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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주차. <사마리아여행> 교만한 자리에서 내려오라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9. 10. 16.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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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주차. <사마리아여행> 교만한 자리에서 내려오라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 주의 앞에 수종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 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그들이 잠잠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그들이 이에 대하여 대답하지 못하니라.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청함을 받을 때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14:1~14)




1. 외인과의 식사자리




오늘은 예수님이 한 바리새인의 초청을 받아 그 집에 가서 식사를 대접받는 자리에서 일어난 일을 다룹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는 율법 교사들과 다른 바리새인들도 많이 초청을 받아 함께 식사를 한 모양입니다. 지난주 본문에서 이들은 예수님더러 헤롯 왕의 체포 명령을 피해 도망가라고 유혹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갑자기 자기 집에서 밥이나 한 끼 하자고 초대를 한 것입니다. 무슨 일일까요? 그새 바리새인들이 회심이라도 한 것일까요? 천만에요 이들이 예수님을 식사 자리에 초대한 것은 예수님으로부터 조그마한 허점이나 죄의 단초를 찾으려고 한 것입니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을 하느냐고요? 1절 마지막 기록을 보세요. 예수님이 들어가니 그들이 어떻게 합니까? ’엿보고 있더라고 합니다. 헬라어로 파라테루메노이라는 단어가 쓰였는데 이는 주로 간수가 죄수를 감시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즉 바리새인들은 식사 자리에 초대를 받은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면서 혹여 무슨 잘못이나 신학적 오류를 범하지 않을까 하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지독히 악한 자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은 다른 사람의 약점을 들추어내어 공격하는 자들을 악인이라 말합니다. 이들은 겉으로는 우리와 친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언제나 우리를 넘어뜨리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자들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간혹 불신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그런데 여기에 분명한 신학적 입장이 정립되어 있지 않으면 자칫 주님의 계명을 어기거나 실수할 수 있고 또 불신자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면 긴가민가 흔쾌하지 못한 마음에 머물러 있을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도 이런 일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정리하지 못한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식사를 하다가 바울로부터 핀잔을 들은 일이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우리는 누구라도 함께 식사할 수 있습니다. 다만 식사의 예법이나 관습까지 그들을 따를 필요는 없습니다. 가령, 술자리에 동석했다 친다면 많은 불신자들이 조롱하고 유혹하고 윽박지른다 해도 우리는 우리 식대로 행동하면 됩니다. 결국 그들의 꼬임에 넘어가 한 잔쯤은 괜찮겠지 하고 술잔을 입에 댄 순간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말을 할 것입니다. “,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이래야지. 당신은 참으로 멋진 그리스도인이야. 융통성이 있는 보기 드문 그리스도인이군하며 칭찬할 것입니다. 그러나 속으론 , 그리스도인도 별 볼 일 없군하고 업신여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자리에서 비록 모멸감을 받고 분위기 망치는 사람이라 평가를 받는다 해도 속지 마세요.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지 우리 식으로 살면 됩니다. 식사 자리에서 당당히 기도하세요. 술잔을 요구하거든 자연스럽게 거절하세요. 그리고 우리에게 술잔을 요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말씀하세요. 마치 이슬람인에게 돼지고기를 먹으라고 강요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분명히 말해야 합니다.




, 이런 상황에서 오늘도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이 세상에 설파하기 위해 사람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이 잔치 자리에서 주님은 세 가지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2. 세 가지 이야기




첫째 이야기




잔칫집 자리에 병자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수종병이라는 특별한 질병을 가진 환자였습니다. 일명 고창병‘(dropsy)이라고도 하는 이 병은 대개 심장이나 신장에 결함이 있을 때 나타나는 현상으로 주로 얼굴과 팔, 다리가 크게 부어오르고 살갗이 물러지는 증상을 띱니다. 헬라어로 휘도르피코스인데 휘도르이라는 뜻으로 복부에 물이 많이 차는 증상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아마 바리새인들은 잔칫집에 불청객을 바라보고 이맛살을 찌푸리며 있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에는 이런 병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결과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을 달갑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사람을 보자마자 바리새인들과 사람들을 향해 한 가지 실험을 하십니다. , 그들의 의중을 떠보는 것입니다. 3절을 보세요. 마침 이날은 안식일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안식일 규정을 어마나 철저히 따지는 사람들입니까? 그런데 이들의 안식일 규례는 그야말로 내로남불입니다.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격하기 짝이 없는 위선자들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위선적인 태도를 지적하기 위해 이번에는 먼저 그들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냐?”




