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형제가 내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용서하라”는 말은 490번까지만 용서하고 491번째부터는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끝까지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고 그냥 두면 두 가지 상황이 벌어집니다. 하나는 마음이 점점 악해지고 강퍅해집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깊은 원한을 품게 만듭니다. 이 원한의 쓴 뿌리가 사람의 마음에 깊이 자리 잡으면 그 사람의 인격 전체가 뒤틀리고 삶 전체가 파괴됩니다. 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손상을 입습니다. 신앙생활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기도문이 막힙니다. 찬송이 나오지 않습니다. 말씀을 들어도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사막과 같은 곤고한 심령이 됩니다.
1. 용서는 천국과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용서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먼저 하늘나라를 거론하셨습니다(23절). 용서는 하늘나라와 관계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죄인인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죄를 용서받아야 합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심판을 받아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죄인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 사함을 받으면 의롭게 되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은혜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죄를 용서 받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도 마음에 평강을 누리며 천국을 맛보게 됩니다. 용서는 천국을 얻는 비결입니다. 용서는 원수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용서해야 내가 자유로워집니다. 용서해야 내가 그 문제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용서해야 내 마음에 참 평안과 위로가 임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하시는 것은 원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용서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2. 우리가 용서받은 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용서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만 달란트 빚진 종을 예로 들었습니다(23-27절). 1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입니다. 1 데나리온은 장정이 하루 일한 품삯입니다. 그러니까 6천 데나리온이란 남자 장정이 6천일 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큰 금액입니다. 만 달란트는 6천만 데나리온입니다. 만 달란트는 남자 장정이 16만년 일해야 모을 수 있는 큰돈입니다. 종은 엎드려 절하면서 빌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종을 불쌍히 여겨서 아무런 조건 없이 만 달란트나 되는 큰돈을 탕감해주었습니다. 종은 큰 기쁨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빚을 탕감 받은 종은 엄청난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만 달란트 빚진 종은 바로 우리 자신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지은 죄가 만 달란트만큼 그렇게 크고 많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우리의 죄만 용서해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셨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 영원히 살 수 있는 은총과 특권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종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빚진 동료의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독촉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동료는 엎드려 간구하며 사정했습니다. 조금만 참아주면 빚을 갚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종은 그 동료를 용서하지 않고 그를 잡아 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이 광경을 목격한 옆에 있던 동료들이 몹시 민망했다고 했습니다. 보다 못한 동료들이 임금에게 찾아가서 고발했습니다. 그러자 임금은 심히 노해가지고 그 종을 잡아 가두었습니다. 왜 임금은 그를 다시 잡아 가두었습니까? 임금은 이 종이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은 그 죄를 묻고 있습니다. 남을 용서하지 않는 이 종의 악함을 책망하면서 임금은 그를 잡아 가두었습니다. 이 종이 남을 용서하지 않다가 손해 본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내가 감옥에 갇힙니다. 증오와 분노의 감옥에 내가 갇힙니다.
3.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만 달란트 빚진 종을 용서한 주인과 100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용서하지 못한 이 종은 무엇이 달랐습니까? 27절에 “주인이 그 종을 불쌍히 여겨”라고 했습니다. 빚진 종이 엎드려 사정하는 것을 보고 임금은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서 그 빚을 탕감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종에게는 자기에게 빚진 동료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습니다(29-30절). 그래서 100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용서하지 못하고 감옥에 가둔 것입니다. 임금이 이 종을 잡아다 책망하면서 한 말이 무엇입니까? 33절에 보면 불쌍히 여기지 않은 것을 책망했습니다. 마태복음 5:7에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야고보서 2:13에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이렇게 복된 자리에 앉아서 예배드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긍휼히 여겨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을 가집시다.
4. 마음으로부터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는 진심으로 해야 합니다. 35절에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말로는 용서한다고 하고서 그 사람을 피하려고 하고, 다시는 안 만나려고 하는 때가 있습니다. 입술로는 용서한다고 하고서 마음에는 계속해서 분노를 품고 살거나, 섭섭한 마음을 품고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참된 용서가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완전하게 용서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용서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4:32에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골로새서 3:13에는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주님께서 나에게 하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그리해야 하겠습니다. 형제가 나에게 잘못한 것을 잊으십시오. 주님은 일곱 번을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끝없는 용서만이 나의 삶을 천국으로 가꾸게 됩니다.
대전 탄방교회 박석중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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