 유대인들이 그토록 사랑하고 아꼈을까요?
무화과나무는 이름대로 꽃이 피지 않는 나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원래는 Fig Tree라 해서 뽕나무과에 속한 낙엽 식물로 사과나 복숭아처럼 사람들이 재배하는 과일나무입니다. 산지는 근동의 전 지역과 지중해 지역이고 그중에서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의 언덕과 골짜기, 특히 갈릴리 연안의 디베랴 골짜기가 주산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인들에게 무화과나무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감나무처럼 집집마다 심어 과실을 얻을 수 있는 가장 흔하고 친근한 과일입니다. 무엇보다 무화과나무는 과실도 중요하지만 넓은 잎사귀로 인해 만들어지는 그늘 때문에 사랑을 받습니다. 새 가지는 3, 4월에 나오는데 여름 내내 곳곳에서 쉼터를 만들어 주는 고마운 나무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 감람나무와 포도나무, 그리고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세 가지 과실나무입니다. 모세는 풍요로운 이스라엘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의 소산지라”(신8:7-8)
(사실, 이런 점에서 삼천리 금수강산 한반도와 비교하면 비교가 안 될 만큼 우리 땅은 축복받은 땅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보다 좋은 기후와 지질과 물과 자연산물이 풍성한 곳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 땅에서 나는 과일보다 더 맛있는 과일은 맛보지 못했습니다)
한 마디로 포도와 무화과나무 아래 산다는 것은 이상적인 환경을 누린다는 것을 뜻합니다. 열왕기 기자는 이것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솔로몬이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더라”(왕상4:25)
반면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화과나무가 잎이 마르고 열매가 맺지 아니하면 이것이 곧 나라의 재앙을 의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무화과 광주리에 관한 예레미야 선지자의 환상 이야기, 즉 포로로 붙잡혀간 이스라엘을 좋은 무화과나무로 비유하고 팔레스타인 땅에 남거나 애굽으로 도망친 사람들을 나쁜 무화과나무로 비유한 것(렘24:1-10)은 큰 재난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이외 많은 선지자들이 국가의 재앙과 무화과나무의 저주를 연결시켰습니다.
“그가 전에 이르기를 이것은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내게 준 값이라 하던 그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거칠게 하여 수출이 되게 하며 들짐승에게 먹게 하리라”(호2:12)
“그들이 네 포도나무를 멸하며 내 무화과나무를 긁어 말갛게 벗겨서 버리니 그 모든 가지가 하얗게 되었도다”(욜1:7)
“내가 곡식을 마르게 하는 재앙과 깜부기 재앙으로 너희를 쳤으며 팥종이로 너희의 많은 동산과 포도원과 무화과나무와 감람나무를 다 먹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암4:9)
이런 것을 배경으로 예수님도 무화과나무를 두고 심판을 상징하는 하나의 비유적 이야기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 비유에서 예수님은 비록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이지만 끝까지 인내하며 기다리는 포도원지기를 통해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의 죄악을 참고 인내하시며 우리의 참된 회개를 기다리고 계신가를 말씀하십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등장하는 비유들이 가리키는 바가 무엇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바로 무화과나무는 유대인을, 열매는 참된 회개를, 주인은 하나님을, 포도원지기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본문 이야기를 정리해 봅니다.
1) 먼저 포도원의 주인이 무화과나무를 심었습니다.
~ 이것은 하나님이 유대인을 자신의 백성으로 택하셨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2) 드디어 열매를 수확할 때가 되었지만 열매가 맺어지지 않았습니다.
~ 대개 무화과나무는 일년 가운데 거의 열달 동안 열매를 맺는다 합니다. 보통 3,4 월에 새 잎이 나오는데 이즈음에 지난 해 가지에서 자란 대부분의 푸른 무화과나무는 5cm가 못 되어 떨어지고 새 가지에서 맺어진 것들이 6월쯤에 익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8월 경에 새 가지에 열린 두 번째 열매가 가장 즙이 풍부하고 달콤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난해의 가지가 떨어지지 않으면 새 가지가 열리지 않아 열매수확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 이것은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야 함에도 과거의 죄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질병에 감염되었거나 영혼이 죽은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아 아직 거듭나지 못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3) 그러자 주인이 포도원지기에게 “실과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찍어버리라”고 명령합니다.
~ 이것은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심판의 때에 천국 백성에서 제외시키겠다는 것을 말합니다.
4) 이에 포도원지기는 주인에게 한 해만 더 기회를 달라고 요청합니다.
~ 여기서 포도원지기는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당장이라도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불을 내리어 심판하고자 하십니다. 그만큼 사람들의 죄악이 하나님을 진노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그러나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십니다. 하나님에게 조금 만 더 인내할 것을 간구하십니다. 충분한 영양분을 공급하기 위해 뿌리 곁의 땅을 더 깊이 파고 영양좋은 거름을 주어 다시 나무를 키워 볼 것이라 요청하십니다.
