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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가지고 싸울 것인가!

장대선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9. 7. 11.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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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가지고 싸울 것인가!

 

 

옛 찬송가들을 보면 행진곡이나 군가 풍의 일사분란 한 박자와 가사로 된 곡들을 볼 수 있습니다.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아’, ‘십자가 군병들아’, ‘마귀들과 싸울지라’ 등의 찬송가들은, 얼핏 북한 공산정권의 진군가를 듣는 느낌까지 들어서 신앙이 없는 자들에게는 좀 섬뜩한 감까지 들게 하는 강렬한 곡들입니다. 아울러 그러한 곡들 가운데는 상당수가 19세기의 마지막 부흥운동 무렵 지어진 것들입니다. 즉, 강렬한 부흥의 열망과 열정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반영하는 노래들인 것이지요. 그리고 그러한 곡들이 주는 강렬한 인상은 신앙인들을 호전적으로 만드는데 일조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그러한 호전적인 모습들이야말로 불신자들에게 가장 불쾌감을 주며 선입관을 갖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에 있어서의 싸움의 필요성을 결코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의‘싸움’의 역사:

 

대부분의 종교들은 비폭력 혹은 평화주의의 양상을 지닙니다. 그리고 그러한 분위기 가운데서 대부분의 종교들이 종교 간의 상대성을 인정하며 적절한 공존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 종교들 가운데 ‘유일신(唯一神)’의 사상을 가진 이슬람과 기독교의 경우에는 원리적으로 종교 간의 상대성이나 공존의 모색이 사실상 어렵습니다. 오직 유일하신 ‘알라’ 혹은 ‘하나님’만이 있을 뿐인 유일신의 신관을 포기하지 않는 한 현실적으로는 몰라도 원리적으로는 결코 복수(複數)의 신이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신(神)을 인정하는데 있어서 복수(複數)의 신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은 상식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가지는 여러 속성 중 ‘절대성(絶對性)’ 혹은 ‘전능성(全能性)’만 보더라도 유일신의 존재 말고는 성립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가’라는 신이 있고 ‘나’라는 신이 있다고 한다면 ‘가’라는 신은 결코 절대적일 수도 전능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되면 ‘가’라는 신의 절대성은 최소한 ‘나’라는 신의 절대성을 포함할 수 없으므로 ‘가’라는 신의 절대성은 논리적으로 이미 성립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전능성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겠지요. 그러니 신은 항상 유일하신 분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슬람의 선교정책은 항상 “칼과 꾸란”입니다. 신의 백성들인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에 따라서 이교도들을 대하는 기본적인 정책은 항상 꾸란을 받아들이게 하거나 아니면 죽이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이슬람보다 훨씬 앞서서 유일신관을 가지고 있었던 기독교, 특별히 중세 가톨릭의 경우에도 이슬람의 경우와 비슷한 선교정책을 펼쳤으니 그것이 바로 십자군 원정이었습니다. 원리적으로 그들(이슬람과 가톨릭)의 신앙관은 결코 서로 양립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비록 200년에 걸친 십자군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고 전쟁으로 인해 유럽이 피폐하게 되어 버렸을 때, 이슬람과 가톨릭 모두가 더 이상 그처럼 전쟁을 수반하는 가시적인 선교정책을 유지할 수 없게 되기는 하였지만, 가톨릭과 이슬람의 선교정책은 항상 그와 같이 가시적인 방법(이제는 고전이 된 영화 ‘미션’이 잘 묘사하고 있는 바와 같이)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의 분위기 가운데서 시작된 프로테스탄트 개신교의 경우에도 싸움을 벌여야만 했던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즉, 중세 가톨릭교도들이 이슬람과 전쟁을 벌인 것과 마찬가지로, 중세가톨릭 신앙의 탈선을 용납할 수 없었던 종교개혁자들 또한 가톨릭과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개신교의 싸움은 가톨릭과 이슬람의 싸움과는 구별되는 내용이 많았는데, 무엇보다도 중세 가톨릭과 이슬람의 전쟁이 영토 및 문명 간의 전쟁이었던 것에 반해 프로테스탄트 개신교의 싸움은 전쟁이라기보다는 성경에서 이탈한 가톨릭신앙을 거부하고 성경에 근거한 성경적 신앙을 추구하려는 개신교인들에 대한 가톨릭권세의 탄압과 그에 맞서서 저항하는 성격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만큼 저항 즉, 싸움의 방식은 기본적으로 가톨릭 혹은 이슬람과는 다른 양상(물론 울리히 쯔빙글리처럼 직접 가톨릭세력과의 물리적 전쟁에 나서는 개혁자들도 있었고, 토마스 뮌쩌, 맨노 시몬스 등을 비롯한 재세례파-Anabaptist-처럼 극단적인 저항운동을 일으킨 일파들도 있었지만)이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의 싸움의 양상:

