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주차 <사마리아여행> 어린아이와 같은 하나님의 나라 12.1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15), 예수께서 그 어린아이들을 불러 가까이하시고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로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1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17)”(18:15~17)
약자들의 예수님
예수님은 가장 먼저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셨습니다. 특히 병자들은 최우선적인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주변에는 늘 병자들이 몰려 들었고 그때마다 예수님은 자신의 방식대로 이들의 병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이런 치유 사역에 대해 요한복음을 제외한 공관복음서들은 모두 관심을 가지고 기록을 했습니다. 이중 치유에 대해 가장 많은 관심을 가지고 기록은 한 것은 마태복음입니다.
마태복음은 한 마디로 예수님의 말씀사역과 치유사역을 의도적으로 나란히 배치한듯한 인상을 받습니다. 실제로 산상수훈 이후에 병자들을 고치는 장면을 약 10개로 압축해서 소개하고 있는데 이것은 저자인 마태가 이 모든 치유의 역사가 믿음과 직결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임을 눈치 챌 수 있습니다. 즉, 사도 바울이 언급했듯이 믿음은 말씀을 들음으로 나는데(롬10:12),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와 병 고침받기를 간청할 때 그들은 모두 치유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치유의 현장을 확인해 봅니다.
1) 먼저 마 8장으로 갑니다. 산상수훈을 마치시고 산에서 내려오자 마자 한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나아와 병고침을 간청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을 손을 내밀어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8:3) 하시니 즉시 나병이 깨긋해 졌습니다.(1~4)
2) 치유의 백미는 다음에 이어지는 한 백부장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유대인이 아니라 로마인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하인이 중풍병으로 고생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예수님께 나아와 간청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고 하시자 이 백부장은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라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놀랍게 여기시고 “이스라엘 중에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고 하시면서 백부장을 향해 “가라 네 믿은대로 될지어다”(13절)(개인적으로 저는 이 구절을 가장 좋아합니다)고 선포하시자 그 즉시 집에 있던 하인이 나았습니다(8:5~13).
3) 그 다음으로 베드로 장모의 열병치유가 소개되고(8:14~17), 9장에 가서는 네 명의 친구들이 중풍병에 걸린 친구를 침상에 누이고 예수님에게 나아와 고침을 받은 이야기가 나오고(9:1~8), 이어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하는 한 여인이 예수님의 겉옷을 만지고 치유를 받은 사건이 기록되었습니다(9:18~26). 이후 두 맹인의 치유(9:27~31), 말 못하는 벙어리의 치유(9:32~34),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의 치유(12:9~21), 그리고 갈릴리 호숫가에서의 종합치유사역, 즉 다리 저는 사람과 장애인, 맹인과 벙어리, 기타 여러 병자들의 치유사역들(15:29~31)이 소개되고, 마지막으로 간질 들린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는 치유사역(17:14~20)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는 늘 병자들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해줍니까? 이들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비록 세상에서는 버림받고 고통받고 부귀영화를 누리지 못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이들이 구원받고 영생 복락을 누리는 최우선적인 백성들임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6~29)
반면에 세상의 부와 권력을 가지고 누리고 행세하는 자들은 이미 그들 자신이 그들의 나라이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보다는 자신들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애쓰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의 나라에 하나님이 개입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특히 자신들의 나라에 추하고 약하고 병든 자, 가난한 자들이 기웃거리는 것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런 사회적 약자들을 벌레 취급합니다.(최근에 한국영화 ‘기생충’에서 보여준 부자들의 행태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특히 이런 자들은 어린아이들을 싫어합니다. 그들에게 어린아이들이란 시끄럽고 제 맘대로 뛰놀아 귀찮고 통제하기 힘든 존재들입니다. 아이들도 이런 어른을 본능적으로 싫어한다고 합니다.(어른을 보고 아이들이 울음을 터뜨리면 그 어른에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ㅎㅎ).
