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주차. <사마리아여행> 기도의 두 가지 기둥 11.24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1),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2),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 하되(3),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4),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5).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6).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8).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9),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10).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11).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12),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13).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길ㄹ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14)”(눅 18:1~14)
기도의 대가들
역사적으로 기도의 대가들이 즐비합니다.
~ 칼빈은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참여하는 것”이며 “믿음의 최상의 실천”이라 했습니다. 칼빈은 일평생 카톨릭처럼 의식 위주의 미사가 아니라 말씀 중심의 하나님과의 교제를 강조했기에 기도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강조한 사람입니다.
~ 설교의 황태자로 알려진 찰스 스펄전도 기도의 대가입니다. 무엇보다 그는 성경의 영웅들의 기도를 온몸으로 배우고 익힌 사람입니다. 그는 모든 설교를 하기 전에 무릎을 꿇고 성령님의 감화감동이 있을 때까지 몇 시간이고 기도했고 설교 중에도 기도하라고 역설했습니다. 특히 그는 <기도 레슨>이라는 책에서 성경에 등장하는 기도의 대가들을 소개합니다. 야베스, 다윗, 솔로몬, 욥, 그리고 시편의 기도들을 통해 기도를 배울 것을 권면합니다. 먼저 야베스의 기도를 통해 진정한 축복을 구하는 기도를 배우라고 합니다. 물론 이런 야베스의 기도를 ‘기도하면 들어주신다’는 기복신앙으로 몰아간 무수한 자들이 있었습니다만 스펄전 목사는 이 땅의 성도들이 진정한 성령님의 충고를 외면해선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다윗을 통해선 진정한 고백이 무엇인지를 배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알다시피 다윗은 왕이고 전사입니다. 그러나 그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다윗의 훌륭한 점은 다윗은 ‘있는 그대로 고백’했다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하나님의 자비 이외에 별다른 소망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대속자로 세우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기도는 우리의 자존심을 무너뜨리는 작업입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으로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 자신의 무가치함과 무능력을 인정하고 자신을 낮추며 자기를 부인하는 결단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다윗의 기도를 통해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솔로몬을 통해 진정한 영적 부흥을 꾀하라고 가르칩니다. 욥을 통해선 고난 중에도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를 배워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누구보다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24시는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마감하는 삶이었습니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1:35)
그리고 예수님의 기도는 습관적인 일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눅22:39)
이렇게 기도의 대가들이 죽기까지 기도에 힘쓴 이유가 무엇입니까? 두 가지 이유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 하나는 기도의 교제에서 얻는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기도해 본 사람만이 경험하는 사실입니다. 새벽 기도가 왜 중요합니까? 다른 어떤 시간에 행하는 기도보다 감동이 있고 기쁨이 있고 하나님을 체험하는 능력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새벽기도의 중독성을 논하기도 하지만(물론 그런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새벽에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을 누가 말릴 수 있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을 만나 본 사람들은 그 맛(?)을 잊을 수 없어 오늘도 내일도 하나님 만나러 기도의 자리에 오는 것입니다.
~ 두 번째 우리 안에 거하는 본능의 유혹들을 기도를 통해 물리치기 위함입니다. 본능의 유혹들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육신의 정욕이란 육체가 원하는 모든 쾌락을 말합니다. 안목의 정욕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즐거움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핸드폰 마귀를 보고 즐기는 세대의 사람들입니다. 특히 안목의 정욕 중 무서운 것은 호기심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선 아무런 호기심이 없는 자들이 세상에 대해선 얼마나 호기심이 강하고 큰지 스스로 주체하지 못합니다. 바로 이것만 보아도 사람의 죄성이 얼마나 강령한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이생의 자랑은 자기애라는 뿌리에서 자라난 열매들입니다. 명예욕, 성공에 대한 욕구, 영웅 의식, 자기 자랑, 자식 자랑, 돈 자랑, 교만함 등을 말합니다. 이런 쓴 뿌리들을 무엇으로 없앨 수 있습니까? 성형수술을 하고 멋진 차를 끌고 멋진 옷을 입고 거리를 쏘다니면 추악한 죄성들이 사라집니까? 아니요. 절대로 그런 일을 통해 내 안에 숨겨진 추악한 죄악들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매일 자랍니다. 오직 기도만이 이런 추악한 것들을 멸절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기도의 교훈들
오늘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행하는 기도에 대한 교훈들입니다. 방금 저는 여러분에게 기도는 당연한 것이라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6)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흔히 사람은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거나 행하지도 못하는 우를 범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공기가 있으니 그냥 숨 쉬는 줄 압니다. 빛이 있으니 그냥 낮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살아 있으니 그냥 목숨이 붙어 있는 줄로 압니다. 사람을 창조하신 이가 누군지 관심이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모르고 사니까 하나님과 대화한다는 발상 따위를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기도는 아예 생각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왜 기도해야 하는지도 모르며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진짜 기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이자 능력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오직 그리스도인의 기도만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신학적 전제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로 설정하였습니다. 이 전제가 아니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세상의 모든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어야 영생을 누립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만 생명이 보존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때 말하는 생명은 육적인 생명이 아니라 영적인 생명을 가리킵니다. 이 생명을 얻지 못하고선 그 어떤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 안에 거하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기도란 한 마디로 예수님 안에 함께 거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공급하시는 모든 필요를 받아 누리며 즐거워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은 세상이나 자신이나 사람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가장 단적으로 잘 나타내는 징표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대개 일반 사람들은 기도를 연약한 것, 혼자 힘으로 안 될 때 사용하는 긴급도움 요청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필요와 관심에 맞추어 하나님을 설정하고 자신의 기준에 맞도록 하나님을 만들어 그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란 우리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는 것입니다.
