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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주차. <사마리아여행> 누가 탕자입니까?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9. 10. 17.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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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주차. <사마리아여행> 누가 탕자입니까?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11),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12),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13),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14).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15)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16).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17).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18),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19),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20),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21),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22). 그리고 살지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23).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24).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25),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26),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되므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27),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28),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29),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이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30).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31),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32)(15:11~32)






디아트리베- 부모의 속박과 자녀의 자유




시대마다 갈등들이 있습니다. 요즘 시대는 신구 세대 간 갈등이 극심한 것이 특징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센세대들 사이에도 세대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70년대를 기준으로 그 이전 세대를 베이비 붐 세대라 부르고, 70년대 이후는 X세대이고, 80년대 이후, 즉 베이비붐 세대, 일명 맞벌이 부부가 낳은 세대가 바로 밀레니얼 세대입니다. 어쨌든 신세대들의 특징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며 기존의 가치관이나 주장들을 거부하는 경향이 뚜렷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참견하는 기성 세대들을 꼰대라 말합니다. 사전에서 꼰대란 남보다 서열이나 신분이 높다고 여기고 자기가 옳다는 생각으로 남에게 충고하거나, 또 남을 무시하고 멸시하고 등한시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자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꼰대는 본인의 과거 경험에 비춰 현재를 마음대로 판단하는 늙은이를 은어적으로 비꼬는 용어입니다. 특히 90년대생들은 이 꼰대에 대한 저항의식이 매우 강한 세대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꼰대를 아무 것도 모르면서 잔소리만 하는 뒷방 늙은이로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90년생이 온다>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될 정도입니다.




알다시피 한국은 1960년대 이후 세계 평균 경제성장률을 훨씬 웃도는 고도성장을 이룩했습니다. 여기에 대기업의 활약과 성장은 많은 청춘들에게 일터를 제공하였고 평사원에게도 성공신화를 꿈꿀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함으로서 신화의 산실이 되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한국사회는 상당히 발전되고 안정된 세상을 일구며 신흥개발국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아 왔습니다.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 즉 IMF사태를 겪으면서 한국사회의 성장 에스컬레이트는 멈추었고 이제 청춘들은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을 보장받을 수 없는 경쟁의 정글속으로 던져졌습니다. 기업의 취업문은 굳게 닫혔습니다. 그러다보니 많은 청춘들은 대학을 졸업하고도 다시 공무원 시험을 치루기 위해 다시 공부를 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들을 이른바 공시생이라 부릅니다. 2017년 한 해 9급 공채시험에 역대 최대인 228368명이 몰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합격률은 1.8%라 합니다. 즉 공시생 100명 중 최종 합격자는 약 2명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98명은 어찌 되는 것입니까? 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이듬 해에 있을 공무원 시험을 다시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런 공시생이 날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들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손실도 만만치 않습니다. 먼저 경제적 손실로 치면 연간 약 17조원에 달하고 사라진 생산효과는 15조이고 줄어든 소비효과는 16800억원이라 합니다.



그야말로 한국의 젊은이들 사회는 적자생존이요 약육강식이요 정글속의 아비규환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꼰대들의 간섭과 지적질과 헛된 충고들이 이들의 가슴읗 후벼파고 멍들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충고 아닌 충고의 말이 무어냐 하면 기회는 공정하고 반드시 나에게도 찾아온다는 말이랍니다. 청춘들은 기회는 쟁취하는 것이지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온몸으로 터득한 세대입니다. 한국의 청춘들에게 기회는 가진 자들의 전유물이라는 인식이 팽배합니다.