물론 아이들에겐 이중성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측면에서 아이들은 어른 말을 듣지 않습니다. 제 하고픈 대로 행하는 작은 악마들입니다. 배고프면 울고 졸려도 울고 조금만 몸의 조건이 어긋나도 울고, 그러다 한 번 울음이 터지면 도저히 멈추지 않는 매우 짜증나는 존재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아이의 이 부정적인 모습만 보고 있다면 그는 분명 아이를 싫어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의 눈을 들여다 보세요. 그 눈 안에 들어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 어떤 불결함도 없는, 그 어떤 불안함도 없는 맑고 고요한 천국입니다. 아이들보다 더 투명한 눈을 가지 존재를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까?
이런 아이에 대해 우리는 하나의 교훈을 얻습니다. 하나는 겉으로는 드러나는 것에 집착하면 그것은 본질을 보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겉모습만 보면 아이는 귀찮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아이의 속을 들여다 보면 아이는 천사입니다.
“한 식당에서 아이들이 마구 뛰놀며 시끄럽게 굴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한 사람이 큰 소리로 ‘조용히 해’ 하고 고함을 쳤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계속 뛰놀았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이 사람이 그 부모를 향해 소리를 쳤습니다. ‘대체 얘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 거요’하고 나무랐습니다. 그때 옆에 있던 한 노인이 ‘아니 애들이니까 당연히 뛰노는 것 아니냐’며 호통치는 사람을 핀잔을 주며 주머니에 있던 사탕 한 웅큼을 꺼내 애들에게 나누어 주자 애들이 금새 조용해졌습니다.”
보통 심리적으로 애들에게 호통치는 사람의 경우 자신 안에 가지고 있는 분노 조절이 잘 안 되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말합니다. 요즘 들어 분노를 폭발하는 사람들이 늘어간다고 합니다. 이 모두 성장 과정에 있어서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했거나 아니면 지독히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라 합니다. 어릴 때 자녀들을 많이 사랑해 주세요. 그러나 반드시 절제와 통제를 함께 하는 품격있는 사랑을 나누어 주시길 권합니다. 인생은 혼자가 아니라 공동체라는 사회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또 인생은 ‘나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이어야 합니다.
2. 본문 이야기
자, 오늘도 불쌍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습니다. 있는 자들, 누리는 자들, 높은 자리에 있는 자들이 아니라 버림받고 병 들고 삶에 지친 자들이 예수님에게서 구원의 빛을 보고 몰려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앞에서 소개한 혈루증 여인처럼 예수님이 자신을 한 번이라도 만져주시길 고대하며 다가섭니다. 그런데 오늘은 특별히 사람들이 자신의 아기들을 모두 안고 예수님에게로 온 것입니다.
잠깐, 여기서 좀 의아한 것은 15절에서는 ‘어린 아기들’(infants)이라 했고 16절에서는 ‘어린아이들’(children)이라 했는데, 15절의 아기는 ‘유아’를 말하고 16절은 주로 서너 살 이후의 ‘어린 아이’를 가리킵니다. 이 둘을 어떻게 연결시켜야 합니까? 가장 쉬운 방법은 부모들이 갓난 아기는 품에 안고 왔고, 걸을 수 있는 어린아이들은 손을 잡고 예수님에게로 왔다고 하면 해결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풍경은 제자들 입장에서는 못마땅한 것이었습니다. 제자들 입장에선 예수님이 지금 워낙 많은 사람들을 돌보아야 하는데 사람들이 눈치도 없이 아기들까지 동원하면 언제 이 많은 사람들을 다 돌볼 수 있는가 하고 염려가 된 것입니다. 물론 이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예수님을 위한답시고 예수님 주변을 둘레를 치고 불친절의 모습을 보인 경우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1) 제자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보고 그것을 금했다고 하자 주님은 이를 금하지 말라고 하시며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고 가르쳤습니다(눅 9:49~50)
2) 예수님이 두로와 시돈 지방에서 사역하실 때 한 가나안 여인이 나와서 자기 딸이 귀신 들렷다고 하소연 하자 제자들이 그 여인을 제지합니다. 이에 주님은 짐짓 그 이방인 여인을 시험하듯이 “자녀의 떡을 취해 개들에게 주지 않는다”고 하자 그 여인은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하였고 이에 주님은 “여자여 네 믿음이 크다”고 칭찬하고 그 딸을 고쳐주셨습니다(마 15:21~28).
