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주차. <사마리아여행> 두 개의 선물 2019.11.10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11),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 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12),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13),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14). 그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15),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1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17).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18),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19)”(눅 17:11~19)
문둥병자들의 마을
오늘 본문에서 제일 먼저 살펴야 할 점은 예수님이 거신 장소에 대한 지식입니다. 알다시피 14장부터 17장 10절까지에서 예수님은 주로 요단강 근처의 베레아지역에 머물며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예루살렘을 코앞에 두고 다시 북쪽 지역에 있는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가셨습니다. 대다수 학자들은 이곳이 사마리아와 갈릴리의 경계선에 있는 이스르엘 골짜기 인근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경 주석가인 핸드릭슨은 좀 더 정확한 장소를 소개하는데 그곳은 ‘벧산’이라는 지역입니다. 이스르엘 평원과 요단 계곡의 갈래길에 위치한 곳으로 전략적으로 중요한 성읍 중의 하나입니다. 역사적으로 여호수아 시대에 이곳을 점령하려다가 가나안 원주민들의 격렬한 저항으로 초기에는 점령을 하지 못한 곳입니다. 무엇보다 이 성읍이 유명한 것은 바로 사울 왕이 블레셋으로부터 이 성을 빼앗으려다가 전사했고 그와 그 아들들은 목이 잘려서 이 성의 성벽에 전시된 비운의 장소입니다(삼상 31:9~12). 이후 다윗 왕이 이곳을 완전히 점령하고 이스라엘 영토로 편입시켰습니다. 그 후 이곳은 사회적으로 격리될 필요가 있는 사람들을 모아 따로 관리하던 곳으로 사용된 것으로 봅니다.
아무튼 이런 역사적 배경을 안고 있는 성읍에 예수님이 방문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한 촌에 들어가셨습니다. 정확한 장소는 기록되지 않아 모르지만 이 마을에는 문둥병자들이 모여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앞에서 설명한 역사적 사실을 떠올리게 합니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이곳에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구분 없이 섞여 산다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경멸하며 접촉을 꺼려하지만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 이런 구별은 하찮은 것입니다. 동병상련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들은 같은 처지의 사람끼리 서로 사랑하고 돌보아 주며 어렵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일례로 사람들이 제일 화목하게 잘 지내는 곳을 꼽으라면 단연 병원입니다. 같은 병실에서 간혹 까탈스러운 환자도 있지만 대개는 같은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라서 서로 위로하고 서로 안부를 묻고 서로 챙겨줍니다. 인지상정이라는 것을 만났을 때 비로소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을 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호의를 받았을 때 왜 내가 그동안 모질게 살았을까 하고 후회가 되어 조금씩 겸손해지고 부드러워지는 게 아닌가 봅니다. 반대로 가장 잘 싸우는 곳은 감옥입니다. 이러 저런 죄를 지어 감옥에 갇혔다면 상식적으로는 반성하고 죄를 뉘우치고 조용히 살아야 할 터인데 대부분 죄수들은 자신의 죄가 억울하데 당한 경우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조그만 일로 서로 다투고 고함치고 싸우기 다반사입니다. 이것이 죄인의 특징인 것입니다. 죄인들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를 거부합니다. 특히 하나님이 자신의 죄를 추궁하는 따위의 조언이나 충고를 격렬히 반항하고 대적합니다.