요즘 조국 사태를 바라보는 청년들은 기회를 독점하는 부유층과 권력층과 기득권층에 대한 분노를 표시합니다. 이들의 분노는 사회의 상식선이 무너지고 기준이 무시되고 합의가 무산되고 불공정이 일상화되는 사회에 대한 분노입니다. 그러므로 조국사태가 던지는 위험은 불법이냐 아니냐 하는 평면적인 것에 있지 않습니다. 진짜 무서운 일은 이로 인해 사회의 건전한 규범과 적정선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기회의 평등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아무도 악행과 범죄와 비도덕적 일에 대해 양심 운운하며 그 책임을 묻을 수 없는 아비규환의 사회가 도래하는 일입니다. 이로 인해 철저히 정치적 이념과 경제적 격차와 권력의 차등과 세대간 갈등과 남녀의 성적 대결과 혐오와 비혐오의 투쟁 등으로 우리 사회의 혼란은 극심해 질 것입니다. 그래서 <90년생이 온다>의 저자 임홍택은 이 사회를 유리계단이라 부릅니다. 그만큼 깨어지기 쉬운 위험한 사회임을 알리는 것입니다.




이런 마당에 우리 자녀들의 앞날이 심히 걱정됩니다. 기성 세대들의 책무는 우리 자녀들에게 안정된 삶의 공간과 환경을 제공하고 그들에게 삶의 희망을 주는 것일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자녀들을 잘 키우고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 우리 자녀들을 믿음 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립과 책임과 소망과 사랑의 능력을 배양해야 할 책무가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여 사회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갈수록 세속화되는 사회에 물들어 주의 자녀들이 교회의 영향을 벗어나 타락의 길로 들어설 가능성은 언제든지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오늘 들려주시는 탕자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절실한 신앙과 삶의 교훈으로 다가설 것입니다.



오늘 저는 이 본문을 두고 하나의 질문을 던지면서 이야기를 진행할까 합니다.

누가 탕자입니까?




2. 탕자의 비유



오늘 이야기는 하나의 드라마처럼 펼쳐집니다. 그래서 좀 더 리얼하게 진행하기 위해 연극처럼 총 4막으로 구성하여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1(11-13)




한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맏 아들은 아버지께 순종하는 효자입니다. 그러나 둘째아들은 부모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했습니다. 둘째 아들은 부모로부터 멀리 떠나 혼자가 되면 그가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마음껏 자유를 누릴 것이라 생각햇습니다. 그런데 소원을 이루려면 돈이 필요했습니다. 둘째 아들은 어떻게 하면 아버지의 돈을 가질 수 있을까 하고 머리를 굴렸습니다. 어쩌면 그는 신 21:15~17의 법에 대해 우연이든 학습을 통해서든 그 내용을 알고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어떤 사람이 두 아내를 두었는데 하나는 사랑을 받고 하나는 미움을 받다가 그 사랑을 받는 자와 미움을 받는 자가 둘 다 아들을 낳았다 하자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이 장자이면, 자기의 소유를 그의 아들들에게 기업으로 나누는 날에 그 사랑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삼아 그 사랑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삼아 참 장자 곧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보다 앞세우지 말고, 반드시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인정하여 자기의 소유에서 그에게는 두 몫을 줄 것이니 그는 자기의 기력의 시작이라 장자의 권리가 그에게 있음이라



물론 이 구절은 재산상속에 관한 규정이긴 하지만 장자에게 물려줄 유산에 대한 규정으로 둘째 아들에게 해당되는 규정이 아닙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 규정을 들고 와선 아버지를 졸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얼토당토 않는 억지 논리를 들어 아버지에게 자기 유산을 나누어 달라고 했을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이미 자신은 장자가 아니므로 형님에게 두 배를 주고 나머지는 자신에게 미리 달라고 했을 것입니다. 원래 유산은 아버지가 죽은 후에 받는 것인데 이 둘째는 아버지가 멀쩡히 살아 있는데도 달라고 조르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처음에 그런 법이 없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약아 빠진 사람의 잔머리는 이런 일에 매우 영리하고 치밀하게 돌아갑니다. 대개 사기꾼의 수법이기도 합니다. 작은 아들은 이런 사례가 있었는지 조사했을 것입니다. 그러다 드디어 이 사례를 보고 무릎을 쳤을 것입니다. 25장으로 갑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자기의 모든 소유를 주었고 자기 서자들에게도 재산을 주어 자기 생전에 그들로 하여금 아지 아들 이삭을 떠나 동방 곧 동쪽 땅으로 가게 하였더라.”(5-6)