이런 제자들의 행태를 보면서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주님의 생각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분명히 이러한 태도는 예수님이나 하나님의 태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마5:44)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와같이 한다”(46절)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가리는 분이 아니십니다. 바다가 세상의 모든 오염물을 다 받아들이듯이 예수님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을 자신의 품에 안으십니다. 특히 병들고 지치고 고난 중에 있는 역한 이들을 제일 먼저 돌보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이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꾸짖었습니다(15절). 여기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는 한없이 다정하고 너그러우신 예수님이 유독 제자들에 대해선 가혹하리만큼 엄중하게 대하시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이 대목이야 말로 예수님이 제자들을 지극히 사랑하심을 엿보게 합니다. 진짜 참 부모와 스승은 자식과 제자가 잘못을 범할 때 엄하게 문책하기를 주저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중에 더 큰 실수나 잘못을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명심해야 할 것은 ‘좋은게 다 좋은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받아야 할 벌을 받지 않고 눈 감아 주면 당장은 좋아 보이지만 그것이 더 큰 일로 확산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입니다. 가장 나쁜 교육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지람을 들은 제자들은 순간적으로 움찔한 모양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아이들을 제지하지 않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이런 자의 것“(16절)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여기서 ‘바로 이런 자’는 어린아이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법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문화적 개념들에 대해선 이미 11월 17일 46주차 설교를 통해 듣고 익힌 바가 있습니다. 복습을 위해 두 가지만 다시 거론해 봅니다.
① ‘하나님의 나라’는 히브리어로는 ‘말쿠트 야웨’이고 헬라어로는 ‘바실레이아 투 데우’이고 아람어로는 ‘말쿠타 디스마이아’이고 영어로는 ‘Kingdom of God’입니다.
② 하나님의 날에 대한 정의는 영역별 혹은 관점 별로 매우 다양하지만 광의적으로 세상을 포함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나라라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이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주권, 즉 통치권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임을 뜻하는데 이것을 다른 말로 정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통치영역 전체’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유일한 왕으로 통치하는 영원한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나라의 속성을 어린아이에 빗대어 설명하십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가장 순결하고 청정하고 깨끗하고 거룩한 나라의 속성을 비유적으로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린아이의 속성이 무엇이길래 주님이 어린아이에 비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하십니까? 이에 대한 성경의 설명을 세 가지만 찾아 봅니다.
첫째, 어린아이는 천진무구한 존재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갓난 아기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
~ 이 가르침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슴을 사랑해야 하는가에 대한 교훈입니다. 엄마 젖을 먹는 아기보다 더 순진무구한 모습이 어디 있습니까? 젖을 먹는 아기는 완전히 충만한 만족감에 젖은 상태입니다. 우리는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먹을 때 이런 포근함과 충족감을 가지고 있습니까? 더 중요한 것은 우리는 구언을 이미 받았지만 구원에 가까이 가도록 힘쓰고 애쓰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뜨거운 사랑입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
~ 세상에 아기보다 엄마를 사랑하는 존재는 없습니다. 그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가장 열렬한 사랑입니다. 아기는 한 시도 엄마 품을 떠나지 않으려 합니다. 그 자체가 뜨거운 사랑인 것입니다.
셋째, 정직입니다. 어린 아이는 거짓말을 못합니다. 설상 한다 해도 강하게 추궁하면 금방 실토하고 맙니다. 그만큼 마음이 순결하다는 반증입니다.
