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주차. <사마리아여행 시리즈>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2019. 9. 8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눅 13:31~35)
헤롯 가문
오늘 본문의 시대적 배경에 대해 먼저 알아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때에 유대 지역과 갈릴리 지역은 헤롯이 통치하던 시대입니다. 그런데 헤롯 왕국의 이모저모가 그리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그 역사를 먼저 소개합니다.
주전 1세기 초에(거의 예수님의 공생애의 때에) 안티 파테르라는 사람이 이두메 지역의 통치라로 임명됩니다. 알다시피 이두메의 옛 이름은 에돔이요, 에돔은 야곱의 형 에서의 후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지역은 다윗 왕국 이래 유다에 복속된 지역이자 늘 유다에 조공을 바치며 살았던 종의 신분을 가진 종족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제국 시대로 접어들면서 이두메와 유대의 상하관계가 역전되는데 바로 안티 파테르(1대)가 이두메 왕이 되면서부터입니다. 이들은 로마와 결탁하여 서서히 유대 지역을 손에 넣기 시작합니다. 안티 파테르에 이어 그 아들 안티파스(2대)가 주전 47년에 유대의 왕이 되었습니다. 이 사람을 유대 왕으로 임명한 로마 황제가 바로 율리우스 케사르, 즉 그 유명한 시저입니다. 안티파스에겐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한 아들은 파사엘이고 다른 한 아들이 헤롯 대왕입니다. 안티파스는 큰 아들에게 예루살렘을 통치하도록 하고 헤롯에게는 갈릴리 총독 자리를 물려주었는데 나중에 안티파스와 파사엘이 갈릴리 사람들에 의해 암살을 당하자 주전 40년에 헤롯대왕(3대)이 온 유대지역을 통치하게 됩니다.
헤롯대왕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몇 가지 정책을 폅니다. 먼저 그는 유대 왕가 출신인 미리암과 결혼을 합니다. 이 여인 사이에 낳은 아들이 아리스토불루스이고 여기서 헤롯 아그립바 1세(야고보를 죽인 왕으로, 그의 아들 아그립바 2세는 베스도 총독과 함께 사도 바울을 면담하고 재판한 왕)와 딸 헤로디아가 태어납니다. 다른 아들로는 안티 파테르와 빌립1세와 2세, 그리고 헤롯 아켈라오와 오늘 본문이 지칭하는 헤롯 안디바가 있습니다.
오늘 다루고자 하는 왕은 헤롯 안디바(4대)입니다. 그는 헤롯대왕의 둘째 아들로 아버지가 죽자 갈릴리와 베레아의 분봉왕(지역 통치자)이 되어 주전 4년부터 주후 39년까지 다스렸습니다(눅 3:1). 성경에는 분봉왕 헤롯 혹은 헤롯 왕으로 나옵니다(마 14:1, 막 6:14, 눅 3:19). 그는 첫째 아내와 헤어지고 이복 형제 아리스토불루스의 딸이자 빌립 1세의 아내인 헤로디아를 빼앗아 재혼을 합니다. 이것 때문에 세례 요한의 책망을 받았고 생일 잔치에서 철없는 헤로디아의 딸의 요청으로 세례 요한의 목을 벱니다(막 6:20~29).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오늘 본문 32절에서 ’여우‘라는 말을 들었는데 이는 그만큼 간사한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나중에 이 사람은 빌라도에 의해 호송되어 온 예수님을 재판하였는데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한 후 다시 빌라도에게 넘겨 주었습니다(눅 23:7~11).
결론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이 괜히 이 사람을 두고 ’여우‘라고 부른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이 사람은 예수님에 대해 매우 불쾌해 했고 미워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편, 그는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에게 아첨하기 위해 디베랴라는 도시를 건설했고 그래서 사람들은 갈릴리호수를 디베랴 바다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한 마디로 ’아첨왕‘이었습니다. 그래서 ’여우‘라 한 것입니다. 약삭빠른 짐승 하면 단연 여우입니다. 그래서 이솝우화에서 단골 손님이 여우입니다. 잔머리 굴리고 눈치로 먹고 살며 불리하면 재빨리 힘 센 자에게 붙어 공생하는 짐승으로 유명합니다.