 

프로테스탄트 개신교는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어떤 분은 신앙과 신학을 다르게 이해하시기도 합니다만 신앙과 신학은 결코 다를 수 없습니다.)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비록 종교개혁자들이라는 정의가 워낙 광범위한 대상들을 포괄하고 있는 것(가톨릭 내부의 종교개혁자들, 재세례파들까지도 넓은 의미의 종교개혁자들로 분류되므로)이어서 단편적으로 정의내리기가 쉽지 않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의미의 종교개혁자들(독일 및 화란을 대표하는 개혁신학자들)의 신학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개신교 신앙의 대표적인 싸움의 원리 혹은 저항의 개념이 바로 “오직 성경(sola scriptura)”입니다. 즉, 성인들의 유물들을 보여주는 날(성인축제기간)의 전날 밤에 비텐베르그 성당의 문에 95개조의 가톨릭에 대한 반박문을 붙인 일로 일약 종교개혁의 심벌이 된 루터의 테제들에 담긴 종교개혁적 저항의 원리들이 1529년 4월 19일에 제후들과 여러 도시들 및 국가들에 의해 지지를 받으면서 성립하게 되고 이후로도 지지되었던 오직 성경으로서의 저항의 원리야말로 개신교의 싸움의 양상을 단적으로 포괄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당시 선언된 선언서 안에 담긴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저항개념의 내용은 크게 “오직 성경의 내용만으로 설교하는 순수하고 배제적인(처세술, 경제학, 심리학, 유머 따위의 인간적인 재미와 정보들을 배제하고 오직 말씀으로) 설교”, “모든 삶과 교리의 유일하고 확실한 규범으로서의 성경(삶 가운데 성경을 끌어오는 것이 아니라 성경 가운데로 삶을 끌어가는)의 강조”, “성경의 무오성(상대성이 아닌!)”, “성경의 해석은 성경본문 안에서 자체적으로 해석한다(고고학, 사회학, 현대문법에 기반을 두는 비평적 적용이 아니라)는 원리”등 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개신교에서 다루어지는 ‘싸움’의 양상은 기본적으로 영적인 것으로서, 십자군 원정이나 농민전쟁과 같은 실천적인 양상과는 분명하게 구별되는 진리 자체에 대한 보수(목숨을 빼앗아 갈 수 있는 권력자들이 결코 빼앗을 수 없는)와 저항이었습니다.

 

 

저항개념으로서의 영적싸움에 대하여:

 

