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30주차 <사마리아여행시리즈> 하나님 나라의 비밀 2019. 7.28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9. 7. 31. 09:12

본문

30주차 <사마리아여행시리즈> 하나님 나라의 비밀 2019. 7.28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또 이르시되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교할까,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13:18-21)



누가와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



누가복음을 통해 나타나는 특별한 사상 중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사상입니다. 누가는 누구보다 예수님의 사역을 하나님의 나라라는 명제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했습니다. 물론 누가복음에는 이 외에도 여러 가지 관심 분야가 등장합니다. 먼저 누가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부각시켰습니다. 여기엔 특별히 여자와 이방인과 아이들과 병든 자, 귀신 들린 자 등이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고침을 받고 구원의 은혜를 받는 사건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사회적 약자들에게 주님이 제시하는 하나의 목표지점은 바로 헤롯이 지배하는 유대왕국이나 로마제국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이 누가가 처음으로 시작하고 누가만 사색하고 제시한 주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개념은 매우 복잡하고 오랜 역사 가운데 체험되어지고 발전되어 온 개념입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한 천국이자 영생의 처소로서 이 나라가 있기에 현세에서의 모든 고통과 고난들을 참고 견딜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개념은 신약시대에 접어들어서야 나타나기 시작하여 주로 세 가지 개념으로 발전했습니다.



1) 정치적인 개념으로서, 실제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통치되는 이스라엘

2) 영적인 개념으로서, 하나님의 다스림에 대한 신앙적 복종과 헌신

3) 교회적 개념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한 백성들의 나라, 즉 주님이 피 값을 지불하시고 세우신 교회를 말합니다.



이 나라에 대한 복음서 기자들의 관점도 약간씩 달랐습니다. 마태는 하나님의 나라는 단 4회만 사용한 대신에 주로 하늘 나라‘(천국)라는 용어를 선호했습니다. 사용 빈도수를 보아도 마가는 14, 요한은 2, 바울은 8회만 사용한 것에 비해 누가는 부가복음에서 22, 사도행전에서 6회를 사용하면서 그 누구보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자신의 가치관을 드러내어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신약성경 기자들이 증거한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입니까? 그것을 네 가지 측면에서 논하겠습니다.



첫째, 대체 성경 기자들은 어떤 나라를 두고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였습니까?

1)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두고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천국이요, ’하나님의 나라라는 뜻입니다(3:2, 1:15, 10:9,11).

2) 다음으로 성경은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자발적인 순종, 즉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나타나는 내면적 왕국을 가리킵니다.

3)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과 그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재한 것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셨습니다

4)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14:17)이라 하였습니다.

5) 이 하나님의 나라는 종말과 함께 실제로 이 지상에 영원히 세워질 것이라고 계시록은 증언합니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시리로다”(11:15)

둘째, 이 나라에는 어떤 사람이 들어갑니까?



1)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들어갑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3:5)

2) 어린아이와 같이 섬기는 자가 들어가는 곳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10:15-16)

3)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들어갑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7:21)

4) 무엇보다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한 자만 들어갑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5:24)



셋째,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 나라에 살고 있는 것입니까?



1)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였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용어로 설명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 왕국 안에서라는 말의 단축형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영적이고 내면적인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모든 그리스도인의 내면에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는 뜻입니다.

2) 그러나 지상에 있는 동안 그리스도인의 내면에 세워진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완성된 단계가 아닙니다. 신학자들은 이 상태를 ‘already, but not yet’(이미, 그러나 아직)이라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종말과 최후 심판과 함께 완성되고 모든 그리스도인은 천년왕국에서 영원토록 왕 노릇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넷째. 하나님 나라의 가치는 얼마나 되는 것입니까?

~ 모든 소유를 팔아서라도 얻어야만 할 귀한 보물로 묘사하였습니다(13:44-46).



다섯째, (오늘 우리가 다룰 배용) 이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성장한다고 합니까?



1)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성장은 겨자씨처럼 성장합니다(13:31, 4:30-32, 13:18-19). 혹은 밭에 뿌려진 씨앗처럼 성장합니다(4:3-20)

2) 누룩처럼 성장합니다(13:20-21),



이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 나라의 성장 비결에 대해 알아봅니다.



