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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더 참고 기다리자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9. 12. 11.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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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주차. <사마리아여행>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리자 12.8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31).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32), 그들은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도(33),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추어졌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느니라”(34) (18:31~34)






수난에 대한 세 번째 예고




예수님은 세 차례에 걸쳐 자신의 수난을 제자들에게 예고하셨습니다.

~ 첫 번째 예고는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베드로로부터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을 들으신 후에 하신 말씀입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16:21, 8:31, 13:33)

~ 두 번째 예고는 변화산에서 내려와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신 후 제자들의 약한 믿음을 꾸짖으신 다음 갈릴리로 돌아온 뒤에 하신 말씀입니다.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17:22~23, 9:31, 17:25)

~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자신의 십자가 사건에 대해 제자들에게 세 번째로 예고하시는 말씀입니다. 동일한 기록은 마 20:17~19와 막 10:33~34에서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의 말씀을 하신 시기와 정확한 장소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행적을 살펴보면 대략적인 추정이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인근 지역인 베레아까지 왔다가 다시 갈릴리와 사마리아 경계지역으로 올라가시어 그곳의 문둥병자들을 치유하신 다음, 잠시 갈릴리로 들어가셨다가 그곳을 출발하여 다시 베레아를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추측건대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에 매우 가까운 인근 지역에 당도하신 것으로 봅니다. 오늘 본문 비로 이어지는 구절에는 예수님이 여리고 가까이 있다고 하고 1911절에서는 예수님이 예루살렘 가까이 오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알다시피 여리고와 예루살렘은 십리 길도 안 될 만큼 가까운 거리입니다.




2.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길



여기서 우리는 잠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합니다. 지리적으로 예루살렘은 해발 약 900m에 위치한 고지대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 가기 위해선 어느 지역에서든 그곳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표현이 맞습니다. 마치 등산하듯이 오르는 길입니다. 교회사에서 보통 순레자들이 예루살렘을 많이 찾았는데 그들은 길을 올라가면서 빈손을 가지 않고 항상 제물을 들고 갔다고 합니다. 맨몸으로 올라가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 것을 생각하면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는 것이 단순히 방문하는 의미와는 사뭇 다른 어감을 줍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비통’(deep sadness)일 것입니다. 이것이 예루살렘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을 향해 한 걸음씩 발걸음을 옮기고 있습니다. 철없는 제자들은 이 방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의 수준에서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마 이번 방문에서 무언가 큰일이 터질 것 같다는 막연한 예상을 하는 정도이었을 것입니다. 어떤 야심가는 예수님이 드디어 로마 당국자들을 추방하고 이스라엘의 권세를 잡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날이 오면 한 자리씩 차지하고 여생을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꿈을 꾸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은 자기 수준만큼 생각하고 상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예루살렘행은 그리 한가한 방문이 아닙니다. 눈으로 풍경을 즐기며 담소를 나누며 오르는 길이 아닙니다. 이 길은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여행입니다. 이 여행의 유일한 목적은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가 십자가에서 위대한 구속의 사역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순례자들은 제물을 들고 올라가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마음으로 오르는 길입니다.




제물(sacrifices)이 무엇입니까?

~ 첫째 제물은 죽임을 당합니다. 고귀한 생명의 희생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구하시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제물로 내어놓은 것입니다.

~ 둘째, 제물은 피를 흘립니다. 피 흘림 없는 구속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피를 흘리셨기에 우리에게 더 이상의 희생이 요구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가 치루어야 할 죄 값을 피 값으로 사시어 대신 값을 치루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대속이라 합니다.

~ 셋째, 발가벗겨집니다. 이것은 멸시와 조롱을 겪는 치욕적인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알몸이 되신 채 치욕을 겪으셨습니다. 이 치욕으로 우리에게 오직 영화로운 일이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능욕으로 우리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 넷째, 뼈가 꺾어집니다. 이것은 몸의 근본이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모든 근원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영적인 생명을 주시기 위한 사전정지작업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더이상 육적인 일에 매달리지 말고 오직 영적인 일에 힘스라는 가르침이 담긴 것입니다.


