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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여자는 어떻게 평등할까?

장대선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9. 8. 11.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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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여자는 어떻게 평등할까?

 

 

  중세유럽을 무겁게 짓누르던 중세교회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16세기에는 바야흐로 종교개혁의 시대라 할 만큼 여러 변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16세기의 교회 밖에서는 인문주의와 같은 세속적인 변화를 수반하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즉, 유럽의 교회 안에서 16세기는 종교개혁의 시대였지만, 교회 밖에서는 르네상스의 시대였던 것이지요. 그리고 17세기 유럽에서는 두 사조(종교개혁과 르네상스)가 일반적으로 호의적인 발전(기독교-프로테스탄트-가 인문학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다가 18세기부터 두 사조는 각각 갈라서기 시작하여 산업혁명의 시기를 거친 뒤에는 바야흐로 각각의 길을 걷게 되며,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면서 유럽의 세속을 대표하는 과학적 사고는 오히려 기독교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시대적인 변화 가운데서 기독교 신학은 그 전까지와는 다르면서도 아주 급진적인 변화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소위 자유주의신학의 팽창입니다.

 

중세유럽의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은 그 합당성에도 불구하고 이를 자신들의 교권과 안위를 위해 악용하였던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되었고, 종교개혁과는 별도로 뛰쳐나온 인간이성은 급기야 하나님을 중심에 두는 것을 거부하고 인간을 중심에 두는 르네상스운동으로 달려가더니 오래지않아 다시 돌아와서는 자유주의신학이라는 아이템으로 기독교에 보복을 가하였습니다.

 

오늘날에는 자유주의 혹은 인본주의가 사회의 보편타당성이 되어버려서 이를 거스른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현실입니다. 인간의 절대적인 자유와 인권에 대하여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은 실로 버거운 일이며, 심지어 신학 안에도 자유주의의 사고는 지배적인 것이 되어서(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바탕을 두는 신학에서 인간론과 거기에서 파생되는 인간중심의 신학) 어디에서부터 손을 써야할지 모를 지경인데, 목회자들이건 직분자들이나 교인들이건 간에 겉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말하면서도 실천적으로는 자신의 영달을 꾀하는 모든 ‘실천적무신론자(이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만, 삶에서는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사는 자들입니다)’들의 의식 속에는 바로 자기 자신을 모든 가치의 중심에 둔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적인 의식이 도사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자유주의란 넓게 보면 성경(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에서 벗어나는 모든 양상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각자의 종교적 경험을 강조하는 신비주의적인 것이든지, 보편타당하다고 생각되는 이성만을 유일한 기준으로 삼는 이성주의든지 간에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근거로서의 성경을 부인하는 모든 신앙의 형태들이 다 자유주의 문맥에 속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특별히 제3세계 국가들에 널리 퍼져있는 ‘해방신학’이나 이것을 토착화시킨 ‘민중신학’의 경우, ‘인권사상’에 대한 편중(偏重)가운데서 모든 성경 본문을 해석하고 적용하는데, 그것은 우리의 삶을 성경에 부합시키기보다는 우리의 삶에 성경을 부합시키는 풍토라 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보편화된 자유주의 양상 가운데에는 ‘인권’에 대한 의식과 함께 등장하는 소위 ‘페미니즘’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페미니즘’은 기독교 안에서도 ‘페미니즘 신학’이라는 것을 형성하여서, 점차로 보편화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페미니즘 신학에서 ‘페미니즘 해석학’이라는 것이 공론화되어 성경에서 남성 중심적인 것들을 구분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그처럼 남성 중심적인 본문들을 전부 색출하고 그리스도로 인하여서 남자와 여자가 궁극적인 평등을 이루게 되는 것으로 수정하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조 가운데서 대두된 것이 바로 여성의 목사안수의 문제입니다.

 

물론 교파에 따라서는 여성의 목사안수가 전혀 거리낌이 되지 않을 수 있을 것(현실적으로)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공론화되고 보편화되기에 이르게 되면서 그렇게 할 수 없는 교파나 교단에서조차 이러한 흐름에 편승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가고 있는 점입니다.

