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주차 <사마리아여행> 돈에 대해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비웃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고 침입하느니라.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16:14~18)
“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19~21)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 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도매, 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내가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나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늑22~31)
“어떤 관리가 물어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쉬우니라 하시니, 듣는 자들이 이르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18:18~30)
세 개의 이야기
(오늘은 여러 개의 본문을 가지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주제는 하나인데 즉, 바른 재물관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이야기(16:14~18)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에 관한 것입니다. 앞서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더러 들으라고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가르침에 대해 바리새인들은 아마 거북해 했을 것이고 자존심도 상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반박하지 못하였습니다. 만일 그렇게 했더라면 스스로 돈을 쌓기에 여념이 없는 자로 자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그들은 고개를 돌리며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ESV 영어 성경은 이 단어를 ’ridiculed’라고 번역했는데 이것은 ‘의도적으로 조롱했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 상황을 정확히 꿰뚫어 보시고 이 위선자들의 가면을 벗기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치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에 따라 살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 앞에서 행세하는 자들이다. 하지만 너희 의는 허울뿐이다. 하나님께서 너희 마음을 아신다. 너희 신앙이 거짓이라는 것을 아신다. 왜냐하면 사람들 앞에서 칭찬을 받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미움을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교묘히 이용해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율법을 이용함은 율법의 길을 그대로 따라가지 않고 샛길로 가거나 우회하는 길을 택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먼저 마15:1-9을 보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주님의 제자들이 장로들의 전통을 범한다고 했을 때 주님은 “어찌하여 너희는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고 하시면서 그들이 부모를 공경한다고 하면서 부모를 비방하는 행위를 고발했습니다. 그리고 23:16-23을 보면, 십일조를 드린다는 것을 은근히 자랑하는 그들에 대해 주님은 율법의 더 중한 것은 ‘정의와 긍휼과 믿음’(23:23)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이런 바리새인들의 이중성을 두고 주님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선 옆으로 비껴 서거나 우회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 안으로 적극적으로 침투해 들어가야 함을 가르칩니다. 다시 말해, 율법의 일점일획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에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율법의 말씀을 적극적으로 신뢰하고 수용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16절에 있는 복음이 사람마다 침입하는 것이라고 하신 뜻입니다. 천국으로 가기 위해 다른 길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세우신 새로운 길, 영원한 생명의 길이 우리 앞에 놓였습니다. 그 길을 가는 것을 두려워 말고 주님을 신뢰하면서 힘써 가라는 뜻입니다. 비록 좁은 문이지만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힘쓰라”(13:24)고 이미 가르치셨습니다. 천국을 소망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땀을 흘립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바리새인들이 가장 우습게 여기고 경시하는 율법의 사례 하나를 꼬집어 그들에게 경종을 율립니다. 즉, 바리새인들의 형식적인 신앙을 다시 질타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결혼제도를 경시했습니다. 유대인들 사이에서 대표적인 바리새인이자 학자로 존중을 받는 ‘힐렐’이라는 유대인 선생도 아내가 만약 조금이라도 탄 음식을 남편에게 대접하면 아내를 버려도 된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또 AD 110년경의 ‘아키바’라는 랍비는 남편보다 더 훌륭한 아내가 있다면 버려도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부정한 이유없이(마5:32)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가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라 경고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은 바리생니들처럼 위선적이고 형식적이며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시도하는 모든 종류의 시도들은 하나님에 대한 진실된 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16:19~31)
이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로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전개하기 전에 알다시피 앞의 이야기와 아무런 연관 없이 예수님이 이런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면서 과연 앞의 처음 이야기와 어떤 연관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미 언급한 대로 15장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에 대한 옳지 못한 태도를 교훈한다면 16장은 재물을 불의하게 사용하는 사람들에 대해 교훈하시는 내용입니다. 그중 19~31절이 보여주는 비유는 사실상 이 둘이 결합된 클라이막스에 해당합니다. 그것은 사람이나 재물을 악하게 대한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경고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부자는 불의한 청지기의 지혜를 보고 감탄하고 그를 칭찬했지만 정작 자신은 재물을 가지고 친구를 사귀는 데 사용하기를 게을리 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15절) 바리새인과 동일한 부류입니다. 이런 사람과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여 부자가 되긴 했지만 10장에 등장하는 ‘선한 사마리아인’과는 정반대의 인물들입니다. 이제 두 번째 이야기를 보겠습니다. 이야기는 다시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생에서의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이고(19~22절), 다른 하나는 내세에서의 두 사람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부분(23~31절)입니다.