둘째는 이 구절을 근거로 아버지에게 아브라함 할아버지도 생전에 자식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지 않았느냐고 떠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둘째의 이 주장은 터무니없는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이어지는 구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재산을 나누어 준 이 시기는 아브라함이 죽기 바로 직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향년이 175세라. 그의 나이가 높고 늙어서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7-8)



그런데 오늘의 주인공인 이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멀쩡히 살아있고 건강한데도 재산을 미리 나누어 달라는 것입니다. 이런 자식을 둔 부모는 참 가슴이 쓰릴 것입니다. 그래서 효자가 복입니다. 불효자는 부모를 슬프게 합니다. 부모에게 불순종하고 무례하게 굽니다. 그럼에도 조금도 미안하거나 물러섬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아버지는 둘째 아들의 요청을 수락하였습니다. 결국 재산의 1/3을 현금으로 바꾸어 둘째 아들에게 주었고 2/3는 맏 아들을 위해 남겨 두었습니다. 물론 맏아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자신의 몫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실제로 소유하지도 않았습니다.




13절을 보세요. 유산을 손에 쥔 작은 아들이 어떻게 행동합니까? 그는 며칠이 안 되어 돈을 전부 가지고 먼 나라로 떠납니다. 실제로 교회사 사료에 따르면 아주 많은 유대인들이 자기 나라를 떠나 이국 당으로 이주했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에 남아 있는 유대인들은 약 50만명인데 비해 여러 지역으로 디아스포라 한 수는 약 400만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과 오늘 작은 아들의 차이는 디아스포라는 온 가족이 전부 다 이주하는 것이지만 이 둘째 아들은 가족을 버리고 혼자 떠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이 아들이 떠난 곳이 먼 나라임을 유의합니다. 둘째는 되도록 갈수 있는 한 최대한 멀리 간 것입니다. 이 행동은 두 가지 사실을 의미합니다. 하나는 아버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살겠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더 이상 가족과 인연을 맺고 살지 않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행동을 보면서 우리는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최대한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겠다고 한 요나가 떠오르지 않습니까?




2(14~19)




이제 객지에서의 생활이 그려집니다. 둘째 아들의 형편이 어떻게 변했습니까? 아마 그는 방탕한 삶을 즐기느라 돈을 아무 계획도 없이 마구 소비했을 것입니다. 이런 일을 보면 어릴 때부터 돈에 대한 정직과 절제와 검소한 삶을 가르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게 됩니다. 한 사람의 경제활동과 삶의 질은 정확히 비례합니다. 수입이 없으면 비참한 인생이 됩니다. 수입보다 지출이 많으면 고통이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바른 경제활동은 수입을 늘리고 지출을 줄이는 것입니다. 지출을 줄이기 위해선 절제의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좋은 것을 누리고 싶은 마음을 억제하고 유혹을 견디는 훈련을 어릴 때부터 쌓아야 합니다. 이런 훈련을 받지 못하고 자란 자식은 거의 실패한 인생을 살게 마련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둘째 아들은 조만간에 모든 돈을 탕진했습니다. 그의 모든 것은 돈에 달렸는데 돈이 사라지자 그는 즉시 악화된 환경속으로 휘말려 들어갔습니다. 돈이 없으니 먹을 것을 사지도 못합니다. 돈이 떨어지니 지낼 곳도 마땅치 않게 됩니다. 설살가상으로 그가 사는 곳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온 나라가 위기에 처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때엔 모두 자기 살기에 바빠 다른 사람들로부터 어떤 도움도 기대하지 못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겐 최악의 세월이 닥친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어쩌다 한 사람을 만나 취직을 하게 됩니다(15). 그는 들에서 그 사람의 돼지를 치는 일을 맡았습니다. 유대인이 불결한 동물인 돼지(11:7)를 친다는 것은 가장 모욕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사흘 굶고 도둑 아닌 사람없다는 속담처럼 이 아들은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못됩니다. 16절에 보니 일을 해도 열악한 임금을 받는 조건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이 임금으로는 충분히 먹지도 못할 처지였는지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얻어 먹고자 했습니다. 쥐엄 열매는 나무에 뿔 같이 생긴 꼬투리인데 돼지들이 잘 먹는 열매로 사람들이 극한 상황이 아니라면 입에 대지도 않는 열매입니다. 그러나 그것마저 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굴욕에 배고픔까지 더하였습니다. 젊은 나이에 겪는 배고픔을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은 잘 실감하지 못할 겁니다. 한창일 때엔 항상 배가 고픕니다. 먹고 일어서면 배가 고픈 시절입니다. 이럴 때 무엇이든 잘 먹습니다

