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주차. <사마리아여행> 너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 2019.11.17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20),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21).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22).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23). 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24).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25).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26).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건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27),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28),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29).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30). 그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31). 롯의 처를 기억하라(32).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33).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34),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35). (없음).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어디오니이까 이르시도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7:20~37)
하나님 나라
특히 누가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습니다. 관심뿐 아니라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을 토대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가장 궁극적인 목적을 바로 이 ‘하나님의 나라’에 두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히브리어로는 ‘말쿠트 야웨’이고 헬라어로는 ‘바실레이아 투 데우’이고 아람어로는 ‘말쿠타 디스마이아’이고 영어로는 ‘Kingdom of God’입니다.
하나님의 날에 대한 정의는 영역별 혹은 관점 별로 매우 다양한데 이는 세상을 포함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나라이고 또 이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주권, 즉 통치권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정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통치영역 전체’를 가리킵니다.
대신에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스라엘 혹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와 동일시되기도 합니다. 가령 대상 28:5를 보세요. 다윗 왕은 이스라엘의 고관대작들과 모든 장로들과 용사들을 예루살렘에 소집하고 이렇게 소회를 발표합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여러 아들을 주시고 그 모든 아들 중에서 내 아들 솔로몬을 택하사 여호와의 나라 왕위에 앉혀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려 하실새” 그의 이 발언을 검토해 보면 평소에도 그가 얼마나 여호와의 나라 중심 사상으로 똘똘 뭉쳐 있는 사람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특별한 것은 이 나라에는 야훼 이외의 다른 신들에 대한 숭배와 예배를 일체 허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나라, 즉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야웨를 유일신으로 믿고 섬긴다는 계약관계가 성립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예배 때마다 하나님을 ‘엘 엘욘’(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모든 신들의 으뜸이 되시는 분/창14:18, 신32:8, 시46:4)이라 부르며 경배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 인식은 남, 북조의 멸망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디아스포라로 인하여 급진적인 변화를 겪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되었던 나라를 잃어버렸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더 이상 팔레스타인 안에 머무는 분이 아니라 만유를 통치하는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유의 통치자로 여기며 “모든 신 들 위에 크신 왕”(시 95:3)이라 불렀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머무는 곳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나라가 다시 현실화되는 꿈을 꾸며 살았습니다. 이때부터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의 모습은 비통에 잠긴 모습이거나 가난한 백성들로 묘사됩니다. 이 비참한 현실에서 가장 필요한 분은 다시 지상에 영원한 이스라엘인 하나님나라를 건설할 ‘메시아’였습니다.
신약시대에 접어들면서 이스라엘은 로마제국 아래에서 신음했습니다. 그럴수록 하나님 나라와 메시아 대망은 커져만 갔습니다. 그래서 신약시대의 중심테마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에 의해 지상에 새로운 이스라엘이 세워질 것을 학수고대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시간이 지체되자 한편으로 내적이고 영적인 하나님 나라를 꿈꾸게 되었습니다. 이 두 개의 흐름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으로 새로운 차원으로 변모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곧 하나님 나라라고 천명했습니다. 진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전적으로 복종하며 자신을 드리는 개인들로 구성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르기스도를 구주로 믿는 성도들, 즉 하나님 자녀들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가리켜 “천국이 가까이 왔다”(마 3:2, 막 1:15, 눅 10:9, 11)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신학적인 해석은 사도 바울에 의해 시도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이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곳에선 “의롭지 못한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을 수 없다”(고전6:9-10)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나라는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아 누리는 사람들의 나라이며, 의롭고 거룩하며 참 사랑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들의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장 이상적이고 소망하는 이 나라는 모든 세상의 백해와 고난 후에 설립됩니다. 이 나라는 그리스도가 세세토록 왕위에 앉아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계 11:15가 이를 잘 말해줍니다.