생명력 넘치고 풍성한 기도를 습관적으로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온전한 화목을 누리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을 결코, 단 한 번도 내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 기도하는 사람의 가구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그래서 복음주의자인 존 라이스(John R Rice)는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성(nature)이자 속성(attributes)’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평화로운 관계를 가지며 사는 사람입니까? 그것은 아마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사람일 것이고 하나님을 가장 기쁘게 하는 일은 그 무엇보다 기도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최우선적으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정립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을 받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아내는 지름길입니다.
다음으로 기도와 삶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기도한 만큼 살 수 있고 하나님 앞에서 사는 만큼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치열하게 살아온 사람은 기도도 열렬하게 합니다. 반대로 열렬하게 기도하는 사람만이 정말 최선을 다해,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와 삶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기도를 게을리하는 사람이 바른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더욱이 기도하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관심이 뜨거울 리 없습니다. 다시 말해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에 게으르다는 것이고 하나님은 육적이든 영적이든 게으른 사람을 돌보시고 사랑하시고 복을 주시는 일에 게으른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성실하고 참되며 끈질긴 기도를 요청하십니다. 이 세상에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굳이 하나님이 아니라도 그 누군가, 혹은 그 무엇을 향해 기도를 합니다. 실제로 세상 사람들이 지목한 기도의 대상은 기도를 듣거나 응답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왜냐 하면 이들은 인간이 고안한 신상이거나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므로 기도를 듣고 응답한다는 것은 거짓의 행위입니다. 물론 마귀와 귀신의 역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늘 하나님을 빙자하거나 진짜를 모방하는 것입니다. 또 이들의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단순히 소원을 말하는 것이거나 특정 종교가 만들어 놓은 의례적인 주문들을 암송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오직 살아계시는 한 분 하나님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은 존재하시고 지금도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시며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고 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기도한다고 하여 다 응답을 즉각적으로 받아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기도를 끈질기게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를 대충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일부러라도 우리가 성실하고 열렬하고 오랜 인내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바라십니다. 또 하나님은 자기를 의롭다고 여기는 자의 기도를 듣기를 거부하십니다. 그런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영광을 위해 기도하는 자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바로 이 기도에 대한 교훈적인 두 개의 이야기로 꾸려져 있습니다. 하나는 어떤 도시에 사는 한 과부의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를 의롭다고 여기는 한 바리새인의 이야기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기도의 두 기둥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 그 기둥이 무엇인지 알아봅니다.
3. 한 과부의 탄원
우선 우리는 앞의 17:22의 구절을 넓은 의미로 파악해 볼 때 예수님은 여전히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 오늘은 여러 세대를 통해 나타날 그의 제자들이 주님이 재림하기 전, 그 기간이 얼마나 걸린다 할지라도, 기나긴 어려움 중에도 결코 낙심치말고 기도로써 인내해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1절 전반부에 나타난 기록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말씀을 시작하고 계신 것은 다분히 제자들 사이에서 정말로 기도가 효력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기도해야 함을 알고 있지만 자신들의 그 기도가 정말로 효력이 있어 하나님에게 상달되어 관철될 수 있는 것인가에 의문을 가지고 주님에게 질문했다고 보여집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도 비유를 통해 제자들을 가르치십니다. 이 비유의 목적은 다음의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즉, 아무리 지독하게 악하고 세속적인 재판관이라 할지라도 끈질기게 탄원하는 과부에게 결국 항복하고 그녀에게 정당한 권리를 되찾아 주는데, 하물며 공의롭고 거룩하며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께서 밤낮으로 부르짖는 택한 백성들의 간구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등장하는 재판관이 어떤 사람입니까? 2절을 봅니다.