 



사람은 타지에 살다가 처지가 궁하면 고향을 그리워합니다. 17절을 보니 둘째 아들은 드디어 아버지 집을 생각하며 신세 한탄을 합니다. 여기서 스스로 돌이켜는 원문으로는 그가 그 자신에게로 돌아왔을 때라는 뜻입니다. 즉 그가 집을 떠나 온 후 일어났던 모든 것과 그가 당하고 있는 일에 대하여 아마도 그 자신에게 책임이 있음을 곰곰이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말로 하면 철이 들기 시작했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것입니다. 고생이 꼭 좋은 일은 아니지만 고생에서 얻는 삶의 교훈 또한 귀한 것입니다. 아들은 아마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인생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과 아버지 집에 거한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를 뒤늦게 느끼고 깨달은 것입니다. 동시에 자신의 현재 처지가 아버지 집의 품꾼보다 못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품꾼이란 단어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근동지역에서는 선생이나 기술자는 고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인을 고용하지도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품꾼은 소위 말하는 날품팔이꾼을 말합니다. 요즘 말로 일용직입니다. 둘째 아들은 자기 신세가 아버지 집에 고용된 일용직 일꾼들도 풍족하게 먹고 지내는데 그에 비해 주려서 죽어가는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고 불쌍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서는 한 사람도 주려 죽는 사람 없이 모든 사람이 풍족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제 둘째 아들의 선택은 유일하게 하나 남았습니다. 모든 죄인이 자신의 위기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오직 하나님에게로 돌아가야 하듯이 이 둘째 아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이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부르신다는 것은 그를 다른 상황, 다른 존재로 바꾸어 새로 만드시겠다는 선언이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죄인은 하나님이 부르실 때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하나님에게로 달려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물으시면 대답부터 빨리 해야 합니다. 대답을 잘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총애를 받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집니다. 윗사람이 부르면 -’하고 대답하고 반응하는 아랫 사람이 사랑을 받고 인정을 받고 혜택을 받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그랬습니다. 주님께서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하시자 이사야는 즉각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하였습니다.(6:8). 예수님의 제자들도 부르심에 즉각 응답했습니다. 베드로는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즉시 주님을 따랐습니다. 이렇게 주의 제자는 부르심에 재빠르게 반응하는 사람이고 언제든지 부르심을 듣고 행동에 옮길 준비를 하는 사람입니다.