“일곱 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셋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특히 하나님 나라를 논할 때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이 나라는 갑자기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계시록에 따르면 전쟁(9:1-12)과 재앙(13-19절)과 함께 맹렬하고 급속하게 나타납니다. 이 과정에서 인간 사회는 완전히 둘로 쪼개집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과 지상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 적대하는 관계로 발전합니다. 이럴 때 주님의 백성들은 수동적으로 그저 앉아서 기다릴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분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죽기 직전에 남긴 딤후 4장에서 “선한 싸움을 하였고”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말처럼 그는 살아온 것이 아니라 싸워 온 것입니다. 하루를 더 살려고 안간 힘을 쓴 것이 아니라 매일 죽으려고 싸운 것입니다. 일주일을 산다는 것은 일주일 만에 모든 힘과 정력을 다 쏟아붇고 죽겠다고 결심하고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할렐루야,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설립하고 지키며 확장하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런 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가리를 소망합니다.
2. 바리새인들의 관심
오늘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이 또 등장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만나자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느냐?”고 물었습니다(20절). 이렇게 질문을 던진 배경을 먼저 살펴보면, 당시만 해도 ‘주의 날’이 이미 도래했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을 때였습니다. 실제로 바울은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살후 2:1-2)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즉, 이 말은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함과 주님의 재림을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바리새인들이 주님의 부활을 수용한다고 했지만 정말 이들이 주의 부활과 재림을 믿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집니다. 왜냐하면 정말로 부활과 재림에 대한 확고한 신앙을 가진 자들이라면 주의 날이 인간적 차원에서 알 수 있도록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하나님은 이미 성경을 통해 계시해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 궁금증을 가진다는 것은 믿음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궁금증을 풀기 위해 다시굉장히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골라 예수님 앞에 던져 놓았습니다. 속으로는 예수라는 사람이 과연 이 난해한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마음을 숨긴 채 말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즉각적으로 바리새인들의 교묘한 질문에 응수합니다. 그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의 나라의 임함, 즉 주의 재림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20절)
~ 바리새인들은 확실히 육적인 일에 최우선적인 관심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들은 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가시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지상에 도래할 것을 고대했습니다. 그런 세상이 오면 자신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이 다른 민족들에 비해 우월적인 지위를 가지고 그들을 마음대로 부리며 살 것이라고 고대했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가 나타나지 않자 조바심이 났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냥 앉아서 기다리는 것보다 자신들이 세우자고 하였습니다. 이를 위해선 메시아가 필요한데 이 메시아는 유대인들에 의해 추대되면 된다고 결정하고 여러 대상자들을 찾아 물색중이었습니다. 예수님도 그런 후보자의 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나라는 특정 장소가 아니라 너희 안에 있는 것이다(21절)
~ 그러나 예수님은 이에 대한 답변으로서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본질에 대해 그릇된 오해를 품고있음을 먼저 지적합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 나라가 마치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으로 연출되는 한 편의 쇼처럼 전개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하고 마구 떠들어도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가시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에 숨겨진 영적인 차원에 있는 나라라고 선언하십니다.
~ 여기서 사소한 단어이지만 ‘~안에’라는 단어를 유의해야 합니다. 헬라어로 εντος인데 영어로는 withinn 혹은 inside로 번역됩니다. (ESV에선 in the midst of로 번역하였습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내포합니다.
①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은 가시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② 다른 곳에선 이를 ’성령 안에‘로 표현되고 이 안에 “의와 평강과 희락”(롬14:17)이므로 이는 내적인 품성을 지칭합니다. 이런 품성을 지닌 사람에겐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해 있다는 것입니다.
③ 반면에 이에 대한 반론이 존재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고 그러므로 21절의 ’너희‘는 질문을 던지 바리새인들을 지칭하므로 그토록 신랄하게 비난하던 자들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잇다고 한다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εντος의 올바른 번역은 among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다시 정리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중에 있다. 내가 여기 있고 나의 제자들이 너희 가운데 여기저기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를 반드시 바리새인이라고 한정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늘 곁에 있는 제자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3) 때가 이른다(22절). 그러므로 너희(제자들)는 여기다, 저기다 무수한 소문을 따라 돌아다니지 말라(23절). 단, 징조가 있는데 번개처럼 인자도 그렇게 다시 올 것이다(24절)
~ 때가 이른다는 말은 시간이 다가온다는 뜻입니다. 무슨 시간입니까? 하나님 나라에서 정해져 있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세상이 종말하는 바로 그 시간을 가리킵니다. 그 시간이 내일일지 천년 뒤일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말이 언제 도래할지에 대한 관심보다 오늘의 삶에 충실함이 더 중요합니다.
