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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주차. <사마리아여행> 내 집을 채우라 19. 9. 22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9. 10. 16.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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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주차. <사마리아여행> 내 집을 채우라




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 되도다 하니,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14:15~24) (22:1~14) 

 



1. 하늘 잔치




잔치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난주 우리는 잔칫집에서의 식사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수종병자를 먼저 고쳐 주시고, 높은 자리에 앉아 거들먹거리는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들추어내고 부한 자들이 아니라 대접할 능력도 없는 헐벗고 가난한 자들을 대접하여 하늘의 상급을 바라는 것이 참된 구제라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이때 함께 식사를 하던 한 사람이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하고 무심코 독백하듯이 한 마디를 뱉어내었습니다(15). 아마 이 사람은 예수님의 이적적인 치유와 그 가르침에 진짜 감동했나 봅니다. 이 사람이 보기에 예수님이 함께 한 이 잔치가 곧 하늘나라의 잔치로 보였던 것입니다.




한편, 실제로 성경은 가끔 새 하늘과 새 땅의 기쁨을, 빛이 가득 비추어 환하고 넓은 연회식 홀에서 먹을 것과 마실 것(포도주 등)으로 차린 식탁을 놓고 의자에 함께 기대어 누워서 서로서로 청한 자와 교제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이른바 식사 교제를 하늘나라의 잔치로 묘사합니다. 몇 부분을 찾아보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한 기름진 것과 오래 자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할 것이며”(25:6)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23:5) (원수의 목전에서 먹는 식사의 자리라는 표현이 얼마나 극적입니까?)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3:20)




그런데 이 사람 같이 단순하고 피상적인 느낌의 문제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감동은 뒤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진짜 감동이 아니라 일종의 감상에 불과합니다. 우리 주변에 이런 감상적인 것에 젖어 있는 사람들을 자주 봅니다. 특히 주님을 극적으로 만난 경험을 하신 분들에게서 종종 이런 감상들이 발견됩니다. 이에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잔치가 실제로 있다는 것은 부인하시지 않지만 이 사람처럼 하늘나라 잔치에 대한 단순하고 피상적인 지식에 대하여 정확하고 바른 지식을 가르쳐줄 필요를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도 하나의 예화를 들어 하늘나라의 잔치에 대한 바른 지식과 이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를 연극의 장면들로 나누어 하나씩 살필 것입니다.




2. 예수님의 비유




장면1.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들을 청하였습니다(16).


~ 여기서 어떤 사람은 주인‘(master)을 의미하고 종국에는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연극 무대라면 아마 자 형의 연회석이 중앙에 설치되고 무교병을 비롯한 떡과 포도주와 마른 견과류와 분주히 움직이는 종들의 모습들이 연출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은 종들을 보내어 잔치에 초청을 하였습니다

 



장면2. 잔치할 시각이 다가왔지만 아직 손님들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종들을 다시 보내 손님들을 잔치에 초청하였습니다. 종들은 손님들에게 가서 다 준비되었으니 오시라고 재청하였습니다(17).

~ 그런데 하나같이 각자 이유를 대며 잔치에 응하지 않았다고 종이 보고합니다.

(A) 나는 밭을 샀으니 아무래도 밭일을 하러 가보아야 한다고 변명했습니다(18).

(B) 나는 소 다섯 겨리(yoke, 두 마리가 이끄는 쟁기)를 샀으므로 시험하러 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19).

(C) 나는 장가 들었으니 가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20).




장면3. 이에 주인은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종들을 보내어 다른 사람들을 초청하였습니다(21).

~ 종들은 거리와 골목으로 나아가 주인이 시키는 대로 가난한 자들과 몸이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리고 왔습니다(21)

~ 그런데 여전히 자리가 남아돌았습니다. 아무래도 21절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수사 정상적인 사람들보다 그 수가 적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장면 4. 그러자 주인은 자리를 채우기 위해 이번에는 종들에게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해서라도 데리고 오라고 하였습니다(23)

~ 그리고 주인은 나중에 잔치에 참여한 모든 이들은 잔치의 음식을 먹고 즐길 것이지만 처음에 초청을 거절한 사람들은 영원히 내 잔치에 참여치 못하리라고 선언하였습니다(24).




