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주차 <사마리아여행> 믿음이 하는 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1).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2).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3).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용서하라 하시더라(4).”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5),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며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오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6).”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걸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7).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8). 영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9).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을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10).”
1. 배경설명
오늘 본문 이야기는 예수님이 베레아 지방에서의 사역(14;1~17:10)을 마감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주신 교훈인데 세 가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 죄와 관계된 두 가지 교훈(1~4절)
2) 참된 믿음에 관한 교훈(5~6절)
3)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의 성도들의 올바른 자세에 관한 교훈(7~10절)
2. 본문 강해
첫 번째 이야기(1~4절)
예수님의 최종적인 관심의 대상은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있습니다. 예수님이 비유를 들어 설명하는 최종적인 목표는 그의 제자들을 온전히 세우기 위함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예루살렘 방문을 약 일주일 앞에 두고 베레아 사역을 마감하고 계십니다. 앞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율법주의자들의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신앙들에 대해 경고하시거나 질책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활동이 단지 이것으로만 끝난다면 구속사적인 의미는 반감될 것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이러한 가르침들을 제자들에게 그대로 적용하여 제자들은 그렇게 믿지 말고 그렇게 살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그중에서 특히 다른 사람을 죄에 빠트리는 행위의 심각성에 대해 경고하시는 가르침입니다. 이 가르침은 11장과 12장에 있는 바리새인들의 외식에 대한 경고의 가르침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이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다”(11:39)고 지적하셨고 그들은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사람들”(11:46)이라면서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12:1)고 제자들에게 상기시켰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가르침은 이 교훈을 재차 강조하는 연장선 상에서 나온 말씀이라 보면 됩니다.
알다시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주위에 몰려든 세리들과 죄인들을 경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15:1-2). 또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 거지 그 부자가 나사로를 얼마나 멸시 천대했는지를 밝혔습니다(16:19-21). 우리 주변에 소외당하고 멸시받는 사람들일수록 마음에 상처가 큽니다. 성도님들이 특별히 이런 점들까지 세심하게 살피어서 부지부식 간에 다른 사람을 상처주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기억나는 일화 하나가 있어 소개합니다.
“평생동안 대기업에 종사하다가 은퇴한 후 퇴직금 등을 모아 작은 시골 마을에 별장 하나를 짓고 사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참 너그럽고 좋은 사람이라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듣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말이면 지인들이 찾아와 알맞게 가꾼 잔디밭 정원에서 가든파티를 즐기곤 했습니다. 그렇게 한 3년이 지난 어느 날 앞집에 초상이 났습니다. 앞집 어르신이 돌아가신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별로 왕래가 없던 집이었지만 같은 동네 인심 상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조문 차 들렀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문을 열자마자 돌아가신 어르신의 자녀들이 득달같이 달려들면서 ‘그냥 가라’고 소리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어이가 없었지만 쫓겨나다시피 조문도 못하고 물러났습니다. 그러나 얼마 뒤 마을 이장님으로부터 전후 사정을 듣게 된 이 사람은 정식으로 그 집을 찾아가 사과를 했다고 합니다. 내용인즉슨 별 생각 없이 벌인 파티 소리에 어르신이 신세타령을 하다가 자살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알게 모르게 한 일이 어떤 사람에겐 마음의 상처가 되어 평생 원망을 듣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1절의 교훈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생각하기엔 매우 작게 생각하는 일이지만 주님 입장에선 매우 중대한 문제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를 하나님은 기억하신다고 누누이 강조하셨습니다. 2절을 보세요. “이 작은 자를 실족케 하는 자는 연자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에 던진다”는 경고를 하십니다. 여기서 ‘작은 자’가 누구입니까? 누가복음 전체에 흐르는 사상에 의하면 이 ‘작은 자’는 주님이 가장 아끼시고 가장 먼저 돌보시기를 원하시는 소외당한 자, 버려진 자, 가난한 자, 슬픔에 빠진 자, 어려움에 처한 자, 과부와 고아와 노예와 연약한 여인과 병든 자 등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특별히 주님의 보호 아래에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괴롭히고 상처를 주는 것은 주님에게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과 같은 무모한 행위입니다. 이런 일에 대해 주님은 단호하게 ‘연자맷돌’을 꺼내 들면서 경고하십니다. ‘연자맷돌’이 무엇입니까?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유대인들은 곡식을 마당에 늘어놓는데 그 우에 돌 두 개를 얹어 두고 다시 그 돌들 위에 큰 돌을 엎어 두는데 이것을 연자맷돌이라 한다고 합니다. 다음으론 연자맷돌이란 손으로 돌리는 맷돌이 아니라 나귀가 돌리는 엄청나게 큰 돌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크고 무거운 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뛰어든다면 당연히 익사하는 것입니다.