먼저 이생에서의 이야기입니다(19~22절).
~ 한 부자가 있는데 그는 날마다 호화호식하였습니다. 부자이니까 이런 일은 어쩌면 당연한 것입니다. 부유하게 산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로망입니다. 아브라함도 부자였고 요셉도 부자였습니다. 성경은 어디에서도 단지 부자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책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것은 아브라함과 요셉의 경우엔 부자이지만 그들이 날마자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연회를 즐겼다는 묘사는 없습니다. 당시에 옷에 물감을 들이는 일은 매우 고급진 일이고 비용도 많이 들어가는 일이었습니다. 특히 조개에서 추출하는 자색(Rotal Purple) 옷은 왕족들만 입는 옷이라는 점을 두고 볼 때 이 부자의 거만함이 얼마나 드센 것인가를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라면 십중팔구 열심히 노력해서 번 돈이 아니라 부정축재의 결과이거나 많은 유산을 상속받아 태어날 때부터 부자였던 사람일 것입니다. 이런 부류가 잘하는 일은 그저 뽐내고 거들먹거리고 호화 잔치를 벌이며 자신의 부를 자랑하는 일입니다. 심리학적으로 철저히 ‘자기애’에 갇힌 사람입니다. 한 마디로 정신적으로도 영적으로 매우 미숙한 영아에 해당하는 사람입니다.
~ 특히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대부분 돈이 얼마나 귀한 것인 줄 모릅니다. 왜 돈이 없어 가난하게 사는지 헤아리지 못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혐오합니다. 그들에게 인정을 베푸느니 집의 강아지에게 고기를 던져주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인정이라곤 눈꼽 만큼도 없는 사람입니다. 남들보다 재산이 훨씬 많으면서도 조금도 손해 보려 들지 않고 자신의 것을 꼬박꼬박 챙기는 사람입니다.
~ 이 부자 집 대문 앞에 한 거지가 누워 있었습니다. 그는 나사로라고 합니다. 왜 누워 있었습니까? 다리가 잘못되어 걸을 수 없었거나 아니면 배가 고파 일어설 기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저는 후자로 봅니다. 저도 배가 고팠던 시절이 있었기에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사로라는 이름의 뜻이 묘합니다. 이 이름은 ‘엘레아자르’라는 히브리어를 라틴어로 음역한 것으로 ‘하나님이 도우셨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 이름을 꺼낸 것은 실제로 나사로라는 친구의 이름을 가진 거지의 이야기를 들었거나 목격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부자집에서 먹다 남은 음식 부스러기를 얻어 먹기 위해 대문 앞에 누운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까지만 보면 하나님이 나사로를 위해 무엇을 도우셨다는 말인가 하고 의문을 가질만 합니다. 겨우 부스러기를 제공하시는 하나님이신가요?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적인 차원에서 다 헤아리지 못합니다. 나사로를 위해 하나님이 무엇을 도우셨는지 이야기를 더 지켜보아야 합니다.
~ 중요한 것은 이 부자는 매일 자기 집을 드나들면서 거지 나사로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는 얼마든지 나사로에게 동정을 베풀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지 나사로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아마 매일 집을 드나들면서 인상을 찌푸리거나 당장 꺼지라고 고함을 쳤을 것입니다.