3. 의미 

 



이 이야기는 몇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첫째, 큰 잔치를 배설했다(15)는 것은 유대인들의 메시야 대망 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이 세상에 강림하실 때 제일 큰 잔치를 베푸실 것이라 믿었습니다. 이때 이방인들이나 죄인들은 그 잔치에 참여할 수 없고 오직 유대인들만 잔치에 참여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주님이 큰 잔치의 비유를 꺼내신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다만 주님은 오직 유대인들만 이 잔치에 참여한다는 잘못된 믿음을 바로잡아 줄 필요가 생긴 것입니다. 한편, 이것을 계시록에서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19:9)




둘째, 잔치에 참여하라는 초청을 거절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복음을 듣고도 거절하는 자들이 많음을 단적으로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전도함에 있어서 거부하는 자들로 인해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녀가 아니라면 당연히 복음을 거부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속적으로 그가 끝까지 거부할 것을 안다고 해도 그를 사랑하며 그를 주님에게로 인도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정도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일상생활을 방해하거나 귀찮게 하는 정도로 전도하는 행위는 삼가야 합니다. 전도에도 지혜가 필요합니다.




셋째, 거절하는 자들에 대해 주님이 노하시고 있습니다(21). 자칫 이것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마치 속 좁은 주님인 것처럼 오해하게 됩니다. 이것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유대인들의 풍습에 관해 사전 지식이 필요합니다. 유대인들은 잔치를 열기 전에 미리 날자를 정한 다음 종을 보내어 사람들에게 참석 여부를 묻습니다. 그리고 참석자 수에 맞추어 준비를 마친 다음 마지막으로 참석을 승낙한 손님들에게 다시 종을 보내 참석을 권합니다. 이것은 손님에 대한 극진한 예를 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가피한 이유가 아니고선 불참하는 일은 상당히 결례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화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참석을 하겠다고 사전 약속을 한 사람들임에도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며 불참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도의상으로 용납되지 못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주인의 입장에서 노함을 표시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22:7에는 노한 임금이 군대를 보내어 종들을 모욕하고 살인한 자들을 진멸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넷째, 잔치의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오겠다고 한 사람들이 오지 않게 된 것은 많은 차질이 벌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준비한 음식이 남아돌고 자리가 비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다른 방편을 사용합니다. 종들에게 길에 나가 만나는 사람들을 데리고 오라고 명령합니다. 이것은 주인 집 인그니지역의 길을 말합니다. 그래도 자리가 남자 이번에는 시내로 나가 거리와 골목에서 만나는 사람들 및 심지어 산골마을에 가서라도 데리고 오라고 명령합니다.(여기서 시내의 거리는 다양한 사람들이 다니는 것을 상징하고, 골목은 소외된 사람들이 다니는 곳을 말하고 산울타리 가는 유대인 마을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이방인 마을을 상징합니다.) 이들은 사전에 초청 대상이 아니었던 사람들입니다. 주인이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은 어차피 준비한 음식들을 사람들과 나누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잔치의 음식을 먹고 즐기는 사람들의 대상만 달라졌을 뿐입니다. 뜻밖에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은 횡재를 하였습니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잔치가 벌어지고 마음껏 값없이 즐기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이들이 기쁘고 행복했겠습니까?




다섯째, 대신에 예의를 저버린 기존 초청자들을 향해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24)고 선언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배척한 유대인들이 받을 심판이 얼마나 엄중하고 가혹한 것인가를 의미합니다. 주님의 초청을 거절한 자들에 대한 심판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작정하심에 따라 시행됩니다. 물론 모든 유대인들이 이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로부터 하늘나라 복음으로의 초청을 받고서도 거절한 결과 예루살렘 멸망(주후 70)이라는 민족적 수치와 징계를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 중에도 예수님의 재림 앞에 회개하고 하나님에게로 돌아올 자들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에 대해 이렇게 해설했습니다.