이제 첫번째 이야기의 작은 결론입니다. 3절 첨 마디를 보세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고 교훈하십니다. 왜 그러냐 하면 1절에서 주님은 남을 실족하는 행위를 경고하시면서 실족케 하는 일이 전혀 없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만큼 죄의 유혹이 강렬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상처를 주지 않고 사는 일이 죄의 영역에 속한 현세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죄는 갈수록 수그러드는 것이 아니라 날로 교묘해지고 은밀해지고 죄 없는 것처럼 가장하고 위선의 옷으로 가리고 결국 엄청난 규모로 확장되어 발견되어지거나 폭로됩니다. 여기서 신자들의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 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교회의 일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일보다 자신과 자신에게 주어진 세상일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더 강합니다. 이런 신자는 누구를 실족케 하는 것입니까? 교회 안에 가장 연약한 신자를 실족시킵니다. 특히 초신자들은 주님을 바라보기보다 교회 안의 다른 교인들을 바라보고 판단하기를 즐겨합니다. 그러니 모두 조심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겐 희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입니다. 비록 실수로 다른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다른 사람을 실망케 하는 일에 가담했을지라도 우리에겐 믿음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4절이 말하는 ‘용서의 힘’입니다. 잘 보세요.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당부하십니다. 첫째,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형제가 죄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우라는 뜻입니다. 권면하고 설득하라는 말입니다. 둘째, 그리하여 죄를 범한 형제가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일곱 번을 반복한다 해도 조건 없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왜 우리에게 이런 부당한(?) 요구를 하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받은 믿음의 능력을 믿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잇는 우리는 이제 전에는 꿈도 꿀 수 없었던 용서라는 능력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믿음이 발휘되는 매우 아름답고 위대한 능력이자 힘인 것입니다. 용서는 우리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용서는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잇는 새로운 능력입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얼마나 위대한 힘과 능력을 소유한 존재들인지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믿음과 함께 하나님의 능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시기를 권면합니다.
두 번째 이야기: 참된 믿음에 관한 교훈(5~6절)
주님으로부터 진정한 믿음의 일인 용서의 가르침을 들은 사람들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아마 큰 감동이 일었을 것입니다. 그때 주의 제자들이 이렇게 주님께 요구했습니다. 5절을 보세요.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톰슨 주석성경이 지적하는 대로 자신들의 작은 믿음을 가지고선 도저히 그 같은 일을 실행하기 어렵다는 것을 절감했기 때문에 주님에게 더 큰 믿음을 달라고 요구한 것일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대답은 제자들의 요구와는 다른 차원입니다. 6절을 보니, 주님은 이렇게 먼저 운을 떼십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라고 말씀하십니다. 한글 성경과 영어 성경은 모두 시제를 과거로 표현합니다. If you had faith~라고 함으로써 과거시제를 사용합니다. 즉 이것은 제자들에게 믿음이 과거에는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지금 주님에게 믿음을 더해 달라고 요구하는 제자들을 향해 주님은 과거에는 믿음을 소유하지 못했지만 지금이라도 겨자씨만한 작은 믿음을 가진다면 그 어떤 능력도 발휘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누가는 특이하게 이 요구를 한 사람들을 그냥 제자라고 부르지 않고 ‘사도들’(Apostles)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아무도 설명하지 않고 있어서 궁금증을 더합니다. 이것은 생각하기에 믿음과 깊이 연관된 것으로 봅니다. 즉, 겨자씨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주님의 제자가 됩니다. 그중에서 주님은 특별히 믿음의 일을 나타내기 위해 택하신 열두 제자를 사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특별히 임명된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에 자신을 사도라 여기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어리석은 일임을 밝혀둡니다.