~ 어쨌든 상황은 두 사람의 죽음으로 종료됩니다. 부자의 호화호식과 나사로의 고생은 죽음으로 끝이 났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처지가 사뭇 다릅니다. 나사로는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습니다. 알다시피 천사들은 주님의 시종들로서 섬기는 영입니다(히1:14). 그러므로 나사로는 지금 주님에게로 갔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입니다. 믿음의 조상의 품에 안겼다는 것은 믿음의 사람들이 거하는 곳에 이르렀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사도 요한이 훗날 예수님의 품에 안긴 것을 연상케 합니다. 반면에 부자는 그냥 장사되었다고만 말합니다. 화려한 장례식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부자의 죽음 이후에 대해 침묵합니다. 그가 간 곳이 어디입니까? 이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갑니다.
저승에서(23~31절)
~ 다음 장면은 바로 음부입니다. 부자가 간 곳은 음부입니다. 음부를 뜻하는 hades라는 용어는 보통 죽은 자들이 거하는 곳으로 알려졌지만 그것은 정확한 의미가 아닙니다. 하데스는 분명 고통스러운 곳이며 불타는 곳으로 지옥입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심판의 날에 고라신과 뱃새다와 두로와 시돈과 가버나움과 소돔과 고모라가 모두 음부에까지 낮아질 것이라 경고했습니다(마11:20~24, 눅10:12~16).
~ 이 장면에서 놀라운 사실은 저승에서의 대화가 이생에서의 대화처럼 생생하게 기록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즉 부자가 죽었음에도 눈을 든다거나 떨어져 잇는 사람을 본다거나 손가락이나 혀 등을 언급하는 것을 문자적으로만해석하면 큰 오해를 사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이 장면에서 내세의 삶에 대한 분명한 진리가 실려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죽은 자들은 무의식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깨어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떤 자들은 구원을 얻고 또 다른 자들은 고통을 받는다는 점입니다. 이를 종합하면, 사람이 한 번 죽은 후에는 그의 영혼이 육신과 분리되고 그 상태는 복을 받든지 심판을 받든지 간에 영원히 고정된다는 것입니다. 즉 신자는 천사에 이끌려 영원한 복을 받는 곳으로 가고 불신자는 지옥으로 가서 영원한 고통중에 거한다는 사실입니다.
~ 더욱 분명한 사실은 한 번 죽으면 두 번째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자는 뒤늦게 위대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보고 ”어버지 아브라함이여“라고 부르면서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간청합니다. 얼마나 목이 탔는지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혀를 서늘하게 해 달라”고 애원합니다. ”내가 이 불곷 가운데서 고민한다“고 고통스러워 합니다. 여기서 ‘불곷’이라는 단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성경은 지옥은 불과 불꽃으로 가득찬 곳이라 증언합니다.
”시온의 죄인들이 두려워하며 겨건하지 아니한 자들이 떨며 이르기를 우리 중에 누가 삼키는 불과 함께 거하겠으며 우리 중에 누가 영영히 타는 것과 함께 거하리요 하도다“(사33:14)
”그들이 나가서 패역한 자들의 시체들을 볼 것이라 그 벌레가 죽지아니하며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여 모든 혈육에게 가증함이 되리라“(사66:24)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유7)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계14:10)
”산 채로 유활불 붙는 못에 던져지고“(계19:20, 20:10, 14, 15, 21:8))
~ 반면에 성경은 지옥을 어두운 곳으로 묘사합니다. 마 8:12, 22:13, 25;30은 ”바깥 어두운 가운데“라 표현합니다. 그곳은 악한 영이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 중에 갇힌 곳으로 묘사합니다(유6, 13). 지옥이 불타는 곳인데 어떻게 동시에 어두운 곳일 수 있습니까? 이 두 개념은 얼핏 보기에 상호 배타적입니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두운 공간에 있으면서 어떤 형태의 열에 의해 화상을 입을 수 있습니다. 또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은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해 예비된 것입니다. 그들은 ‘악한 영들’입니다. 그러므로 불이라든가 어두움 같은 우리의 용어들을 단순히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데엔 한계가 있습니다.