~ 그 날은 ’인자의 날 하루‘입니다. 그러나 그 날은 사전에 보지 못합니다. 미혹하는 자들이 인자가 이미 도래하여 어디엔가 숨어 있다고 소리칠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제자들은 그런 말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는 절대 비밀의 일인데 누가 그 비밀을 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실제로 그 나라가 도래하면 전 세계가 다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번쩍거리는 섬광이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번개처럼 비치고 주님의 영광의 빛이 커다란 나팔소리와 함께 온 하늘을 덮을 것입니다(24절).
4) 그러나 인자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고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받을 것이다(25절).
~ 이것이 필연적인 이유는 영원 전부터 있었던 하나님의 명령이 반드시 이행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영원전부터 삼위일체 하나님 간에 맺으신 구속의 언약에 따라 그 약속의 예언이 성취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선택된 자들이 그리스도의 고난의 대속하심으로 말미암아 속량을 얻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고난은 사실 인간적으로 감당하기 불가능한 엄청난 속량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죄악의 짐을 다 짊어져야 하는 속량입니다. 인간이 지은 죄악을 무게로만 계량한다면 온 우주만물의 무게를 다 합해도 턱없이 모자랄 만큼 무거운 것입니다. 이 무거운 짐을 주님이 스스로 지시고 죄의 값을 대신 치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받으신 고난을 가벼이 여기거나 함부로 취급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하는 일입니다.
~ 그럼에도 사람들은 거룩하고 고귀한 주님의 속량의 희생제사의 의미를 모르고 주님을 배척합니다. 그서을 25절에서 ’이 세대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는다;는 표현으로 하고 있습니다.
5) 엄청난 격변이 발생할 것이다. 즉 노아의 때에 홍수가 나는 것처럼(26~27절), 롯의 때에 하늘에서 유황불이 쏟아지는 것처럼(28~29절) 재림의 때에도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26~30절)
~ 주의 날의 도래는 마치 어떤 사람의 급소를 찌르듯이, 전혀 예상도 못하고 준비도 안 된 상태를 노리듯이 급습합니다. 노아의 시대에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롯의 시대에도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는 등 사는 일에 미쳐 있었습니다. 이렇게 인생들은 자신의 삶을 돌보느라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이런 인생들은 비단 노아의 때나 롯의 때 분 아니라 지금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들은 본성적으로 이기적이고 탐욕적이고 자기애에 함몰된 존재들입니다.
~ 이런 일을 두고 사람들은 “이같은 일이 왜 나쁜 것인가?”하고 물을 것입니다. 그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은 “전혀 나쁘지 않다”입니다. 인생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각자 자신의 인생을 열심히 사는 것은 죄악이 아닙니다. 각자 주어진 인생을 열심히 사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는 일입니다. 그러나 단지 육신의 일에만 치중함으로써 영적인 과업을 게을리함은 생명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축복이 아닌 저주를 받습니다. 노아와 롯이 왜 훌륭합니까? 당대의 사람들 절대 다수가 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살아찌만 노아와 롯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했습니다. 말씀대로 방주를 지었고 말씀대로소돔 성을 떠났습니다. 이 두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여 필요한 준비를 갖추었던 반면에 이에 아랑곳 하지 않았던 모든 사람들은 멸망을 당했습니다. 이 일은 주의 날에도 똑같이 반복될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이웃과 나의 일을 돌보는 지혜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생의 길입니다. 이런 점에서 늘 고전 10:31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6) 그러므로 자기 목숨을 구하려고 하지 말라. 구원하는 일은 하나님께 달렸다(31~35절).
~ 이제 주님은 우리에게 살 길을 제시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살려고 발버둥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있는 자리에서 기쁨으로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면 될 일입니다. 만약 당신이 택함을 받은 자녀이면 하늘로 들림을 받고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는 은혜를 누릴 것입니다.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7)
~ 만약 당신이 버려둠을 당한다면 당신은 영원전에 유기된 자일 것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이 영원전에 작정하시고 예정하시고 선택하신 일입니다. 이 일은 중간에 물리거나 변경하거나 취소되지 않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뜻과 계획으로 세워진 불변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어느누구도 하나님의 작정된 일을 맞서거나 바꾸지 못합니다. 그날에는 오직 정해진 일에 따라 나타날 것입니다. 제아무리 살겠다고 도망치고 안전한 대피장소에 숨겠다고 해도 그들은 버림을 당하고 끝내 지옥에 갈 것입니다.