이런 마을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아마 이들도 풍문으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으로 봅니다. 자신들도 다른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쫓아다니면서 병을 고침받고 싶었지만 알다시피 문둥병자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들로 여겨지고 유대인의 법에 격리된 삶을 살아야 하기에 자신들이 예수님을 직접 만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신들의 마을에 찾아오시자 열 명의 문둥병자들이 멀리서부터 소리를 지르며 예수님을 부르며 간청합니다. 얼마나 소리쳤는지 헬라어로 ‘αιρω’(아이로)라는 동사가 사용되었는데 영어 성경은 이를 lift로 번역합니다. lift는 ‘어떤 물건이나 상태를 최대한 들어올리다’라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문둥병자들은 예수님을 먼 발치에서부터 보자마자 젖먹던 힘까지 다 사용해 ‘예수 선생님’하고 불렀습니다(13절). 특이한 것은 이들이 예수님을 ‘선생님’이라 부른 의미가 남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부른 ‘선생’은 헬라어로 ‘επιστατα(에피스타타)’라는 단어이고 영어로는 master’로 번역되었는데 이는 오직 누가복음에만 사용된 단어로서 일종의 ‘랍비’(막4:38)에 해당하는 용어이지만 다른 점은 성경에서 이 호칭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부를 때 사용한 단어라는 것입니다. 즉, 제자들은 예수님을 단순히 랍비로만 인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그 권위를 물려받은 분으로 인식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문둥병자들이 예수님을 이렇게 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이들은 예수님을 하늘의 권세를 부여받아 자신들의 병을 고쳐줄 구원자로 인식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2. 간절한 목소리
그들의 목소리는 간절한 것이었습니다. 무엇이든 간절함이 통하는 법입니다. 간절한 사람은 먼저 눈빛부터 다릅니다. 진심을 담은 눈빛은 애처롭고 절실함을 담고 있습니다. 여기에 온 힘을 다해 부르짖는 간구의 목소리는 힘이 있습니다. 이런 목소리를 들은 사람은 쉽사리 그 요청을 뿌리치지 못합니다. 예수님도 그렇습니다. 멀리서 이들의 소리를 들으신 것입니다. 소리가 없었다면 그냥 지나칠 것인데 예수님은 소리 나는 곳을 바라보셨습니다. 14절을 첫 마디를 보세요. “보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헬라어로 ‘ειδω’(에이도)입니다. 일반적으로 ‘본다’라는 단어는 ‘βλεπω’(브레포)인데 ‘에이도’는 ‘분명히 의식하고 인지한 상태에서 주목하고 본다’는 점에서 더욱 사실적이고 적극적인 용어입니다.
예수님은 드디어 열 명의 문둥병자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레 14:2에 따르면 문둥병자가 제사장에게 자기 몸을 보이는 경우는 문둥병이 다 나았을 경우에 해당됩니다.
“나병 환자가 정결하게 되는 날의 규례는 이러하니 곧 그 사람을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
그런데 예수님은 아직 병이 낫지 않은 병자들에게 제사장에게로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문둥병자들은 하나같이 예수님의 말씀에 복종했습니다. 아직 완치되지 않은 몸을 이끌고 갔다가 제사장에게 호된 질책과 벌을 받을지도 모르는 일임에도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에 힘입어 용감하게 제사장에게 갔습니다. 아마 힘차게 달음박질을 하며 갔을 것입니다. 그러자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이 가던 도중에 어느새 문둥병이 깨끗이 치유가 되었습니다. 14절 하반부는 이것을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3. 하나님께 영광
얼마나 기뻤을까요? 평생 저주의 몸을 안고 살아왔던 그들의 몸이 깨끗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누구나 아픈 몸이 회복되었을 때의 몸 상태와 생기와 활력을 느꼈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고침을 받은 사람들 모두가 고쳐준 분에게 나아와 감사의 인사를 하거나 특히 제일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은 드물다는 것입니다.