이제 이런 여우와 여우 편을 드는 바리새인과 군중 사이에 선 예수님의 모습을 오늘도 만나보겠습니다.
2. 본문 해설
31절
~ 먼저 31절에서 어떤 바리새인들이 와서 예수님더러 헤롯왕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니 얼른 여기를 떠나라고 재촉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누구입니까? 성경에서 예수님을 가장 적대시하고 반대한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런데 예상 밖으로 그들이 예수님의 도우미로 자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교묘한 꼼수에 속아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얄팍한 속임수를 이미 간파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헤롯 안디바가 예수님을 죽리여 한다는 소문을 근거로 예수님을 위하는 척 하면서 예수님을 잠시 다른 장소로 옮긴 다음 몰래 암살을 시도하려는 음모를 획책하는 것입니다.
32~33절
~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들어라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런 화법을 두고 간접화법이라 합니다. 겉으로는 안디바를 ’여우‘라 부르면서 그들을 향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선포하십니다. 32절과 33절의 말씀을 풀이하면 이런 것입니다.
“도망을 치라고 하느냐? 이제 겨우 3일 밖에 남지 않았다. 오늘과 내일은 너희같이 속이 엉큼한 작자들을 미혹하고 있는 귀신들을 추방시킬 것이고 병든 자를 치유할 것이다. 이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나는 도망치지 않고 모든 선지자들이 예언한 것처첨 예루살렘에서 붙잡혀 당당히 죽을 것이며 결국 3일 만에 부활할 것이다”
~ 예수님은 얼른 도망을 치라는 바리새인들의 술수에 걸려들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공포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런 모습들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맡은 자들이 어떤 자세로 일해야 하는가 엿볼 수 있습니다. 세 가지를 유념합시다.
① 첫째, 무슨 일이 닥쳐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소명을 받아 하나님의 일을 맡은 자를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지키신다는 사실을 절대적으로 믿으셔야 합니다. 분봉왕 헤롯 안디바가 예수를 잡으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우리 같으면 이런 경우 왕의 명령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주눅이 들거나 무서워 회피할 수 있습니다. 이때 진정한 믿음과 순종이 발휘됩니다. 평소에는 말로 못할 게 없듯이 허풍을 치다가도 중요한 순간에 꽁무니를 빼고 자취를 감추는 기회주의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당신은 정말 이런 때 ’죽으면 죽으리라‘하고 믿음을 실천할 수 있는지 스스로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② 둘째, 주변 사람들의 속임수에 걸려들지 않도록 분별력을 갖추고 살아야 합니다. 물론 이 분별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주어질 것입니다. 모두 자신의 견해를 말하고 좋은 말로 권면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당신을 위해 기도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일리있는 말이라고 다 진리가 아닙니다. 언제나 당신은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소명을 먼저 떠올리고 그것에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세속적인 기준을 가지고 당신에게 행동을 요구할지도 모릅니다. ’이런 때엔 이렇게 하는 것이 맞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런 말에 쉽게 넘어가거나 마음이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고집이 아니라 소명이자 신념입니다. 소명을 받은 사람의 일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세속과 풍속을 따르지 않기에 사람들은 평범하게 사는 자신들과 비슷하게 사는 것이 좋다고 유혹할지 모릅니다. 천로역정에서 크리스찬을 다른 길로 유혹하는 방해자들이 얼마나 많이 등장합니까? 실제로 그런 유혹에 넘어가 고생하는 크리스찬을 보면서 시험과 유혹을 견디고 분별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③ 셋째, 타협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33절을 보세요. 예수님은 “내 길을 간다”고 당당하게 천명하십니다. 살면서 우리가 제일로 범하기 쉬운 실책이 바로 적당히 타협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는 가장 좋은 해결책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덮어두는 것입니다. 썩은 부분을 도려내지 않는다면 언젠가 지독한 냄새를 풍기며 나머지 모든 부분까지 썩게 만들 것입니다. 특히 돈 문제에 있어서 타협하는 일이 많습니다. 대부분 돈 쓰는 것을 아까워 합니다. 그래서 남들처럼 적당히 법을 어기고 돈을 절약하는 방식을 택합니다. 예를 들어 국가에 납부하는 각종 공과금과 세금을 어떻게 하면 적게 내려고 잔머리를 굴립니다. 어떻게 하면 돈을 들이지 않고 공짜를 즐길까 궁리합니다. 또 빌린 돈을 갚는 일과 당연히 지불해야 할 돈을 아까워하여 미루고 미루다가 거의 잊어버린 척 하는 시늉으로 은근슬쩍 넘어가려 합니다. 그러나 돈을 받으려 하는 사람은 자기가 받을 돈을 잊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니 대충 넘어가려 하지 마세요. 이런 일들이 바로 불의와 타협하는 것입니다. 숨기지 말고, 속이지 말고 당당하게 정직하게 일을 처리하는 자세를 갖추고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무서워하지 말고 속임을 당하지도 말고 타협하지 말고 당당하게 하나님으로부터 맡은 일을 잘 감당하기를 소망합니다.