~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 멸망에 처해도 변명할 여지가 없는 죄인의 죄 용서와 사함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열심히, 간절히 중보의 사역을 감당하고 계시는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죄 없는 인간은 이 땅에서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지은 죄는 도무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을 수 없고 감히 용서해 달라고 요청할 수 없으리만치 깊고도 깊은 흉악한 죄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하나같이 지옥에 가야 합니다. 그만큼 인간의 사악함이 크고 놀랍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당장진노의 불을 내리시지 않으시는가요? 그것은 단 하나의 이유 때문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노의 오른팔을 붙잡아 우리의 회개를 기다리며 간절히 아버지께 용서를 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5) 이에 주인은 포도원지기의 간청을 수용하고 한 해 더 기회를 주십니다.
~ 이것은 성부 하나님의 무한하고 크신 자비의 은혜를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의 사역을 인정하시고 주님의 요청대로 심판의 때를 미루고 계십니다. 주님은 한 사람도 하나님이 창세 전에 택하신 당신의 백성들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끝까지 죄인의 회개를 기다리며 인내하시고 계십니다.
~ 그러나 기회를 주었음에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때의 심판은 매우 가혹한 것이 될 것입니다. 이 상황을 오늘 본문에서는 “찍어 버린다”로 표현합니다. 헬라어로 ‘엑코페이스’인데 영어로는 cut down입니다. 이것은 첫째 하나님의 나라에서 제외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회개한 사람만이 들어가 영생을 누리는 곳입니다. 둘째, 특별히 down이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지옥은 아래에 있습니다. 지옥은 하나님 발아래에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자는 잘라서 아래로 던집니다. 아래로 던져진 자들은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입니다.
3. 결어
무화과나무는 무성한 잎과 함께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러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언가 나무에 이상 현상이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나무도 질병에 걸리면 시름시름 앓다가 말라 죽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비록 몸은 살았으나 마음이 병들고 영혼이 죽어 있음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화과나무에 다시 열매가 맺어지기 위해선 뿌리부터 스며든 질병을 없애야 하듯이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모든 복과 권리를 누리려면 뿌리부터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참된 회개’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죄인들의 회개를 기다리십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진노의 손이 내려치기 전까지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의 진노를 막고 계십니다. 그러나 시간이 많은 것 같지만 그리 많은 시간이 남은 것이 아닙니다. 십판의 때는 정확히 다가오고 있습니다. 믿는 자로서 우리는 이 세상 끝날에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심판의 때에는 반드시 양과 염소로 대변되는 회개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엄격히 구분되어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같이, 양은 그 오른 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해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25:31-33, 41, 46)
그럼에도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회개하여 주님을 믿고 그 같은 형벌을 면제 받기를 원하십니다. 물론 여기서 모든 사람이란,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 모두를 가리킵니다. 즉 구원은 하나님이 영원 전에 택하신 당신의 자녀들에게만 적용되고 완성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녀들이 구원을 잃어버리는 일은 없지만 혹시 잃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부모로서의 긍휼하심과 간절한 바램의 마음 즉, 애타하시는 노심초사의 심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요청에 우리는 즉각적인 순종이라는 응답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요청에 하나님이 즉각 응답해 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하며 기도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하나님의 간절한 요청에는 그리도 무시하게 뿌리치고 하나님의 소원을 팽개치는 것입니까?
마지막으로 오늘 우리는 다시 한번 지옥(스올, 게엔나, hell)의 실체에 대해 배우고 그 무서운 심판의 장면을 기억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지옥은 악한 자를 위한 특별한 징벌의 장소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존재하는 곳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의 영원한 무덤이자 음부의 거처입니다. 이곳은 꺼지지 않는 불이 있는 곳입니다.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마18:9)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약3:6)
그럼에도 지옥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모르고 지옥에 가겠다고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지옥의 실체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된다면 그런 소리를 함부로 떠들 수 있겠습니까?
ㅅ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옥불의 심판을 당하지 않을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택자라 해서 반드시 예수님을 믿고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의 자녀이면서 여전히 어리석은 생각과 판단에 따라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기를 거부하고 저항하며 살아가는 많은 어릭석은 주의 자녀들이 살고 있습니다. 참으로 그들의 귀는 굳게 닫혀 있습니다 마음은 완고한 고집에 붙잡혀 제 마음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끝까지 인내하시면서 기다려 주셨듯이 끝까지 인내하며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복음으로 그들을 거듭 태어나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사람을 누리는 사람임을 굳게 믿으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도록 합시다. 아멘.
[출처] 27주차. <사마리아여행> 열매 없는 삶 (바로선개혁교회) |작성자 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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