”진실한 입술은 영원히 보존되거니와 거짓 혀는 잠시 동안만 있을 뿐이니라“(잠12:19)
~ 하나님은 이런 순전한 입술을 종하아하십니다.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하게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22절)
이제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깨달았습니다. 이 나라는 어떤 욕심도 없은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하고 청결하고 마음이 깨끗한 자들의 나라임을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이 나라에는 어떤 사람이 들어갑니까? 그 답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드디어 예수님은 17절에서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들처럼 받든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는 자세가 어린아이처럼 순전 무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가지 마음으로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마음을 품은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가령,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들을 바라보세요. 그들은 선물 그 자체를 완전 만족하고 기뻐합니다. 이 어린아이에겐 두 마음이 존재치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이런 순전한 기쁨을 가진 자들의 나라입니다. 도무지 억지로 그 나라에 들어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또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이 나라에 들어가는 자는 최고의 선물, 최고의 행복, 최고의 만족을 얻었기에 더 이상 다른 것을 요구하거나 더 많이 가지려 욕심을 부릴 필요가 없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3. 결어
오늘 우리는 한 마디로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아이들의 나라임을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비록 우리가 어른이라 할지라도 마음은 어린아이처럼 순결하고 정직하고 순수한 사랑의 존재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는 이 모든 보화들을 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좋은 선물을 받아도 액면 그대로 믿지 못하고 의심합니다. 다른 사람의 호의를 의심하고 무슨 궁꿍이가 있을 거라고 지레짐작합니다. 우리의 입술은 이미 거짓에 오염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겸손의 잘에서 일어선 지 오래입니다. 우리같이 오염되고 더럽고 불량한 죄인들을 세탁하고 다듬어서 천국에 데리고 가시려는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얼마나 놀라울 뿐인가요?
그러므로 오늘 교훈은 교육입니다. 이 교육은 되도록 어릴 때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대개 학습심리학에선 인간이 36개월차의 언어발달기를 지나면 7살을 전후로 기초적 인격이 형성되고 만 13세 전후로 이 인격과 습관과 태도와 인식능력 등이 고착화된다고 합니다. 이후로 성인이 되고나면 정말로 고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에 올바른 자녀교육의 성경적 원칙이 무엇인지 알아봅니다.
첫째, 올바른 자녀교육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 오늘날은 자녀교육에 장애되는 요소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여기엔 외적인 요인과 내적인 요인들이 있습니다.
① 외적인 요인들: 빈번한 공간적 이동으로 안정감의 결여. 과학문명기술의 발전으로 비인간화 문화가 가속화됨, 세속화에 따른 여러 부작용들(마약, 술, 성적 타락 등), 가정의 파괴(이혼, 별거, 불화 등),
② 내적이 요인들: 자아 도취(자기중심, 이기심 등), 인간관계 형성의 미숙(컴퓨터와 핸드폰의 영향), 반권위주의, 상호헌신의 결핍 등
둘째, 모든 자녀교육의 출발은 가정교육에 있습니다.
~ 가정은 신앙교육의 장으로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유지 발전시키는 1차적인 기관이며 교회의 원형입니다. 자녀를 하나님의 진리로 양육하는 근본적인 책임은 가정에 있습니다. 자녀를 싱앙으로 올바르게 교육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오늘 내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이든지 길을 갈 때이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이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6:6~7)
셋째, 무엇보다 자녀교육에 대한 부모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 자녀 대한 부모의 바람직한 태도는 먼저 자녀가 자신의 육신의 자녀 이전에 하나님의 자녀라는 점을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청지기의식’입니다. 즉 부모는 하나님의 자녀를 맡아 바르게 양육해야 할 책무를 지닌 하나님의 청지기라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모든 자녀의 인격을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명령에 부합시켜야 합니다. 이를 위해 먼저 부모가 언행일치의 삶을 살도록 해야할 것입니다. 부모의 모범이 무엇이냐에 따라 자녀가 그렇게 성장합니다. 다만 이 모든 교육은 자녀들이 자발적으로 따를 수 있도록 부모가 잘 조정하고 뒷바라지를 해야 합니다.
우리 자녀는 육신의 부모의 자랑이자 기쁨이기도 하지만 1차적으로 하나님의 자랑이자 기쁨입니다. 특히 멋진 자녀의 등장은 하나님과 온 세상을 기쁘게 합니다. 그런 자녀를 양육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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