34절
~ 예수님의 단호한 태도에 더이상 바리새인들의 언급이 없는 걸로 보아 바리새인들도 이제 예수님을 유혹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바로 이때 예수님은 자신이 죽어야 곳을 선포하십니다. 그곳이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은 메시야가 예루살렘에서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 자신이 죽어야 땅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심경이 어떤 것입니까? 34절을 보세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시며 통곡하십니다. 예루살렘이 무엇입니까?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이 성전에서 이스라엘의 제사를 받으시고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은 전 이스라엘의 신앙의 핵심이자 자부심입니다. 그런 예루살렘이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이 사실을 알지 못하지만 예수님은 앞으로 40년 뒤에 일어날 예루살렘의 멸망을 미리 아시고 통곡하시는 것입니다.
~ 이렇게 ’미리 안다는 것‘이 결코 행복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도 좋은 일이 아니라 좋지 않은 일을 미리 본다면 그 속이 어떠하겠습니까? 말로 한다고 보지 못한 사람들이 믿을 리가 없고 이해할 리도 만무할 것입니다. 그러니 오직 할 일은 ’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실제적으로 주후 70년 로마의 티투스 장군이 이끄는 로마군대에 의해 처참하게 무너지고 파괴되었습니다. 지금은 단지 ’통곡의 벽‘이라는 일부분만 모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이슬람에 자리를 빼았긴채 그 벽을 붙잡고 통곡할 뿐입니다. 주님은 이 사실을 미리 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시는 것입니다. 이 비극의 성읍인 예루살렘에서 대한 울부짖음이요 예루살렘으로 대표되는 전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내는 탄식입니다.
~ 그런데 동일한 이 사건을 두고 마태도 그의 복음서에 기록하고 있는데(마23:27~39), 둘 사이에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누가는 이 기사를 예루살렘에서의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하여 언급하고 있는 반면에 마태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외식과 관련하여 언급함으로써 예루살렘의 멸망이 그들에게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누가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하는 예루살렘에서 주님이 죽어야 하는 이 비극적인 사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마태는 거룩한 예루살렘이 멸망할 수 밖에 없는 1차 원인이 누구에게 있는 것인가를 역사 앞에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의 이 고발장 앞에서 우리는 오늘의 교회 형편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교회가 왜 무너집니까? 그것은 바로 교회의 지도자들이 타락하고 부패할 때 일어납니다. 말라기 선지자 시절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당시 가장 먼저 타락한 자들이 바로 제자장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사장들로 상징되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합니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는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다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 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말1:6~8)
~ 그런데 누가는 모든 이스라엘에게 그 책임을 묻고 있습니다. 34절을 다시 보세요. 주님은 “선지자를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를 고발하십니다. 주님은 하나님이 수없이 그 자녀들을 돌아오라고 말하며 품에 품고자 하였으나 이스라엘은 듣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35절
~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엄중하신 심판이 기다립니다. 그 상태를 누가는 한 단어로 표현합니다. 바로 ’황폐‘(forsake)입니다. 이는 헬라어로 ’아피에미‘라 하는데 ’버림을 당한 상태‘를 일컫는 말로서 ’하나님이 포기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여기서 ’네가 황페해지는 것이 아니라 ‘너희 집’이 황폐해진다고 하였다는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이는 곧 ‘네 형편이 매우 고단할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체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집을 황폐하게 하심으로 힘들고 고달픈 삶으로 징계를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시 살리시고 복되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무하하신 사랑이자 은혜입니다.