그런즉 이와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11:5)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11:24)




한편, 오늘의 이 예화는 마 22장의 기록과 거의 일치합니다. 다만 마태복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청함을 받은 자는 많지만 택함을 받은 자가 적다는 것을 강조하지만(22:14) 누가복음은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심판의 대상이 됨을 강조합니다(24). 그러므로 비슷하지만 강조점이 다른 이 두 개의 비유는 서로 다른 상황에서 주어진 별개의 비유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비유들을 통해 인간이 구원을 얻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 의한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뒤늦게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은 참으로 값없는 주인의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잔치에 참석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상상치 못한 사람들입니다. 길을 걷다가, 거리를 배회하다가 골목에서 구걸을 하다가 이방인 마을 어귀에서 유대인 마을을 기웃거디라가 갑자기 잔치 참여를 초청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오직 주인의 은혜를 입은 결과입니다. 아무런 자격도 없는 사람들을 초청한 것은 오직 주인의 결정에 따른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하나님의 주권적인 택함을 이렇게 해설했습니다.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이 혀익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9:13-15)




4. 결어




오늘 말씀을 통해 세 가지 교훈을 듣습니다.




첫째,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는 이미 영원한 하늘나라의 잔치에 초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잔치에 참여할 아무런 자격이 없던 사람들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이방인들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복음의 은혜가 미친 것은 이스라엘이 넘어졌기 때문이라 말합니다(11:11-12). 그 빈 자리에 우리가 채워진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이스라엘로 하여금 시기를 불러일으키게 하시고 결국 전 이스라엘이 구원에 이르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구원의 신비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다 헤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고 노래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그저 감사하는 일입니다. 무조건 감사하세요. 죽었던 자가 다시 살림을 받았는데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은혜를 받은 자는 은혜를 베푼 자에게 무조건 감사하면 됩니다. 더욱이 우리는 은혜를 갚을 능력조차 없는 사람들입니다. 잔치에 참석한 자들은 헐벗고 가난하고 연약한 자들입니다. 그들이 무슨 수로 주인에게 은혜를 갚겠습니까? 오직 할 일은 감사하는 일입니다. 그 마음을 평생토록 잊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둘째, 오늘 비유를 통해 우리는 새로운 이스라엘 공동체의 특성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공동체입니다. 이 새로운 공동체가 앞으로 영원히 존속될 것입니다. 바울은 갈 3:28에서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갈파했습니다. 즉 공동체를 선포하면서 이 공동체의 제일된 의무는 하나되는 것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는 교회공동체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공동체는 주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은 니편 내편으로 나누어 싸웁니다. 고린도교회가 바울로부터 책망을 들은 것은 니편 내편으로 나워 서로 자기 주장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서는 다른 목소리가 나오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신본주의는 철저히 주님독재주의입니다. 교회공동체는 민주주의로 운영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자 법이요 명령인 성경을 기준으로 삼아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판단하고 성경이 옳다 하면 옳다 해야 하고 성경이 그르다 하면 그르다고 말해야 합니다. 여기에 자신의 사상적 이념과 정치적 견해와 자기 입장을 주장하는 일은 모두 하나님의 뜻에 배치되는 세상적인 가치관들입니다. 늘 세 가지 중심을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중심 성경중심 교회중심입니다.




셋째, 성경 주석가인 헨드릭슨은 오늘 큰 잔치의 비유의 중심 교훈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초청에 지금 당장 응하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저는 순종에 비유하여 여러분에게 하나님에게 즉각 순종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순종은 잠시 생각하고 판단하고 이것저것 유불리를 따져보고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과 명령이 명확한 것이라면, 확실히 성경적인 것이라면 즉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인생에서 스스로 순종하고 사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순종을 방해하는 요소가 얼마나 많은 가를 인정합니다. 그중에서 우리는 순종의 제1 대적이 바로 내 생각혹은 나의 뜻과 계획나의 가치관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무리 주님 말씀을 들어도 자신이 정한 뜻과 계획을 바꾸지 않고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주님을 위하는 일이라고 스스로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무엇을 선택하기 전에 그 기준이 어디에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과연 나의 생각과 판단과 선택이 성경적인가를 따져보아야 합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렸듯이 잘못된 선택이 가져오는 결과적 비참을 맞이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을 통해 감사와 일치와 순종의 세 가지 교훈을 가지고 한 주간도 승리의 삶을 사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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