18절을 보세요. 둘째는 체면이고 뭐고 관계없이 무조건 아버지에게로 돌아갑니다. 여기서 보면 아버지가 직접 그를 부르셨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부르심의 사역에는 외적으로 직접 목소리를 듣고 반응하는 외적 소명과 마음으로 느끼는 내적 소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적 가난과 배고픔과 굴욕감과 절망적인 상황을 통해 이 둘째 아들을 부르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돌아와 이렇게 고백합니다. 18절 하반과 19절의 내용입니다. 그 고백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자신을 아들로 여기지 말고 품꾼의 하나로 취급해도 무방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아들이 자신이 저지른 행위를 단순히 실수나 잘못으로 여기지 않고 라고 여겼다는 점을 주목합니다. 이것이 바로 둘째 아들의 변화를 짐작케 하는 대목입니다. 돈 밖에 몰랐던 타락의 아이콘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태도로 변모한 것은 놀라운 성령님의 감화감동과 은혜의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한 사람의 죄인이 진실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3(20~23)




둘째 아들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20절에 보니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금방 아들을 알아보고 그를 측은히 여기고 달겨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아들이 돌아오는 날을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타이밍이 맞아 떨어질 수 있습니까? 이것은 오직 하나의 이유로만 설명이 가능합니다. 아버지는 매일같이 마을 어귀를 바라보며 둘째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특히 유대인의 관습에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향해 뛰어가는 것은 품위 없는 행동으로 질책을 받는 일임에도 아버지는 그런 겉치레 따위는 무시하고 아들에게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는 것은 아들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에 아들은 아버지의 이 사랑을 감당치 못하겠다고 고백합니다(21). 그러자 아버지는 오히려 집안의 종들로 하여금 제일 좋은 옷과 가락지와 신발을 입혀 주도록 합니다(22). 그뿐 아닙니다. 아들의 귀환을 축하하는 뜻에서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입니다(23). 아버지는 기쁨에 겨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아들을 새로 얻었다”(24)고 즐거워 합니다.



여기서 제일 좋은 옷은 중요한 행사 때 입는 예복입니다. 가락지는 주인의 권위를 나타내는 인장반지로서 그것을 주었다는 것은 아들에게 아버지의 권위를 위임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신은 당시 오직 자유민이 신을 수 있는 것으로 아들의 지위가 남의 종의 신분에서 회복되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우리 하나님은 구속받은 모든 성도들에게도 제일 좋은 옷과 가락지와 신발을 입혀 주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후 하나님이 베푸시는 천국 잔치에 들어갈 때 입어야 하는 하늘나라 예복을 이미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내주하시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인쳐조셨습니다. 나아가 어디를 가든지 복음의 신을 신고 다니며 사단 마귀가 쳐 놓은 그물과 가시에 찔리지 않도록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4(24~32)



이제 잔치가 무르익었습니다. 무대에 갑자기 맏아들이 등장합니다. 맏아들은 놀다가 집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25절을 보니 밭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집에서 풍악에 더불어 춤추는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이에 한 종에게 무슨 일인가 하고 물었더니(26), 그 종이 답하기를 당신 동생이 돌아와서 살진 송아지도 잡고 잔치를 한다”(27)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맏아들은 순간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느꼈습니다(28). 이런 경우 대개 사람들은 뒷목을 잡고 고통스러워 합니다. 28절의 노하다라는 헬라어 단어는 오르기조인데 이것은 굉장한 분노를 나타낼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가령, 18:34를 보면, 빚읕 탕감받은 종이 주인의 은혜를 무시하고 다른사람에게 악한 짓을 하자 주인이 크게 노하여 그 종을 감옥에 집어넣습니다. 이 분노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11:18절에는 이방들이 주의 진노를 무시하고 심판을 두려워 하지 않고 오히려 주께 대해 격노하는 상태를 두고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맏아들이 얼마나 화가 났으면 아예 집안으로 들어가지도 않으려 합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맏아들을 달래야만 했습니다(28).