~ 첫째, 그는 도시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것으로 보아도 무리가 아닙니다.
~ 둘째,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세상에 제일 교만한 자가 바로 이런 자입니다.
~ 셋째, 사람을 무시합니다. 물론 재판관이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아마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 자리는 성공의 자리입니다. 권세를 누리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모르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제일 높은 사람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깔보고 무시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훌륭한 사람은 높은 자리에 있을 때 더욱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크고자 하거든 섬기는 자가 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 넷째, 3절을 보니 과부는 재판으로 인해 원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이 재판관은 올바른 판결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억울한 재판으로 인해 고생하는 약자들에 대한 동정심도 없어 보입니다. 그는 ‘정의’도 없고 ‘사랑’도 없는 무자비한 사람입니다. 오직 자기 권세와 명예와 유익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상대로 요구를 관철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잘못 덤볐다간 그의 칼날에 목숨이 날아갈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권세가를 두려워합니다. 그의 시퍼런 칼날 앞에 주눅이 들어 말 한마디 꺼내지 못합니다. 요즘 홍콩의 민주화 시위를 보세요. 경찰 병력들이 무자비하게 시위대를 깔아뭉갭니다. 시민들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평화적 시위를 주창하는 시위대를 폭도로 규정하고 총으로 쏘아 죽이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중국이라는 국가가 아직 멀었다는 것입니다. 한 국가가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를 외면하고 자기들의 통치방식을 고집하며 야만적이고 무자비하게 반대나 저항을 짓누른다면 그 국가는 경찰국가이거나 절대 왕정국가이거나 절대 독재국가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권세가들에게 가장 무서운 대상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사회적 약자입니다. 평소엔 두려워서 말도 못하던 이들이 완전히 코너에 몰리면 갑자기 돌변하여 죽기 살기로 덤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가장 무서운 사람이 누구입니까? 죽기를 각오하고 덤비는 사람입니다. 오늘의 과부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과부는 자신의 억울함을 들어줄 때까지 끈질기게 재판관을 찾아가 탄원을 했습니다. 아마 밤이고 낮이고, 재판장뿐 아니라 재판관의 집에까지 찾아갔을 것입니다. 심지어 휴일에도 가족끼리 있는 자리에까지 찾아가 그를 괴롭혔을 것입니다. 재판관은 한 마디로 제대로 임자를 만난 것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항복입니다. 재판관은 과부의 끈질긴 탄원에 앞발 뒷발 다 들었습니다. 내용은 둘째치고 정말로 성가시고 귀찮은 일이었습니다. 성경은 이를 5절에서 ‘번거롭다’고 하였습니다. 영어 성경은 ‘border’즉, 귀찮다고 번역했지만 원어적으로는 κοπτω(콥토)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무엇을 자르거나 끊어내다’라는 뜻입니다. 마 21:8에 보면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사람들이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에 펴는데 이때 ‘베다’(cut)라는 단어가 같은 단어입니다. 나무가 베일 때 우리는 모르지만 베이는 나무의 고통이 만약에 있다면 엄청나지 않을까요? 그것은 칼날에 슬쩍 베이는 정도가 아니라 생명의 단절입니다. 지금 재판관이 느끼는 고통의 강도가 어느 정도인가를 잘 설명하는 단어인 것입니다. 덤비더라도 이 정도로 덤벼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오늘 재판관처럼 두 손 들고 항복하는 것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 주님은 우리가 기도에 대해 얼마나 모진 마음을 먹고 끈질긴 자세로 해야 하는 가를 가르치십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기도의 첫째 기둥을 붙잡았습니다. 그것은 끈질김이라는 이름의 기둥입니다. 이 기둥을 꼭 품에 안고 놓치지 말기를 권면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와 여러분은 회개해야 합니다. 과연 오늘을 사는 우리가 이 정도로 기도하고 있습니까?
4.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
두 번째 비유는 또 바리새인에 관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을 만날 때마다 왜 예수님이 이런 부류를 싫어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늘 높은 자리에 앉아 거들먹거리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자신만을 믿고 남들을 완전히 무시하는 바리새인들을 염두하고 하나의 사례를 들고 있습니다. 자명한 사실은 F.F.브루스가 지적했듯이 이 설명이 과장된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그릇된 생각을 하고 사는 사람이었던 가를 실증해 주는 이야기입니다.
내용인즉슨,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예루살렘성전은 모든 유대인들의 심장입니다. 모든 종교적 행사뿐 아니라 교육의 장소요 교제의 장소요 중요한 회합의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의 기도는 교만한 것들이었습니다. 이런 기도는 본받을 것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기도가 어떤 것입니까?