갑작스런 예수님의 질문에 바리새인들은 저으기 당황한 모양입니다. 4절을 보니 아무도 주님의 기습적인 질문을 예상치 못한 듯 모두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합당하냐?‘고 하셨는데 이것은 율법에 부합하느냐?‘(Is it lawful?)고 물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당신들이 늘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 사용하는 율법에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는 것이 합법이라 말하는가, 아니면 불법이라 말하는가 대답해 보라는 의미가 담긴 것입니다. 그러자 아무도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아픈 사람을 고쳐 주는 이 일은 율법 이전에 인간 본성적으로도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지적하셨듯이 안식일은 안식일 그 자체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5절에서 못을 박으십니다. 아무리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한다 해도 생명을 살리는 일까지 이 규정에 묶일 필요는 없다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무엇이 본질인가? 하는 문제는 늘 우리 삶의 중심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요즘 한국사회를 들썩이고 있는 내로남불이라는 사회적 현상은 우리 사회가 본질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인간은 먼저 자기를 성찰하는 존재여야 합니다. 자기 눈의 들보는 바라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를 개혁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라면 이미 양심을 던져버린 사람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그 자체를 소중히 여겼습니다. 물론 이들의 율법에 대한 사랑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제 규정들이 사람들을 살리는 데 사용되지 않고 오히려 사람을 죽이고 옥죄는 데 사용된다면 그것은 율법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일을 저버리고 니편 내편으로 나누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기준으로 삼지 않고 내편이니까 무조건 옳다라고 주장한다면 우리 사회의 미래는 점점 어둠속으로 뻐져들고 말 것입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보란 듯이 사람들 앞에서 수종병 환자를 고쳐 주십니다. 4절에 보면 예수님이 어떤 방식으로 환자를 고쳐 주었는지 자세히 기록되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치유 방식은 다양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죄인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기적을 일으키시고 가난한 자와 약자를 도우시고 아픈 자를 고쳐 주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




수종병자로 인해 잠시 잔칫집 분위기가 숙연해졌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눈 앞에서 환자의 병이 깨끗이 치유되는 현장을 목격하고 여러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여전히 저가 귀신의 힘을 빌어 저런 짓을 한다고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부정적인 사람은 무슨 짓을 해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한편으로 예수님의 신비한 권위 앞에 주눅이 들었거나 크게 감동하였거나 아니면 정말로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믿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식사 자리의 분위기는 이제 완전히 예수님이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좀 색다른 문제를 들고 나섰습니다. 그것은 바로 잔치에 초대한 사람들의 거만한 자세를 지적한 것입니다. 보통 유대인들의 연회석은 형으로 배열되어 있는데 그 상좌는 중앙 부분에 위치해 있고 보통 초대 받은 주인공이 그 자리에 앉습니다.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은 자주 사람들의 잔치집에 초대를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도 힘깨나 쓴다는 바리새인들이 잔치상에 둘어 앉아 있었습니다. 그중 가장 중앙의 상좌는 최고 지도자가 앉았을 것입니다. 상좌에 앉아 섬김 받기를 좋아하는 것은 바리새인들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입니다. 오늘도 그런 모습이 예수님의 눈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사실을 두고 직접화법을 택하지 않고 하나의 비유를 빌어 말씀하십니다. 누구라고 꼬집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보편적인 사례를 들어 교훈을 주는 방식입니다. , 8절에서 네가라고 하였는데 이 인칭대명사는 상좌에 앉은 바리새인 지도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인 우리를 향해 만약에 네가 초청을 받는다면하는 의미를 가지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가상의 설정을 하신 다음에 그런 상황이 오면 너는 상좌에 앉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상좌에 앉았다가 더 높은 사람(여기서는 진짜 주인, 혹은 주님 자신을 가리킴)이 오면 자리를 양보해 주고 저기 말석에 가 앉을 수도 있는데 그럴 경우 창피를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예 처음부터 낮은 자리에 앉으면 청한 자가 와서 적당한 자리를 안내해 줄때 그때에 자리에 가 앉으면 얼마나 모양새가 좋으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을 듣고 상좌에 앉아있던 바리새인 지도자의 마음은 굉장히 불편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죄인의 특징입니다. 죄인은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 앞에서 양심이 찔린 듯이 아픕니다. 한 마디로 양심이라는 얼굴을 들 수 없어 몸 둘 바를 몰라 합니다. 그러나 또다른 특징은 이런 경우 대꾸할 용기는 없습니다. 그래서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고 반항심이 생기지만 겉으로는 잠잠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교훈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교만과 관련하여 주신 말씀으로 여깁니다. 그런데 11절에서 낮아지고 높아지리라는 말씀이 모두 수동태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유의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높아지고 낮아지는 것이 인간 스스로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높아진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한 사람의 불행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 9:15~16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따라서 우리는 모든 주권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인정하고 살아야 합니다. 내 인생의 주권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인정한다면 그 다음 인생길이 편안해 집니다. 나는 그저 주어진 섭리 안에서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고 가난한 자, 아픈 자, 약한 자들을 돌보고 섬기면 됩니다. 가장 어리석은 그리스도인이 누구일까요?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을 잊고 자기 성공과 행복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기독교는 나를 위한 종교가 아니라 내 이웃을 위한 종교입니다





세 번째 이야기




그런 다음 예수님은 한 가지를 더 추가하여 충고하십니다. 잔칫집에 초대된 사람들의 면면을 가만히 보니 모두 부유한 이웃들이었나 봅니다. 그래서 12절에서 일단 주님은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주님이 밝히신 이유를 들어봅니다.