그러나 맏아들의 분노는 쉽게 풀리지 않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항의합니다. 자기는 평생 동안 아버지의 명을 어김이 없이 순종했지만 아버지는 한 번도 이런 잔치를 나를 위해 베풀어주신 적이 없지 않느냐(29), 그런데 창녀하고 뒹굴다 모든 재산을 탕진한 이 녀석이 돌아왔다고 잔치를 벌이는 것이 말이 되느냐(30)는 것입니다.




우리는 맏아들의 항변이 매우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맏아들에겐 결정적인 하자가 숨어 있습니다.

~ 첫째, 29절에서 그는 자신이 평생 동안 아버지를 섬겼다고 말했습니다. 이 단어는 둘류오인데 이는 종처럼 섬겼다는 뜻으로 영적으로 그는 자발적인 기쁨에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섬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맏아들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영적인 자녀라는 확신이 있었을까요?

~ 둘째, 30절에서 그는 동생을 향해 이 아들이라 한 표현은 그는 동생이 아니라 죄인과 같은 사람이라는 경멸이 포함되었습니다. 그리고 적어도 자신은 동생처럼 타락한 사람이 아니라 열심히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는 자임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맏아들이야말로 바리새인이요 서기관과 다를 바 없는 사람입니다.


~ 셋째, 그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의 불평에 대해 아버지는 31절에서 내 것이 다 네 것이다고 선언합니다. 맏아들이 이것을 알았다면 동생을 위해 그깟 송아지 한 마리 잡아 잔치하는 일을 아까워하고 섭섭해 하고 인색하게 굴 필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맏아들은 지금 아버지에게 속한 모든 재산을 다 상속받을 것인데 조금이라도 넉넉한 마음이 있었다면 이런 불평보다 아버지에게 왜 한 마리만 잡았느냐며 오히려 한 마리 더 잡자고 해야 할 것입니다. 적어도 이 정도 넉넉한 마음을 가져야 장자로서의 자격과 품격과 아량과 인품을 자랑할만 한 것입니다.




3. 기뻐하라(32)




하나님의 속성 중에서 우리와 가장 비슷한 속성이 있다면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하고 슬퍼할 때 함께 슬퍼하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아버지는 맏아들에게 이 당연한 도리를 가르칩니다. 아들을 다시 얻은 기쁨을 어찌 숨길 수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기뻐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맏아들의 태도와 바리새인들을 비교해보면 둘은 매우 흡사하다는 것입니다. 돌아온 동생을 환영하는 잔치에 참여를 거부하며 화를 내는 맏아들의 모습은 예수께서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자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윽 같이 먹는다며(2) 예수를 비판하던 바리새인들의 모습입니다. 이는 곧 저들의 영적 교만과 편협한 아량,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지식으로만 알고 다른 사람의 허물과 죄를 용서할 줄 모르는 특권의식들을 지적하며 진정한 하남의 사랑은 죄인을 용서하는 것임을 분명히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가끔 우리 주변에서 오해와 편견으로 인해 이단 시비에 휘말렸거나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던 개인이나 교회, 단체 등이 거론됩니다. 이 가운데는 준엄하게 정죄를 해야 하는 이단도 있지만 정말 억울하게 이단성의 의심을 받아 곤혹을 치루는 사례도 부지기수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이 이단혐의를 벗고 다시 정통교회의 품으로 돌아오는 길이 전무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법과 규례에서 이단혐의를 벗는 절차와 과정들이 규정되어 있지만 그 모든 과정과 절차와 필요한 서류와 요구 조건들을 다 충족해도 한 번 이단이면 영원히 이단으로 매도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정말 우리가 잊지 말고 살아야 하는 것은 바울의 고백처럼 내가 이 모든 죄인들 중에 가장 큰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이 큰 죄인의식은 오늘 설교 제목처럼 누가 탕자입니까?”하는 물음에 대한 하나의 답변이 됩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바로 가장 큰 탕자입니다. 내가 가장 부그러운 탕자입니다이 고백이 우리를 교만의 자리에서 내려와 겸손의 자리로 이끌어 갈 것이라 확신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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