2.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의 교훈



먼저 겨자씨(mustard seed)는 눈에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아주 작은 씨앗입니다. 주로 기름이나 겨자 소스를 얻기 위해 재배하는 식물로서 다 자라면 무려 4-5m나 가까이 자란다고 합니다. 특히 가지가 단단해지는 가을이 되면 온갖 새달이 폭풍우를 피하는 은신처로 사고 여름철엔 뙤약볕을 피하는 그늘이 됩니다. 이렇게 새들이 나무 그늘에서 피난처를 찾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모든 나라, 좃고, 민족에게 좋은 안식처요 피난처가 된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겨자씨는 매우 작은 것을 나타날 때 비유적으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물론 다른 식물들도 작은 씨앗에서 큰 나무로 자라기도 하지만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가장 작은 씨앗이 겨자씨이기에 주님도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성장의 비유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가 자라듯이 영적으로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점진적으로 그 영역을 넓혀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죽으신 후 40년 이내에 복음은 거대한 전 로마제국의 중심지와 구석구석까지 이르렀습니다. 겨자씨가 자라나서 큰 나무가 되었듯이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자 복음의 나무와 그 가지와 잎새가 전 세계를 뒤덮은 것입니다. 할렐루야, 주님께 영광을 올립니다.



한편, 다른 곳에서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는 것을 보신 주님은 제자들의 믿음이 작은 것을 꾸짖으시면서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리로 옮겨지리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하셨습니다(17:20).



겨자씨와 관련한 이 두 가지 요소, 즉 하나님 나라의 성장비법과 믿음의 크기를 생각하면서 특별히 교리적으로 성화(sanctification)를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신앙의 성숙함은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지만 정말 작은 믿음이 있다면 성화는 시작되었고 완성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자신을 성찰하면서 내 안에 남아있는 옛사람의 죄악상이나 나쁜 습관들, 아직도 고쳐지지 못한 성격과 기질들, 이기적이고 주관적인 가치관들, 세상을 향한 탐욕과 자기 자랑들을 다 불태워버리는 계기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겨자씨의 비유가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뜻한다면 다음의 누룩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내적 성장을 비유합니다. 누룩은 한자로 곡자라고 하는데, 원래 술을 만들 때 사용하는 발효제입니다. 술을 만드는 효소를 갖는 곰팡이를 곡류에 번식시킨 것입니다. 누룩이 처음 만들어진 때는 중국 춘추전국시대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에 수입된 것으로 봅니다.



누룩 비유에서 눈여겨 볼 것은 21절에서 먼저, 누룩을 만드는 사람이 여인이라는 점입니다. 술을 만드는 일은 주로 남성의 몫인데 왜 주님은 여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것일까요? 랜스키(Lenski)라는 학자는 이 비유 속의 여자는 교회를 상징한다고 풀이했습니다. 그러나 핸드릭슨은 가정의 빵을 만드는 사람은 주로 여자이기에 그렇게 비유한 것이라고 단순하게 해석했습니다. 다음으로 가루 서말이라는 표현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랜스키, 몰간, 펑크 등 많은 학자들이 논란을 벌였습니다. 3이라는 숫자를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삼위일체 하나님을 상징할 수도 있다거나 하나님의 신성한 힘을 상징한다고 좀 알레고리하게 해석할 것입니다. 그러나 좀 자연적이고 과학적으로 해석하면 당시 한 가정마다 술을 만들 때 가루 서말쯤 사용하는 것이 상례였을 것으로 추정함이 보편적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이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신 의도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핸드릭슨의 견해는 이렇습니다. 주님이 의도하신 바는 하나님의 통치는 외부로부터 인간의 마음과 생활 속에 도입되어 일단 들어온 다음에는 내부에서와 그리고 내부에서 외부로 진전하며 침투적이고 변형시키는 영향력을 마음과 삶 속에서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들을 위하여 세워주신 완전이라는 목표로 향하여 그들을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3. 우리의 과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도래와 함께 이 세상나라 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 안에 그 영적 실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모두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직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 사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속에 지니고서 세상 나라 속에 섞여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상에 사는 동안 모든 사람은 두 세력으로 나누어집니다. , 하나님 나라의 백성과, 세상 나라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고, 세상 나라는 마귀가 통치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처신 방식이 등장합니다.



