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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주차. <사마리아여행> 죄인 한 사람의 회개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9. 10. 17.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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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주차. <사마리아여행> 죄인 한 사람의 회개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1),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 도다 하더라(2).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3),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4).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5),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 내었노라 하리라(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니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 하리라(7).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8),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9).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기쁨이 되느니라(10) (15:1~10)






회개하라




기독교 신앙에서 제일 중요한 단어 하나를 꼽으라면 회개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범죄 이후 당신의 나라를 이 세상에 세우고자 하시면서 이 나라의 백성들은 반드시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가지고 회개를 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첫 관문은 회개라는 문이고 이 회개의 문을 여는 열쇠가 바로 믿음입니다.




성경을 보세요.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의 회개를 간절히 원하시는 가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범죄한 이스라엘을 향해 회개하여 하나님에게 돌아오라고 말씀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예레미야와 에스겔 선지자 같은 이들은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백성들의 회개를 간절히 호소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 네가 만일 나의 목전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고 네가 흔들리지 아니하며 진실과 공의로 여호와의 삶을 두고 맹세하면 나라들이 나로 말미암아 스스로 복을 빌며 나로 말미암아 자랑하리라“(4:1-2)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살게 하리라“(7:3)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할지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즉 그것이 너희에게 죄악의 걸림돌이 되지 아니하리라“(18:30)



인자야 탄식하되 너는 허리가 끊어지듯 탄식하라 그들의 목전에서 슬피 탄식하라“(21:6)



이러한 요청에 대해 간혹 이스라엘 백성들은 의식적인 행동을 통해 회개를 입증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금식을 한다든지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통곡하는 행위들을 통해 하나님 앞에 자신들의 회개를 증명해 보였습니다. 이럴 때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악을 용서해 주시거나 형벌을 감해 주시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다시 새로운 관계를 맺고 하나님과 동행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신약시대에 이르러서도 회개의 요청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3;2). 예수님도 회개를 선포하셨고(4:17), 초대교회의 모든 복음 전파는 회개를 요청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3:19).



그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3:1-2)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4:17)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3:19)






2. 두 개의 비유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새로운 장소로 이동한 것 같습니다. 여기서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1절의 죄인들과 세리들이 한 부류요 2절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또 하나의 부류입니다. 이들은 주님 앞에 모여 있지만 모인 목적이 전혀 다른 사람들입니다.



처음 부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일반 사람들 사이에서 그리 평판이 좋지 않은 세리들과 죄인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에 더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세리들은 로마의 관원들인데 그들의 주요 업무는 백성들로부터 할당된 세금을 징수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들이 거두는 세금의 종류가 많았습니다. 주로 인두세가 있었고, 그 외 토지세와 통행세도 징수했습니다. 로마당국은 이런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 각 지방마다 감찰관들을 파견하였는데 이들은 자신의 업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수하에 세금징수원을 고용했습니다. 마태는 가버나움 세관에 고용된 세금징수원이었습니다. 19:2에 등장하는 삭개오라는 인물은 여리고의 세리장이었습니다. 그는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가 예수님을 보고자 했다가 예수님에 의해 발견되고 주님을 즉시 영접하게 됩니다. 예나 저나 세금 내는 일을 좋게 여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세리는 백성들에게 인기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세리들을 죄인과 이방인과 같이 부정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과 달리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차별을 두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사회적 약자나 병자들, 심지어 죄인들을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죄인들은 누구를 가리키는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죄인들은 감옥에 있어야 하는 것이 상례적인데 지금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죄인이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고 여긴 사람들 전부를 일컫는 것이거나 혹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 의해 죄인으로 취급받아 백성들로부터 따돌림을 받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왔다는 것은 예수님이 의인을 구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두 번재 부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로서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온 것이 아니라 책을 잡으로 온 사람들입니다. 말씀을 듣지 않는다는 것은 이들이 수군거렸다”(2)는 말에서 유추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전하시는 말씀을 진지하게 경청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서 수군거릴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의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선 관심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은 예수님의 어떤 행동이 율법을 위반하는지, 안하는지에 있습니다. 이것이 악인들의 특징입니다. 악인들은 자신의 잘못에는 눈을 감고 남의 잘못을 들추어 내는 사람입니다. 어느 곳에서나 자기를 드러내고 자신의 생각과 주장과 의견을 옳다 여기고 자기의를 자랑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눈 안에 있는 들보보다 남의 눈에 티를 말하는 작자들입니다. 악인의 목적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괴롭히고 하나님 나라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절대로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고 극구 반박해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공중 권세 잡은 자의 수하에 있는 자로서 그 일에 가담하고 있음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할 뿐입니다.