~ 다만 여기서 한 가지 살펴볼 내용은 34절은 한 밤중에 일어나는 일을 묘사하고 35절은 낮에 일어나는 일을 묘사한다는 것입니다. 이 보도는 매우 논리적입니다. 왜냐하면 인자가 밤중이 된 지역의 공중에 임하신다 해도 지구의 다른 편은 낮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보도를 볼 때 성경의 기록이 얼마나 과학적이고 치밀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7) 마지막으로 주님은 주검 잇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여든다고 하셨습니다(37절)
~ 이 말씀 앞의 36절은 생략절입니다. 아마 필사과정에서 누락된 것일 것입니다. 다만 37절에서 제자들이 “주여 어디오니이까?”라고 물은 것으로 보아 ‘버려둠을 당하는 장소’에 대한 질문으로 추정됩니다. 이에 주님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주검과 독수리를 등장시킨 의미는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있는 곳마다 최후 심판이 그들을 덮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독수리는 공중을 배회하다가 먹잇감이 발견되면 급강하하여 시체를 낚아채는 하늘의 제왕입니다. 여기서 시체를 등장시민 주님의 의도를 발견해야 합니다. 버림을 당한 것은 육신의 죽음이 나이라 육신은 살았으나 영적으로 죽은 생명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우리는 육신의 생명이 마감하는 것을 지나치게 근심하고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육신의 삶은 때가 차면 종료됩니다. 육신의 상태도 늙어감에 따라 소모되고 마감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적 생명은 영원히 보존되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생에서의 삶보다도 내세에서의 삶을 바라고 소망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에 따르면 이생의 삶은 내세의 삶에 비해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 삶이 어떤 삶인지 상상조차 되지 않지만 하나님은 약속을 믿기만 하면 되는 일입니다.
3. 결어
이제 결론의 말씀을 전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성경 전반을 통하여 마음 안에 하나님 나라의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다시 말해 문제는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부적인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은 마음의 생각이 어떠 하냐에 따라 사람다움도 결정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그가 네게 먹고 마시라 할지라도 그의 마음은 너와 함께 하지 아니함이라”(잠 23:7)
~ 예수님님은 바리새인들을 독사의 자식이라 저주하면서 마음이 악하니 악한 말을 한다고 말하허셨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 12:34)
~ 또 주님은 입에서 나오는 것들이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이라 하셨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마 15:18).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 6:45)
둘째, 인생은 유한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소망은 무한 것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헛된 일에 인생을 낭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위한 인생이 아니라면 모두 헛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마음에 가득한 사람은 외로움도 느끼지 못합니다. 심심하다거나 무료하다거나 기운이 빠진다거나 하는 따위의 육신적인 것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모든 순간이 즐겁고 기쁨이 충만하며 사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복음을 전하고 복음 안에서 교제하는 일이 정말 기대되고 즐겁습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성경의 이야기를 나누게 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우리에게 “여호와를 즐거워하라”(시 33:1)고 조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만 생각해도 충분한 사람들입니다. 주님만 생각해도 배가 불러야 합니다. 나머지 것은 모두 보너스입니다.
셋째, 주님께 충성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책무를 함께 감당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매사를 규모있게, 질서있게, 계획을 가지고 잘 정돈하며 철저히 준비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 특히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이행하는 일에 게으름을 피워선 안됩니다. 노아는 무려 120년 동안 방주를 만드는 일에 인생을 쏟았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온 인생의 힘과 능력과 열정을 쏟아붓습니까? 혹시 하늘의 일보다 땅의 일을 위해 더 많은 시간과 힘과 에너지와 능력들을 사용하신다면 당신의 미래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없을지 모릅니다. 위협하는 말이 아닙니다. 진정 당신이 의미있는 인생을 원하신다면 지금 잡은 쟁기를 잠시 내려 놓고 하나님에게 나아와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내게 원하심이 무엇인가를 요청하십시오. 반드시 하나님은 당신에게 부름받은 목적을 알려주실 것이며 그 일을 하도록 당신의 발걸음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 보다 더 축복받은 인생은 없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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