~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음부에 간 이 부자가 전혀 태도의 변화를 보이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는 아직도 나사로를 자기 종으로 여긴다는 듯이 그를 자기 집에 보내달라고 간청합니다. 살았을 때 나사로에 대해 아무런 동정과 긍휼을 베풀지 않은 점에 대해 어떤 미안한 사과도 없습니다. 그는 당연히 아브라함에게 이 부탁을 하기 전에 자신의 불찰과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절차가 있어야 했습니다. 이를 보면서 왜 불신자들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지, 왜 잘못을 하고도 사과하지 않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그런 DNA를 허락하지 않은 것이라 봅니다. 상식적으로 잘못을 하면 인정하고 사과하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인간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이 당연한 상식을 부인하고 거부하는 부류들이 있습니다. 이 부자를 통해 우리는 그런 부류들이 역사상 수많이 존재하고 존재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이런 부자를 향해 아브라함은 무엇이라 말합니까? 여기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인품을 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부자를 ”얘“라고 부릅니다. 영어로 ‘son입니다. 이것은 매우 다정한 호칭입니다. 그것은 부자가 아버지라 부른데 대한 응답입니다. 족보상으로 그 부자는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두 가지 이유를 들면서 부자의 간청을 단호히 거부합니다. 하나는 불공평하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첫째, 왜 불공평한 것인가 하면 ”너는 살았을 때 좋은 것을 다 누렸다“는 것입니다. 둘째 왜 불가능한 것인가 하면, ”천국과 지옥 사이에는 큰 구렁이 있어 건널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 것입니까? 둘 사이에 영원한 분리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 그럼에도 부자는 쉽사리 아브라함을 놓아두려 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렇다면 나사로를 자기 집에 보내어 지옥의 이야기를 전해달라고 간청합니다(27-28절). 이에 아브라함은 저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서 들으면 된다고 하였습니다(29절). 이것은 구약 성경을 가리킵니다. 성경을 읽으면 천국과 지옥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 이 땅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을 의뢰해야 하는지,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를 부인하고, 궁핍한 자를 돕고, 과부와 고아와 비천한 자들을 업신여기지 말고 긍휼을 베풀어야 하는지 성경을 읽으면 다 알게 되는 것이라 말합니다.
~ 부자가 어떻게 반응합니까? 30절을 보세요. 아브라함의 말을 수긍하지 않습니다. 그는 지옥에 있으면서도 “그렇지 않다”고 부인합니다. 자기 생각이 옳다고 우깁니다. 죽은 자들 중에 보내면 저들이 회개할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아무런 근거없이 오직 자신의 상상으로 말을 합니다. 그러나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났음에도 사람들은 그를 다시 죽이려 한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요2:10). 그뿐입니까? 얼마나 많은 악인들이 예수님을 모함하고 죽이려 했습니까?(요11:47~50). 이 부자의 말은 참으로 부질없는 허언일뿐입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마지막으로 단호히 부자의 요청을 뿌리치며 이렇게 결론을 짓습니다.
“성경을 믿지 아니한 자는 죽은자가 다시 살아나서 지옥이 있다고 말을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31절)
~ 이 이야기를 통해 불신자의 한 영혼의 상태가 얼마나 무섭고 끔찍한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도한다는 것은 이렇게 무서운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기도로 무장하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통해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냥 해도 되고 하는 척 시늉을 하는 것이 전도가 아닙니다. 전도는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이야기(18:18~30)
(이 이야기는 오늘 본문과는 동떨덜어진 부분입니다만 재물에 관한 것이기에 함께 다룹니다).
어떤 관원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마태복음에선 ’청년‘으로(19:20) 소개되는 데 비해 오늘 부가복음에서는 ’관원‘이라 소개합니다. 그러나 공관복음서 기자들은 공히 이 사람을 ‘부자’로 소개합니다. 이를 종합하면 이 사람은 젊은 청년이면서 부자라는 것입니다. 아마 좋은 부모를 만나 많은 재산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운 좋은 청년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다른 부자들과는 사뭇 다른 점이 있습니다. 대개 부자들은 이생에서의 호화로운 인생에만 관심이 잇는 데 비해 이 청년 부자는 영생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18절)하고 물었습니다.