이런 두 부류를 앞에 두고 예수님은 자칭 율법 전문가요 의인이라 자부하는 자들을 염두하면서 하나님의 관심은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통회하는 사람들의 편이라는 것을 가르치고자 오늘 두 가지 비유의 말씀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비유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잃어버린 것이 양 한 마리와 한 드라크마에 불과하지만 주인은 그것을 찾기 위해 모든 노력과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 한 마디로 하나님은 영원 전에 스스로 택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을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구원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마지막 기도를 통해 이 점을 더욱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 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17:12)




추가적으로 여기서 특별히 살펴볼 것이 있습니다. 먼저 양 아흔 아홉 마리한 마리의 대비입니다. 99마리는 한 마디로 하나님 곁에 안연히 거하고 있는 모든 성도들을 지칭합니다. 그리고 1 마리는 죄악 가운데 방황하고 있는 죄인 하나를 지칭합니다. 세상적 가치관으로는 1마리보다 99마리의 가치과 더 많고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가치에서는 1마리나 99마리나 동일한 가치를 지닌 존재로서 중요한 것은 그 값어치가 아니라 그가 어느 곳에 있느냐 하는 것이 이 이야기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1마리든 99마리든 그가 있어야 할 곳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1 마리가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관점에서 당연히 99마리는 있을 곳에 있으므로 논외로 치고 최우선적으로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얼른 찾아 자기 집으로 데려오는 것이 급선무임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어 나오는 드라크마 이야기도 같은 맥락으로 보면 됩니다.




이 비유를 통해 우리가 깨닫는 것은 이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99마리의 값이 더 많다는 관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에 있느냐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 나무 아래로 숨었을 때 하나님은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숨어버린 아담을 다시 찾아와 죄에 대한 책임을 물으시고 벌을 내리셨지만 결국엔 그에게 즉각적이고 영원한 죽음의 형벌을 시행하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의 길이 열릴 때까지 그 형벌을 유보하신 것입니다.이 놀라운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사랑의 은혜를 어찌 우리가 말로 다 할 수 있겠습니까?




3. 결어




사전적으로 회개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단순히 후회하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이때 구약성경에서는 나함으로 신약성경에서는 메타멜로마이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사람에겐 양심이라는 장치가 있어서 잘못을 범하거나 범죄하면 마음에 후회가 듭니다. 만약에 잘못을 짓고도 후회하지 않고 반성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을 일러 양심에 화인을 맞았다고 하는 겁니다. 갈수록 우리 사회에 이런 부류가 늘고 있는 것은 사람의 패악함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지독하고 가증스러운 것인지를 알게 합니다.



다음으로 좀 더 적극적인 의미로서 하나님의 심판을 두러워 한 나머지 완전히 지난 날의 죄악된 행동을 버리거나 마음을 고쳐먹은 상태를 일컫는 경우로서 히브리어로는 슈브라 하고 헬라어로는 메타노에오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신앙적 의미에서 회개는 후자를 지칭한다고 보면 됩니다.




이를 토대로 참된 회개가 무엇이냐를 정리하면 참된 회개는 죄된 삶을 즉각 멈추고 하나님에게로 완전히 돌아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는 것을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 믿음을 선물로 주십니다. 바울 사도는 이 사실을 정확히 알고 믿는 자들이 회개하고 그리스도께로 나온다는 사실을 의도할 때 믿음‘(피스티스)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갈 3:23-25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다시 말해 회개는 믿음이 하는 일입니다. 이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만이 진정으로 회개하여 하나님에게로 돌아옵니다. 믿음이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합니다. 아무도 회개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라는 말은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 믿음을 선물로 받지 못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사는 수많은 불신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복음이 아닙니다. 그들은 세상살이에 푹 빠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마치 소꿉놀이에 빠진 아이가 밥 먹으러 집으로 돌아오라는 엄마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들도 어쩌다 복음의 초청을 받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기회를 가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유일한 관심은 오늘 예수님의 말슴을 책잡기 위해 모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교회의 잘못을 집어내기 위해, 목사의 설교 중 잘못된 부분을 끄집어 내어 고발하기 위해 눈을 뜨고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의무는 이런 사람들의 귀에 회개할 것을 요청하면서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라고 소리치는 것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유념해야 할 일은 회개를 요청하는 일은 점잖게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중하게 해야 하지만 분명하고 명확하게, 어떤 경우엔 매우 강하고 진지하게 요청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지금 낭떠러지 끝에 서서 불지옥으로 추락할 위기에 처한 사람을 상상해 보세요. 만약 그 사람이 당신의 피붙이라면 당신의 목소리가 어떻게 울려 퍼질까요? 분명히 당신은 앞뒤 가리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해 위험하다고 경고할 것입니다. 회개의 요청은 바로 이런 심정으로 하는 것입니다. 지금 당신의 주변을 둘러 보세요. 당신이 사랑하는 가족 중 한 사람이 불 속으로 뛰어들고 있습니다. 이 사람을 구원하는 1차적 책임이 당신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통해 이 사람을 구원하시고자 합니다. 영혼 구원을 이루는 한 주의 삶이 되기를 진심으로 권면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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