주님은 구제행위 그 자체에 방점을 두는 것이 아닙니다. , 남을 돕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함정이 무엇인가 하면 사람들의 칭찬과 관심과 후한 평가를 즐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자칫 외식으로 연결됩니다. 누군가 선행을 하는데 그 선행의 동기가 사람들의 좋은 평가나 인심을 받아 다른 유익을 보상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을 경계하는 말씀입니다. 주로 정치인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자주 시장을 돌고 좋은 퍼포먼스를 하고 인기를 끌기 위해 방송에 출연하고 지게를 지고 짐을 나르고 연탄을 배달하는 등 선행하는 모습을 연출합니다. 이 모든 목적이 무엇인지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로 이런 기획되고 자기 유익이라는 목적을 가진 일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는 일임을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선행의 원칙은 다음의 세 가지입니다. 첫째,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것입니다(6:3). 주님의 말씀은 사람들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선행을 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몰래 하는 선행이 알려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의도적으로 알리려고 하는 동기는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모든 선행의 동기는 참된 사랑이어야 함을 가르칩니다. 진짜로 남을 구제한다는 것은 보상을 바라지 않고 이 땅에서 헐벗고 굶주리는 이웃을 정말로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바로 참된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하나의 계명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니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일이 마땅합니다(요일4;11). 셋째, 모든 보상은 천국 상급뿐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칭찬과 표창과 보상을 바라지 마세요. 솔직히 이 세상에서 부유하게 지낸 자는 천국에서 받을 상급이 없을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눈 가는대로 마음 가는대로 따라 가는 본성이 있습니다. 주님은 네 보물 있는 그곳에 네 마음도 있다”(6:21)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보물이 어디에 있습니까? 은행 통장과 금고 안에 보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유일한 보물이요 하나님나라가 바로 그 보물을 누리고 살 영원한 우리의 나라임을 잊지 마시길 기원합니다.




3. 결어




오늘 들려준 세 가지 이야기를 통해 세 가지 교훈을 잊지 맙시다.




첫째, 본질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 모든 일에는 본질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신앙에도 본질이 있고 인생에도 본질이 있습니다. 사과의 본질은 사과 맛입니다. 모양이나 크기나 색깔이 본질이 아닙니다. 사과가 사과인 것은 사과가 배 맛을 내는 것이 아니라 사과 맛을 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는 것이 인생의 제일된 목적입니다. 그 외의 모든 일은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물론 부차적인 문제라고 해서 등한시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순위의 법칙이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언제나 겸손해야 합니다.


~ 교만하면 늘 높은 자리를 탐합니다. 인류의 조상들은 바벨탑을 쌓아 높은 자리에 오르기를 탐하다 멸망했습니다. 내가 앉을 자리가 아니면 쳐다보지도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은 한 사람의 장관을 지켜봅니다. 그의 말로가 어떠할지 우리는 오늘 주님이 주신 말씀을 통해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아마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만약 부끄럼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양심의 화인을 맞은 사람일 것입니다. 겸손은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낮게 여기고 높이는 사람입니다. 어거스틴은 천국으로 오르는 모든 계단의 이름이 겸손이라 하였습니다. 겸손은 나에게서 하나님의 빛을 증거하는 표상입니다. 당신 안에 하나님의 빛이 존재합니까? 만약 당신이 겸손한 사람이 아니라면 당신 안에는 여전히 탐욕과 자기 자랑과 교만의 어둠이 당신을 지배하고 있을 것입니다.

~ 무엇보다 겸손은 하나님을 정확히 아는 지식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무지하면 겸손할 수 없습니다. 무지한 자는 자기 고집을 버리지 못합니다. 무지하면 이해가 아니라 오해하기 일쑤고 자기 유익만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무지와 고집은 교만이라는 같은 뿌리에서 자라난 나뭇가지들입니다. 속에 마우 것도 담지 못한 사람이 가벼운 사람입니다. 겸손은 무거운 사람입니다. 빈 종이박스는 바람에 쉬이 날리지만 추석 선물 박스는 날아가지 않습니다. 속을 가득 채웠기에 쉽게 흔들리지 않고 조용히 자기 자리를 지킵니다. 벼가 익어야 고개를 숙이듯이 속이 가득찬 사람이 겸손의 열매를 맺습니다. 모든 지식과 지혜와 영적 은사들의 충만과 인격의 성숙함으로 겸손의 열매를 맺기를 기원합니다.




셋째, 선행의 원칙을 알고 지킵시다


~ 누구나 착한 일을 하고 올바른 일을 하여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당연히 그리스도인들이 남보다 더 많이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선행하고 모범을 보이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보상을 받는 주체가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으로 보상받기를 원합니다. 좋은 평판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오직 하나님의 인정을 받기를 원해야 합니다. 보통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람들이 가지는 가치관이 세상 사람들과 다르고 목적이 다르고 수단과 방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새상 사람들은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 방법을 중시하지 않지만 그리스도인은 하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제시된 모든 규칙과 법과 도덕과 윤리와 제반 수단과 과정들을 다 잘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인생에 하나님의 영적인 축복이 주어지고 채워진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런 복을 누리고 살아보세요. 진짜 행복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고 느끼실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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