~ 마지막 다섯째, 불태워집니다. 태워지고 나면 재밖에 남지 않습니다. 육적인 인생의 허무함이 보입니다. 육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결국 한 줌 재로 돌아갑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제물이 되시어 육체적인 모든 장벽을 허무시고 그 한계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교훈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를 또 놀라게 하는 것은 바로 이 제물되는 일을 700년 전에 살았던 이사야 선지자가 그대로 예언을 했다는 것입니다. 532절부터 6절까지의 말씀입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리l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3. 보라



다음으로 예수님의 비통한 심정이 드러나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31절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시면서 하신 첫 번째 말씀인 보라입니다. NIV를 비롯한 어떤 영어성경은 이를 생략했고, ESV는 단순히 ‘see’라고 했지만 헬라어 Ιδου’(이두)는 영어로 ‘behold’에 가깝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직시하고 잘 새기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 이때가 매우 중요한 시기이고 여기서부터는 매우 중요한 장소이므로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모든 발생하는 일을 잘 듣고 심중에 새기라는 엄중한 당부가 담긴 말씀입니다.




최근 들어 몰입이론’(Flow Theory, Thinking Hard)이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황농문 서울대 재료공학과 교수의 <몰입>이라는 책은 베스트셀러를 기록 중입니다. 그는 도전이 없으면 몰입이 없다고 강조합니다. 인간은 도전할 때, 가장 극적인 순간에 최고의 몰입 즉 집중력을 발휘하고 능력을 발휘하고 즐거움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론이 인기를 끄는 것은 그만큼 요즘 아이들이 집중력을 상실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지난주에 썸 학원 초 6학년생을 대상으로 잠시 실험을 해보았는데 한 아이는 잠시도 몸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계속 중얼거리거나 고개를 돌리거나 딴짓을 하였습니다. 물론 그 아이는 자신이 그런 행동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아이는 조금 전에 꺼내놓았던 이야기를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 아이는 그저 보이는 대로 보고 생각나는 대로 찌껄이고 다른 사람이 말하고 있는 중인지 무엇을 하든 관계치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라도 직시하고 집중하여 진지하게 생각하는 기능이 완전히 상실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완전히 그 아이는 아이들의 그룹 안에서 뚱딴지같은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남들은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다른 주제를 꺼내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미래사회의 인간들의 주된 양태를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미래사회의 사람들에게 제일 먼저 쇠퇴하는 기능은 뇌 기능이라 진단합니다. 뇌는 기억하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올바른 결정을 내리도록 지휘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기능이 쇠퇴하면 인간은 그저 기계적인 존재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지나친 기우이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요즘 아이들의 행태를 보면 이것이 기우가 아닐 것 같아 걱정입니다. 무엇이든 정확히 보지 못하고 대충 보고 흘려버리면 인간의 기억 속에 저장되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이제 더이상 미래사회의 사람들은 설교마저 듣지도 못하겠다는 우려가 커져만 갑니다. 그리스도인들부터 자녀교육에 더욱 신경 쓰고 성경대로 자녀들을 잘 키워야 하겠습니다. 물론 제 개인적으로는 이런 권면의 말을 제가 하고 있지만 크게 기대하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도 스스로 이런 일을 그닥 중요한 일로 여기지 않고 그냥 흘려버릴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해 무엇을 보라고 말씀하십니까? 32절과 33절에 이어집니다.

~ 첫째, 예수님이 이방인의 손에 넘겨지는 현장을 분명히 보고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유대 사회에서 유대인이 이방인의 손에 넘겨진다는 것은 하나의 치욕입니다. 이것은 제물이 되시는 예수님의 처참함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에는 이것을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팔리울 것”(10:33)이라고 다른 기록을 합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아예 이방인 취급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 둘째, 치욕의 내용들이 열거됩니다. 희롱(mock)과 능욕(shame), 침 뱉음(spit) 등입니다. 특히 침을 얼굴에 뱉는다는 것은 최고의 모욕을 상징합니다. 이는 더이상 같은 동족도 아니며,같은 신분으로도 대우하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그리고 채찍질 당하고 죽임을 당합니다.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이런 치욕을 당하시는 것입니까?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것처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주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무죄하신 분이 유죄선고를 받고 사형에 처해져야 할 우리를 대신하여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4. 부활하심



그러나 33절의 마지막 선언은 우리를 들뜨게 합니다.