특히 그는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 불렀음에 주목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그의 긍정적인 태도가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즉시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분이 없다”(19절)면서 그의 칭찬을 거절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자신의 거룩하심과 신실하심과 선하심 등을 부인하신 것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의 해석을 어려워 합니다. 이에 핸드릭슨이 좋은 해석을 제공합니다. 즉 예수님은 이 청년이 자신을 선한 선생님으로 불렀지만 그것이 매우 피상적이었음을 이미 아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이 청년이 진실로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으로 믿고 의지했다면 22절의 모든 계명을 다 지키겠다고 결심하고 순종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진실로 겸손한 자였다면 주님이 20절에서 나열한 계명들(간음, 살인, 도둑질, 거짓 증언, 부모 공경 등)에 대해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했을 것이지만 청년은 21절에서 자신이 이것을 어렸을 때부터 다 지켰다고 공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누가 보아도 매우 천연덕스러운 거짓말이요 위선입니다.(요즘 우리 사회에 이런 사람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는 현상을 보면서 정말 이 세상이 종말의 심판대 앞에 다가섰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 세상에서 율법의 계명을 지킨다고 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얼마나 자기의로 똘똘 뭉친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정말로 주님이 나열한 계명들을 다 지키고 순종했을까요?
22절에서 주님의 다음 반응을 보세요.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라는 기록에 주목하세요. 예수님은 이 청년의 위선적인 답변을 들으시고(아마 속으로 매우 측은히 여겼을 것으로 봅니다), 그 청년에게 마지막 카운터펀치를 날립니다. 그것은 바로 청년이 목숨보다 더 중요시 여기는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고 주문하신 것입니다. 물론 주님은 당연히 이 청년이 이 말씀을 따르지 않을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시험이었습니다. 결국 청년은 시험에 직면하자 근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23절). 만일 그가 이 시험을 참고 견디어 내었더라면 그는 ‘천국의 보화’를 대신 얻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마다 가장 소중히 여기는 보화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보화는 이삭이었습니다. 그 보화를 지키기 위해 그는 장자 이스마엘과 하갈을 몰인정하게 추방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삭을 바치라는 시험을 던졌습니다. 아브라함은 고민 했지만 결국 이삭을 번제로 바치기로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이 청년만 그럴까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종의 시늉은 합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시험의 때엔 이 청년처럼 핑계를 대고 회피합니다.
예수님은 하나의 결론을 내립니다. 24절에서 예수님은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하십니다.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비유로 말씀하십니다(25절). 즉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단지 재물이 있다는 것만으로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뜻은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는 것을 이른 것입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들이 수군거립니다. 26절을 보니 그들은 그렇다면 아무도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낙심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라 설명합니다. 이 말씀을 듣고 베드로가 나섭니다. “우리가 우리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다”(28절)고 말합니다. 실제로 베드로를 비롯한 12제자가 그랬습니다. 베드로의 이 말은 12제자들의 속마음인지도 모릅니다. 언제나 베드로는 12제자들의 대변자 역할을 충실히 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주님은 사람들 앞에서 들으라는 듯이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29~30절의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현세에서 여러 배로 받고 내세에서 영생을 누릴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이 말씀에는 한 가지 분명한 하나님의 약속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우리의 분명한 입장과 가치관에 대한 주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나라보다 우선되는 일은 없습니다. 제아무리 하고 있는 일이 중요하다 해도 하나님의 나라의 일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고 증거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고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천명하신 것입니다.
2. 교훈
한 마디로 돈에 미치지 말아야 합니다. 돈이 좋은 것이지만 돈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쓰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가난한 이웃을 위해 쓰는 것입니다. 헐벗은 이를 돕는 일에 재물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누가 돈을 귀하게 쓰느냐 하면 열심히 땀을 흘리면 돈을 축적한 사람이 쓰는 것도 귀하게 씁니다. 돈을 잘못 쓰면 지옥 가지만 잘 쓰면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무엇보다 돈에 대해 바른 가치관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출처] 43주차 <사마리아여행> 돈에 대해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 (바로선개혁교회) |작성자 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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