3. 결어
오늘 주님은 통곡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심장인 예루살렘을 바라보시고 우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주님이 왜 우시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왜 주님이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하시며 통곡하시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었다면 주님의 이 장면이 이미 예고된 것임을 눈치챌 것입니다. 이사야 29장으로 갑니다.
“슬프다 아리엘이여 아리엘이여 다윗이 진 친 성읍이여 해마다 절기가 돌아오려니와, 내가 아리엘을 괴롭게 하리니 그가 슬퍼하고 애곡하며 내게 이라엘과 같이 되리라”(29:1~2)
다시 말해 조금이라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하신 하나님의 일을 알고 이해한 사람이 있었다면 주님의 통곡을 멀뚱히 바라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지식이 있었다면 그도 주님과 함께 울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둘러싼 많은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지는 결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유념하시길 바랍니다. 무지는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무지는 늘 잘못된 인생길을 걷도록 유혹하는 시험입니다. 왜 공부해야 합니까? 무지한 사람이 되어 주님을 괴롭게 하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
특별히 나는 이 부분에서 왜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애통하는 자‘를 언급하셨는지 어렴풋이 이해하였습니다. 그리고 ’애통하는 자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는 의미도 더욱 가까이 느꼈습니다(마5:4).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이 가장 슬픈 일인가를 가르치십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이별과 불행한 일들, 혹은 억울한 일들을 당했을 때 울며불며 통곡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진짜 우리가 슬퍼해야 할 일이 따로 있음을 알리고 계십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질 때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이 더이상 임재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의미하십니다. 이스라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진다는 것은 더이상 구원이 이스라엘에게만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사람에 의해 무산되는 것이야말로 가장 슬픈 일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런 사실과 의미를 알고 우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뭘 알지도 못하고 슬퍼할 수 없습니다. 결국 누가 주님의 위로를 받습니까? 정확히, 제대로 아는 자가 위로를 받습니다. 우리는 이제 주님이 왜 우셨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실 때에 주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주님이 왜 통곡하시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제3일에는 네가 완전해 질 것”이라는 말씀은 더더욱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을 이해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사망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고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려움없이 걱정 없이 주님의 위로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위로 받은 자는 더 이상 울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제 오직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위로의 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은혜의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 다 고백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예루살렘을 바라보시고 눈물을 흘리신 것처럼 여러분은 여러분의 죄를 바라보며 울었습니다. 만약 울지 않고 주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직 주님의 위로를 받지 못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 눈물로 인해 하나님은 여러분이 흘린 눈물을 보시고 감동하시고 즉시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죄의 감옥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은 새로운 피조물들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위로를 받은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다만 바라는 것은 위로를 받은 자가 다른 이를 위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위로해 달라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점에서 어직 철부지 어린아이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다른 이를 위로해 주는 사람들입니다. 위로하는 사람은 자신의 처지와 형편에 따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은 비록 형편이 낮고 힘들다 해도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른 이를 위로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의 진리를 깨달아 평생 동안 위로를 받기만 하는 자가 아니라 위로하는 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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