영적전쟁에 지침을 주는 가장 대표적인 본문이 바로 에베소서 6장 10~20절 말씀일 것입니다. 즉 영적인 전쟁에 필요한 ‘전신갑주(full armor)’를 입으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에베소서 6장 11절의 본문에서 언급하는 전쟁의 양상을 보면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that you may be able to stand firm against the schemes of the devil)” 하나님의 전신갑주(full armor of God)를 입으라고 하여서, 책동을 모의하는 마귀의 공격에 대해 굳게 서서 대항하는 모습(to stand firm against)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영적싸움의 양상은 우는 사자와 같이 항상 우리들을 노리고 있는 사단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방어의 성격(13절과 14절에서도 마찬가지로 “to stand firm…”이라고 하였습니다)이라는 것이지요. 또한 에베소서 6장에서 언급하는 무기들을 보면 ‘전신갑주’와 ‘허리띠’, ‘흉배’, ‘신발’, ‘방패’, ‘투구’ 등으로서, 모두가 다 공격보다는 방어에 적합한 것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유일하게 공격과 방어 모두에 쓰이는 무기로 소개된 것이 바로 ‘성령의 검’인데, 이는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영적전쟁의 공격자는 신자들이 아니라 사단이며, 그러한 사단의 공격과 책동에 대하여 ‘진리(truth)’, ‘의(righteousness)’, ‘평안의 복음’, ‘믿음’, ‘구원의 투구’ 등으로 대적(방어)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찌르도록 하라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18절~20절은 무시로(all times) 기도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영적전쟁은 기본적으로 방어전입니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사단은 우는 사자와 같이 언제든지 우리를 수시로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항상 공격에 대비하고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마치 느헤미야서에서 대적들의 방해 가운데서 성벽을 쌓을 때의 모습(방해꾼들의 공격에 대비하여 한 손에 무기를 들고서 성벽을 쌓는 모습)과도 같이 말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가지고 싸울 것인가:

 

영적전쟁에서 유일하게 적을 물리칠 무기로 소개된 “성령의 검”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단이 지금도 우리들에게서 빼앗으려는 것은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뱀이 아담과 하와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는)을 거짓말로 빼앗아버린 것과 같이, 지금도 사단이 쏘고 있는 화전(불화살)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오용(誤用)하고 벗어나게 하는 온갖 것들입니다. 이에 대하여 싸울 수 있는 무기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예수님께서 사십 일간 금식하신 후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 대적하신 무기 또한 성경의 말씀들입니다)인 것이지요.

 

종교개혁자들은 그러므로 성경이 전혀 인정되지 않는 유전(遺傳)들을 만들어 낸 가톨릭에 대하여 오직 성경으로 대적하였고, ‘오직 성경’의 교리로서 교황이 아닌 성경의 무오성(無誤性)을 확립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개신교 안에는 수많은 말씀(성경)의 오용이 널리 퍼져있습니다. 종교개혁의 시대에 피를 흘려 확립했던 것들은 거의 다 훼손되었고, 그 자리에는 오히려 가톨릭에 가까운 온갖 것들이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굼벵이 잡으려고 초가삼간 태우는 격으로 도덕적인 문제의식으로 올바른 교리들과 신학마저 배척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교리는 우리를 나누어 놓지만, 봉사와 실천은 우리를 하나 되게 한다!’는 말까지 서슴없이 유행하고 있습니다만, 그러한 말들은 ‘교리’란 것이 잘못된 가르침(사단의 화전)들에 대하여 오직 성경으로 대적하여 쌓아올린 성벽이라는 것을 모르고서 하는 말들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진리의 말씀에 선 기독교)가 아닌 모든 종교들을 믿거나 가르치는 자들은 ‘친구’일 수는 있어도 ‘형제’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아니면 다 같은 죄인일 뿐이라는 점에서 그들과 우리들은 다르지 않은 친구이지만,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머리를 둔, 혹은 전혀 머리를 두지 않는 자들은 우리의 형제, 우리의 지체일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그들을 정죄할 수 없는 것이지 그들과 타협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굳게 서서(to stand) 가만히 있어도 우릴 공격하는 사단의 책동에 대적하는(to stand firm against)우리의 손에 과연 무엇이 들려야 합니까? 그것은 멀리까지 날아가는 화살이나 도망치는 적의 등에 던질 손도끼(tomahawk)가 아니라 이미 주신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sword of the Spirit)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오해하며 오용하는 모든 공격의 칼날에 대해 진리로서의 성경을 굳게 세우는 그것이야말로 영적전쟁의 최대의 방어수단임을 결코 간과하지 말아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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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선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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