그는 삼 일만에 다시 살아나리라



이보다 더 극적인 선언은 없습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쉬이 믿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분명한 어조로 이 사실을 똑똑히 보고 주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자가 되라는 뜻으로 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사에서 주님의 이 수난예고를 다른 방향에서 해석하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이 예고는 미래에 일어날 자신의 이야기를 예언한 것이 아니라 그냥 앞으로 발생할 사건 사고에 대한, 누구라도 직감할 수 있는 그런 수준의 단순한 예감이었을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과연 그런 것이었을까요? 단순한 예감이었다면 이렇게 상세히, 정확하게 미래의 사건을 열거하며 거론할 수 있을까요? 더욱이 우리는 예수님이 앞서서 너무나 많은 일들에서 신적인 능력을 나타내신 증거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의 한 우물가에서 이전에 결코 만나보지 못한 한 여인이 수차례에 걸쳐 결혼을 했었다는 사실을 공개했습니다(4:17~18). 예수님은 물고기의 입에 무엇이 들어 있을지 다 알고 계셨습니다(17:27).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 일주일 전에 나귀 새끼 한 마리가 매여 있는 장소와 그 나귀의 임자들이 나귀를 가져가려는 자들에게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다 알고 계셨습니다(19:29~33). 이런 일을 열거하자면 세상의 모든 노트가 부족할 것입니다. 이것은 점쟁이들처럼 억지로 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으로서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예고는 자유주의자들이 불신하는 그런 차원의 예단이나 예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대한 구속사의 주인공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인류의 구원을 위한 중요한 시점 앞에서 자신의 뒤를 이어 증언자들이 될 제자들에게 확실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를 안타깝게 하는 것은 34절을 보세요.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이 예고가 무엇을 뜻하는지 깨닫지 못합니다. 그 이유를 성경은 말씀이 감취어졌기 때문이라 설명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불신자들에게 열심히 전도를 함에도 그들이 듣지 않는 것은 교리적으로 그들에게 아직 말씀이 열리는 때가 임하지 않은 것입니다. 모든 구속사의 일에는 하나님의 ‘(카이로스)’가 있습니다. 우리는 내 주변에 있는 모든 불신자들, 설사 그들이 택함을 받지 못한 자녀들이라 할지라도 열심히 하나님의 때가 이르러 그들의 귀에 복음의 말씀이 들려지도록 힘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힘든 일이지만 어느 날 갑자기 불신자의 눈이 뜨지고 귀가 열려져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기 시작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 날을 고대하며 열심히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환경을 통해 무엇보다 당신이 기도하는 습관을 가지도록 유인하십니다. 그러므로 불신자를 참고 기다리며 인내하고 낙심치 않으며 기도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하는 길이 아니라 바로 당신을 위한 길임을 깨닫기를 소망합니다.



이것이 바로 극적인 부활입니다. 이 부활을 위해 우리 모두 인내해야 합니다. 주님도 부활을 위해 고초를 직접 겪으시고 희롱을 당하시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무엇이건대 조그만 치욕과 자존심 상함을 견디지 못하여 주님의 뜻을 거스르고 참지 못하고 복음전파와 증거사역을 중단한다면 주님의 수난과 부활의 은덕을 저버리는 것이 될 것입니다.



주님도 참고 견디시면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 처참히 죽임을 당하셨지만 마침내 부활로 승리를 선언하신 것처럼 우리 인생에도 드디어 승리의 나팔소리가 울릴 것입니다. 조금만 참고 지내시길 바랍니다. 좋은 결과가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팔소리가 내 인생의 드라마 주제가가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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