1) 그들은 정해진 시간에 성전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남들에게 보이고 자랑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이들은 이런 행위를 통해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얼마나 거룩하고 경건한 자인지를 나타내 보입니다.
2) 무엇보다 바리새인들은 남들의 눈에 띄는 장소에서 기도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3) 또 눅 20:47절을 보면 그들은 외식으로(for pretence, 가식으로) 길게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길게 기도한다고 좋은 기도가 된다는 발상 자체가 모순입니다. 얼마나 진실한 기도를 드리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4) 뿐만 아니라 바리새인들은 오늘 본문 11절을 보면 다른 사람들과 섞여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따로 서서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세리와 자신을 구별시킵니다. 마음속으로 세리를 천박하고 저주를 받은 자로 취급하는 것이 역력합니다. 그래서 세리와 자신이 같지 않음에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로 치면 가난하고 지위가 낮은 사람들을 이런 속내를 가지고 마치 벌레 보듯이 보고 취급하는 강남 부자들을 연상케 합니다. 어떤 재벌의 안주인이라는 여자가 집의 도우미를 짐승 취급하던 일이 뉴스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바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만행입니다. 인간이 인간을 상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은 존재이기에 다른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에게 죄악을 범하는 것입니다.
5) 다음으로 바리새인의 기도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기도하면서 자신이 공로를 하나님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십일조를 빠짐없이 드린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자기를 드러내는 자야말로 가장 수준이 낮은 자입니다. 자기의 유익만을 구하는 자가 가장 이기적이며 가장 추악한 상태에 머무는 자입니다. 이런 자의 특징은 자신이 남들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또 남들을 잘도 비판하면서 정작 자신에 대한 비판을 견디지 못하는 자입니다. 이른바 전형적인 ‘내로남불’형 인간입니다.
반면에 오늘 주님이 등장시킨 세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1) 첫째, 그는 모든 사람들이 좋지 않게 여기는 직업에 종사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그는 늘 마음속으로 자기 자신에 대하여 불안과 불만족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고민과 갈등은 매우 컸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먹고살자니 직업을 버릴 수도 없고 계속하자니 사람들의 이목이 두려운 것입니다. 세상에서 이런 갈등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부지기수일 것입니다.
2) 그래서 세리는 성전에 가서도 사람들 눈에 띌까 봐 멀리 서서 기도합니다(13절). 그럼에도 중요한 사실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각오하고서라도 이 세리가 성전에 올라가 기도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세리의 진정성이 있는 것입니다.
3) 세리는 바리새인과 달리 자신을 철저히 죄인을 여깁니다. 그래서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며 불쌍히 여겨 달라고 간구합니다(13절). 이 얼마나 간절한 기도입니까? 얼마나 자기 자신에 대해 부끄럽게 여기고 심적으로 괴로우면 이렇게 기도하겠습니까? 비록 그는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죄인이었지만 그는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섰습니다. 아무것도 의지할 것이 없는 세상에서 그는 빈손으로 십자가를 붙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의 두 번째 기둥을 손에 쥐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진실의 기둥’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허례허식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기도는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기도입니다. 기도의 형식이 아닙니다. 유창한 언변으로 좌중을 사로잡는 기교가 묻어있는 기도가 아니라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하나님께 나아와 용서를 구하고 불쌍히 여겨 달라고 간청하는 자세야말로 가장 진실한 기도일 것입니다. 세상 노래에도 “눈물로 쓴 편지는 버릴 수가 없다”고 하는데 하나님이 어찌 우리의 눈물의 기도를 외면하겠습니까?
5. 결론
이제 14절에서 두 사람의 기도에 대해 예수님의 판정이 내려집니다. 세리는 의롭다함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하나님의 눈에 이 세리야말로 의로운 자로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한편으로 ‘의롭다’는 말은 법정 용어입니다. 법정 용어라는 것은 불변이라는 의미가 내포됩니다. 그리스도인이 중생하고 믿음의 선물을 맏고 ‘칭의’를 받은 것은 하나님 나라의 범정에서 선포한 영원불변의 선고입니다. 어떻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선고를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세리의 발걸음이 얼마나 가벼웠을까요? 물론 바리새인도 하나님의 판결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차라리 그날 이 바리새인은 성전에 가지 않고 집에 머물렀으면 더 좋았을지도 모릅니다. 비록 그는 성전에 나아가 사람들에게 자신의 의를 한껏 자랑하는 시간을 가지긴 하였지만 정작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의 속이 얼마나 허무하고 썰렁할까요? 과연 누가 밤에 발을 뻗고 잠을 잘 잘 수 있는 사람일까요?
드디어 예수님의 선고판결이 울려 퍼집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오늘 기도의 두 기둥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함께 외칩시다.
“끈질기게, 진실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하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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