 

근래의 성경해석에서는 흔히 디모데전서 2:12절의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는 본문을 그 당시의 사회적 특수성으로 설명함으로써 그러한 본문이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여 여성도 장로직분과 목사안수에서 예외일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디모데전서 2:13~14절은 그처럼 여자에게 가르치는 것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근거를 창조질서와 타락과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어서 여자의 가르치는 것(단순히 가르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 직분으로서의 목사를 표현한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이 또한 단순히 남자를 주장하는 일을 말함이 아니라 다스리는 직분으로서의 장로를 표현한 것이다)이 당시 사회의 특수성이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에 대한 이해 가운데서 부인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특별히 창조질서와 관련하여서는 하나님께서 왜 남자와 여자를 각각 지으셨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만일 남자와 여자가 모든 면에서 똑같이 취급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굳이 남자와 여자를 각각 시간을 두고 창조하실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생물학적으로도 자웅동체의 생물, 예컨대 지렁이와 같은 경우가 실제로 있으니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자웅동체로 만드셨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지으시되, 여자를 나중(열등(劣等)하다는 의미의 나중이 아니라 차서(次序)로서의 나중)에 지으셨고, 여자를 남자를 돕는 배필로 지으셨으며, 타락 후에도 남자는 일생 땀을 흘려 수고하도록 하셨지만, 여자는 출산의 고통을 겪으며 남자에게 연연하도록 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남자와 여자는 창조시에나 타락 후에나 항상 구별(區別)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남자와 여자의 평등은 동일화가 아니라 그 독특성의 완성을 통하여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남자는 여자와는 다른 남자의 독특성을 완성하는 것으로, 여자는 남자와 다른 여자만의 독특성을 완성하는 것으로, 그리고 그러한 독특성의 완성 가운데서 서로를 인정하는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평등(그리스도의 지체로서의 평등)인 것이지 남자와 여자가 모든 면에서 같아지는 것이 평등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디모데전서 2:8~9절 본문이 각각 남자와 여자를 가리켜 말하고 있는 것도 이처럼 남자와 여자의 독특성을 반영하는 문맥인 것이지요.

 

사실 일반적으로 우리들은 리더는 주목하여도, 리더를 보이지 않게 돕는 숨은 조력자들은 주목하지 않습니다. 즉, 리더와 조력자에 대한 암묵적인 차별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어떤 면에서는 뛰어난 리더보다 뛰어난 조력자가 되기가 더 어렵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리더라도 조력자가 없이는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때문에 진정한 리더라면 자신의 그늘 아래에서 주목을 받지 못하는 조력자들을 항상 주목하며 독려하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면서도 결코 차별하거나 구분하지 않으며, 여자의 머리로서 남자가 있지만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않고, 남자 없이 여자만 있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이런 바탕에서 에베소서 5:32절은 남자와 여자를 말할 때에 그리스도의 지체로서의 교회를 말하는 것이라고(“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하였지요. 그러니 그리스도의 지체로서의 교회에는 모두가 다 발이나 손이 될 수는 없고, 오히려 손은 손대로 발은 발대로 다 골고루 한 지체로서 필요한 것입니다. 만일 발이 온 몸을 떠받들지 않는다면 어떻게 손이 머리의 지시를 따라서 선한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분명히 디모데전서 2:8~15절은 남자와 여자를 명백히 구별하고 있습니다. 즉, 여자에게 교회의 가르치는 직분과 주관하는 직분을 부여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별(區別)’이지 결코 ‘구분(區分)’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15절에서는 “여자들의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며 그 해산함(자연적인 출산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로서의 완성을 말하는 것)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여 남자와는 구별되는 여자의 독특성의 완성에 대하여서 존귀하게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 본문에 의하면 여자는 분명 교회 안에서 남자와 같이 가르치는 직분이나 다스리는 직분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남자분이 함부로 말한 것처럼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하기 때문이 아니라, 여자의 독특성은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 있는 회중 안에서의 질서이고, 이러한 질서 가운데서 남자의 권위나 여자의 권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지체로서의 교회에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자들의 독특성을 낮게 여기거나 함부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디모데전서 2:8~15절에서 말하고 있는 진정한 남녀 간의 평등이며, 이를 기록토록 하신 하나님의 뜻 안에서의 진정한 평등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평등 가운데서 교회 안의 남자 혹은 여자만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와 교회의 유익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남자든지 여자든지 자신의 유익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와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서 각자에게 주어진 독특성을 구별되면서도 차별되지 않도록 완성하는데 전념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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