세 번째 이야기: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의 성도들의 올바른 자세에 관한 교훈(7~10절)
오늘은 믿음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 하고 있습니다. 이제 주님은 마지막으로 하나의 비유를 들면서 믿음을 가진 신자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처신하고 살아야 하는지 도덕적인 교훈을 하십니다. 그런데 이 비유의 말씀을 잘못 해석하면 여러 가지 난관에 봉착합니다. 그중 대표적인 난관을 소개하면 이런 것입니다.
1) 7절의 말씀은 어떠한 주인도 종과 함께 자리에 앉아 식사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8절에서는 도리어 주인이 정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 것이라고 하면 서로 모순된 것으로 보입니다.
2) 9절에서는 명령대로 다 행한 종들이라 하면서 10절에서는 이들을 무익한 종들이라 불러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를 바르게 해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작은 농장의 주인을 연상합니다. 왜냐하면 ‘종들’이라 하지 않고 그냥 단수 명사인 ‘종’이라 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여기서 쓰인 ‘둘로스’는 ‘종’보다는 ‘노예’로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서 지금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시고 계신다는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7절에서 “너희 중에”라고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 중 몇몇은 노예들이라기보다는 종들을 소유한 주인의 신분이었음을 가정할 수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묘사된 종은 단지 명령을 받은 것만을 행하였으며, 노예근성에 사로잡힌 자입니다. 그는 온종일 밭을 일구거나 양떼를 돌보았습니다. 그가 밭에서 돌아왔을 때 그의 주인은 자기가 먹고 마시는 동안 기다릴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 후 주인이 “내가 다 먹었으니 너도 먹으라”고 종에게 말을 했고 종은 복종했습니다. 종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행합니다. 종이 그와 같이 행동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마 주인의 명령을 위반하면 실직할 수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더럽고 치사하고 아니꼽고 배알이 뒤틀려도 참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일마저 못한다면 당장 가족들의 끼니 걱정을 해야 합니다. 결국 시간이 흐르면 종은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만 그 처지에서 벗어날 엄두도 꾸지 못하고 맙니다. 성경주석가인 로버트슨(A.T. Robertson)은 이에 대해 “노예근성을 소유한 자는 일상 생활 뿐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아무런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고 주석합니다.
결국 이 비유가 담고 있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면서 사랑과 감사의 정신을 실천하되 늘 하던 대로 습관대로, 해야만 하는 것이니까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뜻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무익한 종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는 것입니다.
3. 결어
오늘 세 가지 이야기를 가지고 이 땅에서 성도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교훈을 들었습니다. 그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 기독교 정신은 철저히 이타주의입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나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십자가에 바쳤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 대속하심으로 우리의 무든 죄가 사함을 받았고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받아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남은 생애를 하나니의 영광과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전심전력해야 합니다. 이 일에는 도무지 나의 유익과 나의 입장과 나의 목표를 구하는 이기적인 것들이 다 사라져야 합니다. 세상은 “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지만 주님은 “자기를 부인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주님 안에서 죽은 자들입니다. 옛날 거듭나기 이전의 우리는 이제 완전히 죽었습니다. 그 못된 습성이 남아 있다 해도 그것은 실체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인생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지 않는 것이 실족케 하는 일입니다.
둘째, 믿음의 능력을 확신해야 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는 이미 믿는 자 안에 믿음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라 함은 주어진 믿음이 서로 다르다 해도 그 능력만은 동일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말합니다. 작은 믿음이든, 큰 믿음이든 믿음만 있다면 믿음의 결과가 나타납니다. 결국 믿음이 모든 것을 이깁니다.
셋째, 적극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 실패자의 마음은 이미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의심의 어둠이 있기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노예가 노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그가 노예이기 때문이 아니라 노예로 살 수밖에 없다는 체념의 결과인 경우가 더 많다고 합니다.
“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진 35년 만에 필리핀 어느 무인도에 살고 있는 한 일본군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는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본국에서 소환 명령이 올 때까지 그 섬에 혼자 남아 자기 자리를 지켰다고 합니다. 만약에 그가 단 한 번만이라도 섬을 빠져나와 세상을 구경했다면 그런 어리석은 인생을 살며 세월을 허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반면에 성공하는 자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가 탑재되어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이라는 엄청난 무기를 장착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세요. 주님은 우리 모든 능력의 원천이십니다. 이 사실을 믿고 더욱 힘을 얻어 전심전력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는 이생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출처] 44주차 <사마리아여행> 믿음이 하는 일 (바로선개혁교회) |작성자 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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