첫째, 세상 나라 사람들은 세상 나라 법만 지키면 되지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 나라의 법과 세상 나라의 법을 동시에 지키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어떤 경우에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살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10:32-33)



셋째,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세상 나라의 방해와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애쓰고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앉으나 서나 오직 주의 복음을 세상에 전파해야 합니다. 주님은 승천하시기 전 이 복음전파의 사명을 재차 강조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1:8)



이 세 가지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이 세상 나라 속에 섞여 사는 동안 지혜롭게 처신해야 할 행동강령입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나라의 핍박에 굴하여 주님의 명령을 위반하고 세상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나라에 굴복할 때 하나님의 영광의 빛은 다시 어두워집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한복음 서두에서 밝힌 빛에 대해 묵상해야 합니다. 14절을 보세요. 그 안에 생명이 있다 했습니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다음으로 이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라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님이라는 생명의 빛을 지닌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를 빛의 자녀’(5:8)라고 칭했습니다. 그런데 5절을 보세요.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하였습니다. 즉 세상은 어둠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생명의 빛을 받지 못한 어둠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 빛의 자녀들을 보내어 빛을 비추이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에 빛을 비춘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사도 바울의 말을 들어봅니다. 그는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5:9)이라 하였습니다. 이를 거꾸로 풀이하면 악한 것과 불의한 것과 거짓은 빛을 나타내지 못하고 어둠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빛이 비추는 곳이므로 모든 의의 열매가 맺어지지만 세상 나라는 어둠이기에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더러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라고 경고하였습니다(5:11).



그럼에도 여전히, 지금 이 시간에도 그리스도인이면서 어둠의 일에 참여하고 있다면 그는 즉시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빛의 일에 참여해야 합니다. 열매를 맺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반드시 증험과 성취라는 가시적 결과로 나타납니다. 그것이 바로 열매입니다. 무엇보다 빛의 일은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내내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추방시키시고 배고픈 자에게 밥을 주시고 죽은 자도 살리셨습니다. 이것이 생명의 일이요 빛의 일이요 열매 맺는 일입니다. 열매 맺지 못한 가지는 찍어 불에 던진다는 세례 요한의 경고를 기억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개혁교회 성도들입니다. 개혁교회는 모든 교회들의 모범입니다. 개혁교회 성도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모범입니다. 모범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1) 어떤 그리스도인들보다 기도와 말씀에 전무해야 합니다.

2) 늘 감사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3) 온유하고 겸손하게 살아야 합니다. 성질을 죽이고 부드럽고 따뜻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4) 남들처럼 세상을 따라 나서는 인생이 아닙니다. 늘 선구자가 되어야 합니다.

5) 항상 정직하고 신실하게 살아야 하고

6) 불쌍한 이를 도우며 살아야 하고

7)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청지기가 되어야 하고

8)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행복 전도사가 되어야 하고

9) 언제나 낮은 데에 임하고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10) 돕는 자

11) 봉사하는 자

12) 구제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런 성도, 이런 교회가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요 의와 평강과 희락의 나라입니다.



4. 결어



결론적으로 살펴보면 하나님은 우리 안에 겨자씨만한 믿음의 씨앗을 심었습니다. 이 믿음은 옛사람이라는 곰팡이와 누룩과 함께 섞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서로 화학반응을 일으키며 새로운 술이라는 물질을 생성해 냅니다. 이 술이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 거듭난 사람이요, 사도 바울이 말하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바로 이것이 자라난 믿음의 나무요, 열매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고 그분과 함께 동거하며 새로운 인생을 살고 계신 성도 여러분, 이제 남은 과제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성화의 인생길을 걸으면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일을 위해 전심전력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런 인생에 가장 무서운 두 대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고집이요, 하나는 게으름입니다. 고집이 세다는 것은 죽어도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복음도 거부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입니다. 게으름은 무엇보다 가난의 주요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자신을 진보시키기 못합니다. 진보가 없으니 자라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게으른 사람은 어릴 때나 성인이 되어서나 거의 생각하고 행동하는 패턴이 유사합니다. 그것은 바로 한 치도 자라나지 못하였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게으름이 영적 성장의 가장 큰 대적이라 하는 것입니다.



열심을 냅시다. 전심전력하는 인생은 빛이 나지만 게으른 사람의 인생길에는 어둠만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일어나세요,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세요.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마세요. 우리 인생은 복음을 다 전하기에 너무 짧은 시간입니다. 주여 우리에게 신실한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아멘.


728x90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