15절을 보세요. 지금 열 명 모두가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고 가던 길에서 돌아와 먼저 예수님께 감사의 인사를 한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은 어디로 갔을까요? 성경은 이 부분에서 침묵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행선지는 오직 한 곳입니다. 그들은 즉시 제사장에게로 달려가서 먼저 자신의 신원부터 회복받는 일부터 처리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한 사람, 특히 이 사람은 18절의 언급에 의하면 이방인 한 사람만이 자신의 몸이 깨끗해진 그 순간에 즉시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고 가던 길을 돌이켜 먼저 예수님에게로 달려온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는 일은 천천히 해도 관계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한사람과 나머지 아홉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나머지 아홉은 자신의 유익부터 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꼴도 보기 싫어하던 이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에게로 돌아와 그 발아래 무릎을 꿇고 사례를 하였습니다. 한글 성경으로 보면 ‘사례’라 함은 어떤 물질을 포함한 의미가 됩니다만 원어 성경과 영어 성경 모두 단순히 ‘감사를 드렸다’는 뜻의 ‘ευχαριστω’(thank)를 사용했습니다. 이런 점을 두고 물질을 강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이방인들, 특히 불신자들보다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예절이나 도리를 무시하고 비인격적인 행동거지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경우를 자주 목격합니다. 특히 누가복음에는 이런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사마리아인의 선행에 대해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이러한 사실을 목도하고 주님의 가르침을 받은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보다 더 나은 점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한국의 교회들이 세상으로부터 질책을 받고 조롱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깨닫고 더욱 빛과 소금으로서의 사명을 다함에 부족함이 없도록 각별히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4. 구원의 선포
드디어 결론입니다. 깨끗함을 받은 열 명의 문둥병자들 중 겨우 한 명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돌아왔으니 예수님은 참으로 서글펐을 것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모든 목회자들이 이런 기분과 감정을 한 번쯤은 가져보았을 것입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목회를 한다고 했는데 말씀으로 열심히 양육한다고 햇는데 여전히 성도들이 어린아이처럼 미숙하고 잘못된 신앙을 버리지 못하고 있음을 볼 때 목회자로서 가장 마음이 아플 때입니다.
저는 여기서 예수님의 심정을 십분 이해합니다. 그나마 한 명이 유대인도 아니고 사마리아인입니다. 하나님의 민족으로서 다른 민족들보다 훨씬 더 큰 축복을 받은 유대인이면서 여기서는 한 명의 사마리아인보다 훨씬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짐짓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보다 더 깊은 탄식은 없을 것입니다. 얼마나 실망하셨으면 나머지 아홉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시겠습니까? 물론 그렇다고 예수님이 옹졸한 마음을 가졌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에 대해 누가는 이미 이렇게 소개하였습니다. 6:35을 보세요.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또 마 5:45을 보세요.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우리 하나님은 이렇게 인자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악인이든 선인이든 모두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차별을 두지 않으시지만 누구보다 자신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시는 것을 바라십니다. 즉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에게도 그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 일반은혜 안에서 사는 것을 허락하시지만 무엇보다 당신 자녀들의 인생은 특별은혜와 함께 구원의 감격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할 것을 요청하십니다. 하나님은 불신자들의 선행을 통해 영광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택하신 당신의 백성들의 참된 믿음의 일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이 아니면 하나님을 진정으로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마리아인을 위해 예수님이 해야 할 당연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의 믿음과 함께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19절에서 예수님은 이 사마리아인을 향해 가장 위대한 선언을 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이보다 더 큰 선물은 없습니다.
이 비참한 사마리아인은 어릴 때부터 문둥병에 결려 이 외딴 마을에 감금된 채 외로이 살아오면서 자신의 인생을 비관하고 슬퍼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인에게 획기적인 일이 나타났습니다. 무엇보다 문둥병이 고쳐진 것만 해도 감지덕지 한 일인데 그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이라는 특별선물을 하나 더 받은 것입니다. 즉, 두 개의 선물을 동시에 받은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단지 문둥병만 고침을 받은 나머지 아홉과 다른 점입니다. 아마 아홉 명의 사람들은 치유받은 몸으로 살다가 구원을 받지도 못하고 쓸쓸히 죽어갔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특별히 구원을 받은 형제자매 여러분을 축하합니다. 이보다 더 좋은 복이 없음을 알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립시다. 우리 주님 앞에 나아와 무릎 꿇고 감사를 드립시다. 그리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갑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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